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지연의 출근시간은 아침 9시였다. 셰프가 야심차게 준비한 프랑스식 브런치는 오전 10시부터 2시까지였다. 한시간 전에 미리 출근하여 오픈 준비를 도와야 했다. 포크와 스푼 등의 커트러리를 테이블에 세팅하고, 물잔과 와인잔을 세심하게 살펴본 후 제자리에 놓아야 했다. 손님 눈에 작은 얼룩이라도 발견되면 낭패였다. 그곳을 찾는 손님 대부분은 그런 면에 대해 까다로웠다. 불만의 요소를 찾아낸 손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책임자를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지연에게 아무 책임과 권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심부름이나 하는 한낱 말단직원을 상대로 쓸데없는 힘을 빼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어느날, 문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남녀 커플이 자리에 들어와 앉았다. 앉자마자 남자가 조용히 유리컵을 치켜 들었다. 지연은 물을 따라달라는 뜻으로 알아듣고는 서둘러 다가갔다. 남자는 말없이 손가락 끝으로 컵을 톡톡 쳤다. 남자의 손이 닿은 곳에 립스틱 자국으로 추정되는 유분 얼룩이 남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연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정말 죄송합니다. 얼른 새 컵으로 바꿔 오겠습니다.”
“됐고.”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매니저 불러주세요.”
마침 매니저는 감기라며 병원에 들렀다 조금 늦게 출근하겠다고 했던 날이었다. 지연이 머뭇거리는 동안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유리컵을 톡톡 치고 있기만 했다 그 앞에 앉은 여자도 입을 꼭 다물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연이 할 수 있는 일은, 몇번이고 고개를 조아리는 것뿐이었다.
“저희는 책임자의 사과를 받아야겠거든요.”
여자는 한마디 한마디를 딱딱 끊어서 발음했다. 지연은 그들의 눈빛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그 눈빛에 어린 것은 힐난이나 경멸의 기색이 아니었다. 거기 담긴 것은 차라리 무심이었다. 내 삶과 아무 관계 없는 길가의 돌멩이나 전신주를 바라볼 때의 감흥 없음, 그것이었다. 1미터도 안 되는 거리 앞에 선, 자신의 존재 자체를 철저히 무시하는 그 존재들에게 지연은 어떤 항변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테이블 위에서 손을 맞잡고 있었다. 지연은 큐티클 하나 없이 잘 관리된 그 남자의 단정한 손톱과, 연한 민트색 네일로 공들여 칠한 그 여자의 손톱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들은 결국, 병원 대기실에서 부랴부랴 달려온 매니저의 정중한 사과를 받고서 자리를 떴다.
오후 2시가 한참 지난 뒤에 들어와서는 꼭 브런치 메뉴를 주문해야겠다는 손님들도 종종 있었다.
“겨우 한시간 지났는데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일단 반말로 지르고 보는 것은, 중년 이후의 남성 손님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가씨가 그냥 그렇게 해줘. 되는 거 다 알아.”
“죄송합니다.”
그럴 때도 지연이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거참, 안 그렇게 생겨서 되게 빡빡하게 구네. 착하게 뭐든지 다 줄 것처럼 생겨서는.”
얼굴이 홧홧해졌다. 이 새끼야, 입이 뚫렸다고 아무 소리나 지껄이지 마라. 남의 것까지 모든지 다 빼앗아 먹을 것처럼 생겨서는. 그렇게 퍼붓지 못한 말들을, 지연은 잠자리에 누워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중얼거릴 때마다 몸이 더 웅크러들었다.
“나 여기 면접 봤을 때 경쟁자가 네명 있었거든요. 근데 우리 사장이 왜 나를 뽑았는지 알아요?”
민규는 대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연의 말을 듣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네, 왜, 아니, 같은 짧은 말을 표정으로 하기도 하였다. 지연은 민규의 그 말없는 말이 좋았다. 상대에 대한 배려나 내면의 여유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 앞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고생 안 하고 자란 것처럼 생겨서래요. 웃기지 않아요?”
“아, 네.”
“고생하고 자란 거랑, 안 하고 자란 거랑 얼굴이 뭐가 다른가? 오빠가 보기엔 어때요? 다른 것 같아요?”
민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생각해본 적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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