온라인 연재

53회

 

   나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얘기일까? 아버지는 분명 어제 아침에는 셋째 오빠랑 통화를 했고 저녁 무렵에는 엄마하고 통화를 했었다. 오빠에게는 언제나 차 조심하고 담배는 끊지 못하겠으면 하루에 세개비만 피우고 집에서는 술을 마시지 말았으면 좋겠다고까지 했었다. 엄마와는 대체로 수화기 저편에서 엄마가 길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수화기 바깥으로 새어나오는 엄마 목소리엔 생기가 있는데 아버지는 대체로 시무룩하게 응, 응…… 하다가 헌이한테 전기밥솥에 밥 안치는 걸 배웠다고 했다. 헌이가 서울로 돌아가도 이제 밥도 해 먹을 수 있으니 아무런 걱정 말고 엄마에게 다 회복해서 돌아오라고 여유 있게 말했다. 아버지와 통화를 마친 엄마가 다시 내게 전화를 걸어와서 니가 아버지한테 밥 안치는 걸 알려줬냐?고 물었다. 알고 있으면 좋잖아요, 했더니 엄마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냐는 것이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일은 밥하는 것뿐이었다면서…… 그것까지 아버지에게 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엄마 목소리에 완강함이 배어 있었다. 엄마가 내게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것이 몇년 만인지. 아이를 잃고 내가 J시와 발걸음을 끊은 후로 엄마는 내게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했다. 우리는 속엣말을 하지 않고 별일 없느냐, 감기 조심하셔요, 밥은 먹었느냐, 편히 주무셔요…… 같은 말만 하고 지냈다. 뭐라고 대꾸를 하지 못하고 멍하니 엄마 말을 듣고만 있다가 나는 엄마…… 하고 불렀다. 밥하는 거 별거 아니잖어요. 쌀 씻어서 밥솥에 안쳐서 스위치만 누르면 되는 거잖아. 그거 알려드렸는데 왜 그래? 하자, 엄마는 그려…… 그 별거 아닌 일을 나는 평생 했다! 하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얘기가 왜 이렇게 튀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엄마가 이제 내 기색을 살피지 않고 예전의 엄마로 돌아간 것 같아 나쁘지 않았다. 예전의 나. 엄마 마음 어딘가를 긁어놓고 통화를 하다가 엄마가 먼저 전화를 끊으면 내가 다시 전화를 해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엄마에게 다시 전화하지 않았던 나. 애가 탄 엄마가 다시 전화를 해서 너가 잘못해놓고 왜 전화를 안 하냐?고 묻게 두었던 나. 나도 예전의 나로 돌아간 것일까. 전화를 먼저 끊어버린 엄마에게 나는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예전으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엄마도 다시 전화하지 않았으니까. 그게 어제의 일이다.

   ―언제부터 안 들렸어요?

   ―며칠 되었어……

   ―안 들린다면서 여태 어떻게 통화를 했어요? 어제도 했잖아요?

   ―그거야…… 늘 들어왔던 말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대답하고 하고 싶은 말 하고.

   전화를 받아봐야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휴대전화를 집에 놓고 나간 것을 모르고 나는 그동안 아버지가 놓고 나간 휴대전화를 들고 아버지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마을회관에 있는 아버지에게 가져다주고 우사 옆 엄마가 밭에 심어놓은 익은 가지를 따고 있는 아버지의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넣어주었다. 그끄저께 비가 그쳤을 때는 아버지가 놓고 간 휴대전화를 들고 J시의 국악원까지 찾아갔다. 아버지는 국악원 사람들과 북채를 잡고 있다가 나를 멀거니 봤다. 나는 이걸 놓고 다니시면 안 돼요, 연락이 닿아야지, 잔소리를 했다. 아버지가 입고 있는 셔츠 윗주머니에 휴대전화를 꽂아주고 국악원을 나와 여름 햇살 아래 망연히 있다가 홀로 J시를 천천히 걸어다녔다. 아버지가 다니는 국악원이 내가 다니던 중학교와 가까운 걸 깨닫고서 발길을 그쪽으로 돌리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학생이 앞에 분 비켜, 비켜, 소리를 쳤다. 놀란 내가 한쪽으로 비키자 학생은 자전거를 탄 채 뒤돌아보며 미안합니다, 따르릉이 고장이 나서요! 쾌활하게 외치고는 페달을 굴려 쌩하니 사라졌다. 나는 학생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한동안 서 있었다. 오래전에 나도 이 고장에서 자전거를 타고 중학교에 다녔다는 생각. 둘째 오빠가 내게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게 하다가 포기한 뒤에 나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일러주었던 건 아버지였다는 생각. 자전거 타기를 배울 때가 떠오르자 자연스럽게 무릎에 힘이 갔다. 넘어질 때마다 하필 꼭 무릎이 깨졌었지. 살갗이 찢긴 자리에 맺히던 핏방울. 깨진 무릎은 빨리 낫지 않고 염증이 생기곤 했다. 아물어가던 염증의 더께는 물만 닿으면 다시 떨어져나가곤 했다.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던 아버지 손길도 떠올랐다. 자전거 타기를 포기하려는 나에게 한번 배워놓으면 평생을 탈 수 있다고 다독거리던 목소리도. 몸으로 익혀서일까. 아버지 말처럼 그때 자전거 타기를 배워놓은 덕에 나는 지금까지도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오래전 갓 배운 자전거를 타고 등교했던 J시 중학교 교문의 위치가 바뀌어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교문 자리에 서서 학교 안을 기웃거리다가 돌아섰다. 음악실까지 이어지는 긴 화단이 있고 교무실 앞에는 종이 매달려 있었다. 수업 시작과 수업 끝에 종소리가 울려퍼지곤 했다. 그때마다 종을 치던 사람은 누구였을지. 이 고장을 떠나서도 어디에서든 종소리를 들으면 이곳에서 들었던 종소리가 생각나곤 했다. 프라하의 카를 다리 건너에 있던 성당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을 시디시게 만들었던 성당 종소리를 들을 때도 이 작은 고장의 중학교에서 들었던 수업종 소리가 떠오르곤 했다.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으면 나는 붉은 벽돌에 매달려 있던 그 종이 아직도 그 자리에 존재하는지 확인했을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들이나 교직원들의 자전거를 세워두었던 본관 뒤쪽의 등나무가 아직도 그대로인지도. 나는 보라색 꽃이 피는 그 등나무 아래가 좋았다. 그 등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게. 까마득히 잊고 있던 옛일들이다. 나는 이렇게 변했는데 내가 떠난 자리라고 그대로이겠는지. 새 교문의 위치를 찾아볼 마음까지는 일지 않아 학교 앞에서 물러나와 J시의 거리를 걷다보니 대흥리 다리 위였다. 오래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아버지가 피로하고 작아 보여 나도 모르게 외면했던 다리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폭우에 불어난 물이 콸콸 거센 소리를 내며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물의 소용돌이가 일으킨 흰 거품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돌진하며 여태 살던 대로 계속 살 거야? 외치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왈칵 뒤집어지면서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J시에 와서 처음으로 아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J시에 오지 않았던 지난 몇년 동안 아이의 얼굴을 제대로 떠올릴 수가 없었다. 늘 뭉개진 얼굴이어서. 아이를 잃고 집 문패 주소 옆에 아이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문패 옆에 아이가 스케치북에 그린 도마뱀을 동으로 본떠서 붙여본 것을 시작으로 나는 아이가 남긴 것들을 본뜨는 걸 내가 직접 해보려고 공방에 나가 시간을 보냈다. 흔적들에 집착할수록 아이에 대한 실감은 멀어졌다. 내가 아이의 얼굴을 기억조차 못하게 된 것 같아 밤에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아이의 사진들을 불러와 들여다봤다. 꿈속에서조차 나타나주지 않던 아이가 느닷없이 J시 하천의 흰 물거품 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다니. 나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아버지가 북을 치고 있는 국악원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내가 먼저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가 국악원 복도에서 나를 발견한 아버지가 헌이냐? 불렀을 때 얼른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팔짱을 꼈던 그끄저께.

 

   J시에 내려온 후로 나도 모르게 아침마다 아버지에게 지난밤 잘 주무셨어요?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대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 헛간에 들어가 앉아 있던 날도, 작은방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잘 잤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수면장애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는데도 지난밤 잘 주무셨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날의 아버지. 하루 일을 마친 그을린 모습으로 대문을 밀치고 들어와 식구들과 밥상에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고 난 후 이른 저녁부터 가늘게 코까지 골며 깊이 잠들던 아버지. 아버지가 깊은 잠을 자던 집은 우리 가족의 안식처였다는 생각.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지. 아버지가 편하게 깊은 잠을 자는 집은 든든했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시절부터인가 잠을 자지 못하고 몽유병 환자처럼 집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느라 피로에 절어 혼절하는 상태가 될 때까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니. 여동생이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 올 것을 권유했지만 아버지가 거부했다. 엄마가 아파서 서울의 자식에게 가 있는데 당신마저 갈 수는 없다고 했다. 내가 아버지도 서울에 가서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고 치료도 받아야 한다고 하니 아버지는 내게는 좀처럼 내지 않던 화까지 냈다.

   ―잠 좀 편히 못 잔다고 환자 취급을 하냐?

   ―…….

   나는 아버지에게 서울에 가기 싫으면 C시의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나는 어쨌든 아버지의 뇌 사진을 찍어보고 싶었다. C시는 J시가 속한 도의 도청 소재지로 아버지가 다니던 예수병원이 있었다. 어렸을 때 J시 사람들이 크게 아프거나 입원할 일과 대면하게 되면 찾던 병원이어서 나는 지금도 그 병원이 C시에서 가장 큰 병원이라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서울행은 막무가내로 거부하니 C시의 예수병원에 가봐야겠다고 했을 때 여동생이 그 병원은 이제 옛 명성이 되었다며 C시 이름이 붙은 대학병원에 가라고 했다. C시에 대학병원이 생겼냐고 물으니 여동생은 C시에 대학병원이 생긴 지가 언제 일인데 아직도 모르고 있어? 태어난 고장 일에 관심 좀 가지시지, 하며 웃었다. J시의 변화도 잘 모르는데 내가 어찌 C시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알겠냐고 했더니 여동생은 언니는 맨해튼에 대해서는 잘 알던데? 첼시마켓이 어디에 있고 에밀리인지 에이미인지 하는 빵집 이름까지 알더만? 하다가 이내 그냥 그렇다는 얘기야, 했다. 내가 그랬던가. 나는 아버지에게 병원에 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랜만에 나랑 C시로 놀러 가는 것으로 생각하면 어때요, 물었다. 대답 안 하는 것으로 퉁치는 아버지에게 틈만 나면 C시에 다녀오자고 하니 아버지는 마지못해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가겠다고 했다.

   ―알리면 왜 안 되는데 아버지?

   ―걱정 끼치기 싫다.

   걱정 끼치기 싫다는 아버지에게 내가 뭐랄 수는 없었다. 나 또한 걱정 끼치기 싫다는 이유로 그동안 아버지가 내 집에 오는 것도 막았던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와 함께 간 C시의 거리는 몰라보게 변해 있어서 시외버스에서 내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자 아버지가 저기서 택시를 타고 가자,며 앞장을 섰다. 예전에 봤던 모습들은 찾을 수가 없어 옛 감각을 기준으로 길을 찾으려다가는 낭패를 볼 것 같았다. 내가 택시 안에서 변화한 C시의 거리를 내다보며 막막한 표정을 짓자 아버지가 저기 보이는 것이 전동성당이고, 저기가 새로 생긴 한옥마을이라고 일러주었다. C시를 설명해주는 아버지는 정말 나를 데리고 놀러 가는 사람 같기도 했다. 예약을 하고 왔는데도 두시간을 기다려서야 수면장애 검사가 시작되었다. 검사 전에 아버지의 상황과 아버지의 병력을 세밀히 적어야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설문지의 간단한 내용을 작성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자는 사람이나 알 수 있는 내용도 있어서 내 생각만으로 적을 수 없는 항목도 있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 잠 습관에 대해 묻다가 나는 아득해지곤 했다. 엄마의 기억에 의하면 아버지가 밤에 자다가 일어나 우두커니 앉아 있기 시작한 것은 30년이 지났고, 격한 잠꼬대를 시작한 것도 이십년은 지난 이야기이며, 아버지가 자다가 일어나서 마당을 서성거리거다 헛간에 들어가는 일도 십오년 전부터 있어온 묵은 것들이었다.

   ―왜 그런 말씀을 이제야 하세요?

   ―너나 이제 아는 일이지……

   내가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문지 하나 작성하지 못할 정도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울적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수면장애 검사를 마친 후 나흘 후에 나 혼자 C시로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갔을 때 차트를 유심히 살펴보던 의사는 아버지 육체는 쉬고 싶은데 뇌의 일부분이 잠들지 않는 거라고 J시 병원 의사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했다. 아버지의 몸은 늙고 지치고 피곤한 상태라 해가 지면 자고 싶어하지만 아버지의 뇌는 깨어 있는 거라고. C시 의사의 목소리를 듣는데 언젠가 그와 비슷한 말을 했던 여동생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오래 방치해온 수면장애로 인해 아버지는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도 했다. 불안장애, 공황장애도 동시에 겪고 있다고. 어느 것이 먼저인지를 지금 알아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초기라면 우울증과 불안, 공황장애 때문에 수면장애가 온 것인지, 그 반대였는지를 관찰해서 치료법을 찾아야겠으나 지금은 분리해서 관찰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서로 엉겨붙어 있다고. 단기간에 치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무엇 때문일까요?

   나의 질문에 의사도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의 질문은 우문이었을 것이다. 사람마다 과거가 같을 수 없듯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도 모두 다를 테니까.

   C시의 병원에 다녀온 후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마음이 자주 어두워지면서 아버지의 뇌 속을 상상하곤 했다. 한밤중에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뇌를 검색해 호두알처럼 생긴 뇌의 이마엽이며 솔방울샘이며 기억을 저장하는 역할을 맡은 대뇌의 구조를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했다. 아버지의 뇌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잊지 못하고 있기에 온전히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지? 아버지가 자주 울고 있는 것도 아버지의 뇌는 알고 있는지? 심리치료 병행을 권유하는 하는 의사가 병원 내의 심리치료실과 연결을 해주려고 했으나 나는 보류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약물치료 처방전만 받아서 여동생에게 보내면서 아버지가 심리치료 상담을 받을 수 있을까? 물으니 여동생은 힘들 거라고 했다. 이미 자신이 오래전부터 아버지에게 권유해온 일인데 그때마다 아버지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고.

   ―그런 일이 있었어? 왜 내게 말 안 했어?

   나는 엄마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여동생에게 하고 있었다.

   ―언니가 듣고도 잊었을 거야, 나는 말했어 언니.

   나는 막막해서 눈을 꾹 감아버렸다. 나는 어떤 시간을 보냈길래 엄마에게서는 너나 이제 아는 일이지,라는 말을 여동생에게서는 언니가 듣고도 잊었을 거야,라는 말을 듣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