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14회

그리고, 일주일이 넘도록 학교를 가지 못했다. 지독한 독감에 걸린 것이다. “제 소원은 헐크가 되는 거였어요.” 사회자가 말했다. 다시 어린 시절로 갈 수 있다면 이런 첫 문장을 썼을 것이다. 내 소원은 헐크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저를 화나게 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헐크. 하지만 절대 절대 화는 내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헐크로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헐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화를 내지 않는 그런 남자가 되고 싶었다고요.” 사회자는 말했다. 그는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영웅이 나오는 만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놀림받을까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그는 순정 만화를 좋아했다. 언젠가 그의 어머니가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범이 어릴 때 얼마나 울보였는지 아니? 드라마를 보다 울고, 만화영화를 보다 울고, 그랬단다. 아버지의 제삿날이어서 그는 거실에 앉아 밤을 치고 있었다. 아직 아이가 생기기 전, 그러니까 신혼 때의 일이었다. 내가 언제요? 그가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전을 부치던 어머니가 말했다. 너 맨날 울었잖니. 눈이 커다란 여자아이들이 나오는 만화를 보면서. 어머니가 깔깔깔 웃었다. 아내도 깔깔깔 웃었다. 그때 그는 울보였던 꼬마가 두 여자를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컸다는 게 뿌듯하게 느껴졌다. “헐크 얘기를 들어보니…… 저도 되고 싶었던 게 있었어요. 가제트 형사 알아요? 그 가제트가 되고 싶었어요.” 그가 말하자 사회자가 갑자기 오른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나와라 가제트 팔.” 그 말을 듣자 그도 오른팔을 뻗어 똑같이 외쳤다. “나와라 가제트 팔.”

진구는 어떤 만화 영화를 좋아했을까?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동생과 무엇을 보았을까? <전설의 고향>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동생을 울리지는 않았겠지. 진구가 아니라 형구라면 그랬을 것 같다. 형구는 동생들이 무섭다고 울면 울수록 일부러 볼륨을 높일 것이다. 그는 진구가 살았던 단칸방의 풍경을 떠올려보았다. 촬영용 방이었기 때문에 한쪽 벽이 뚫려 있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그는 그 방에만 들어서면 늘 추웠다. 한여름에도 그랬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낡은 장롱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는 이불이 들어 있었는데, 이불을 펴고 개는 것은 진구의 몫이었다. 그는 그 이불이 꽤나 무거웠던 것으로 기억했다. 베개는 어린 진구와 민지가 베기에는 높았다. 자는 장면을 찍을 때마다 베개의 가운데 부분을 주먹으로 눌러 납작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났다. 마주 보는 벽에는 앉은뱅이책상이 있었다. 아마도 형구의 책상일 것이다. 진구는 상을 펴고 공부를 했으니까. 동생 민지를 앞에 앉혀두고 받아쓰기 공부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나면 상 위에 지우개똥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앉은뱅이책상 옆에는 무엇이 있었지? 서랍장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서랍장은 진구의 방이 아니라 진짜 집에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와 단칸방에 살 적에. 거기에 껌을 살 때 같이 들어 있던 스티커를 붙였던 기억이 났다. 그걸 붙였다고 어머니한테 혼이 났다. 그래, 서랍장은 집에 있던 거였다. 새집을 사서 이사를 가던 날 어머니는 그 서랍장을 버렸다. 그는 집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서랍장을 열어보았다. 거기에 손톱깎이가 들어 있었다. 그걸 주머니에 넣었다가 깜빡했다. 그리고 잠자기 전에 옷을 갈아입다가 발견했다. 그는 새집에서, 처음으로 생긴 자신만의 방에서, 손톱 발톱을 깎았다. 탁, 탁, 탁. 가구 하나 없던 방이 손톱 깎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랬구나. 그는 그 기억이 떠오른 게 기뻤다. 그는 처음으로 생긴 나만의 방에서 손톱을 깎던 열한살짜리 남자아이를 상상해보았다. 그는 그 방에서 이십년을 살았다. 그해 어머니가 생일선물로 사준 책상도 이십년을 썼다. 의자만 두번 바꾸었다.

형구의 앉은뱅이책상에 영어사전이 꽂혀 있었다. 촬영 중에는 그 앉은뱅이책상이 형구의 것이었지만, 촬영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그의 것이 되었다. 그는 앉은뱅이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밀린 숙제를 하고, 일일공부라는 학습지도 풀었다. 책상 옆에는 가구가 없었다. 거기에는 작은 문이 있었다. 부엌과 통하는 문이었다. 그렇다면 텔레비전은 어디 있었을까? 그는 기억을 더듬어 방 안 풍경을 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텔레비전은 없었던 것 같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진구네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진구와 민지는 어디서 텔레비전을 보았을까요?” 그의 말에 사회자가 들고 있던 대본을 뒤적거렸다. “그러게요. 그럼 그 아이들은 종일 무얼 하고 놀았을까요?” 사회자는 다시 한번 스튜디오에 걸려 있는 사진들을 보았다. “여기 걸린 사진들도 집 안 장면은 없네요. 텔레비전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사회자가 방청객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때 방청석에 앉아 있던 한 여자가 갑자기 소리쳤다. “주인집이요. 주인집에 가서 봤어요.” 카메라맨이 몸을 돌려 소리친 여자를 찍었다. 사회자가 방청객을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주인집이라니요?” 방청객 여자가 다시 설명했다. 진구와 민지는 늘 주인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았다고, 주인집 여자는 여름이면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볼 수 있도록 거실의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두곤 했다고. “그때가 몇살이셨나요?” 그가 물었다. 여자가 대답했다. “중학생이었어요. 3학년이었는데 한회도 빠짐없이 봤어요. 할머니가 좋아하셨거든요.” 사회자가 얼마나 좋아했으면 삼십여년이 지난 드라마를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느냐며 말했다. “그 덕분에 궁금한 거 하나는 해결했지만요.” 그러고는 여자를 향해 박수를 쳤다. 다른 방청객들도 박수를 쳤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혹시 진구의 성도 기억나는지 물었다. 여자는 아까부터 계속 생각해봤는데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앉아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런 장면이 생각났어요. 진구의 송곳니를 빼던 장면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진구의 이를 실로 묶고는 오른손으로 진구의 이마를 딱! 그랬더니 실에 송곳니가 매달려 있었죠. 그게 너무 진짜 같았어요.” 그는 아홉살에서 열살까지. 촬영을 하는 동안 여러개의 이가 빠졌다. 이를 지붕에 던질 때 진짜 자신의 이로 던지기도 했다.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진짜였어요. 이가 흔들려서, 아마도 PD가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만든 장면이었을 거예요.” 그는 이를 빼고도 울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울지도 않고 장하다,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자, 그럼, 이 문제는 해결되었어요. 진구는 주인집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답니다.” 사회자가 다시 한번 정리했다. “그리고, 혹시, 진구의 성을 아는 분이 계신다면 이 방송을 보신 후 연락주세요.” 그는 알게 되면 꼭 자기에게도 가르쳐달라고 사회자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