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15회

발단은 쇼핑백이었다. 한 중년 남자손님이 유리진열장 안의 마카롱을 포장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주문대로 지연은 마카롱 여섯개를 상자 안에 잘 담은 뒤에 건네주었다. 상자 윗부분의 종이를 펴면 손잡이가 되었다. 그러자 손님은 다짜고짜 반말로 요구했다.

“비닐봉투.”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찍 던지는 손님은 생각보다 흔했다. 지연은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매뉴얼에 따라 응답했다.

“일회용 비닐봉투는 규정상 오십원을 받아야만 합니다. 넣어드릴까요?”

얼마 전 환경분담금을 받지 않고 봉투를 무상지급하다 단속에 걸린 후 매니저는 이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매니저나 오너는 강조하기만 할 뿐, 현장에서 불만 어린 고객들을 응대하는 것은 아르바이트생의 몫이었다. 손님은 콧방귀를 뀌었다.

“무슨 소리야? 엊그제는 그냥 줬는데?”

“죄송합니다. 원칙이 그렇습니다.”

“얘, 말이 안 통하네. 야, 내가 지금 오십원이 없어서 그러는 거 같아?”

지연과 같은 또래의 여자 손님이 계산서를 들고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 도리 없이 이 남자에게 비닐봉투 하나를 내어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때 뒤에 선 여자 손님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이 모든 지지부진한 실랑이가 지겨워 죽겠다는 것을 감추지 않는 한숨 소리였다. 마치 거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지연의 입에서도 저도 모르게 조그만 한숨이 따라 새나왔다. 그건 이를테면 어떤 생리작용에 가까운 것이었다.

“휴.”

그 소리를 들은 진상 고객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에이 씨,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계산대에 내동댕이쳤다. 유리 재질의 계산대 탁자와, 그의 핸드폰이 동시에 부서졌다. 매장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 비명을 지연이 지르지 않았다는 것, 그녀의 입술은 내내 꼭 닫혀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매장 내에 남자직원은 없었다. 매니저가 밖으로 달려나가 주차요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두명의 주차요원이 들어와 그 남자의 팔을 뒤로 꺾어 잡았다. 그중 하나가 민규였다.

“이 새끼들이 어디를 잡아? 경찰 불러! 당장 불러!”

잠시 후 경찰 대신 보안업체 직원들이 달려왔다. 남색 제복을 입은 보안업체 직원들 옆에서 주차요원들은 어쩐지 초라해 보인다고 지연은 생각했다.

그날 늦은 오후, 다음 알바와 교대하고 매장을 나서는데 민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민규의 퇴근 시간이 지연보다 한시간 빨랐다. 민규가 유니폼을 벗고 사복을 입은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는 무릎이 나온 베이지색 면바지에 유니클로에서 구입했을 것 같은 체크무늬 남방셔츠 차림이었다. 외모에 비해 감각은 영 별로였다.

“다친 데 없어요?”

민규가 물었다.

“아니요.”

지연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들은 지하철역까지 나란히 걸었다. 가는 길에 약국이 보이자 민규는 또 한번 같은 말을 물었다. 어쩐지 미니시리즈 같은 전개라고 지연은 생각했다. 16부작 드라마의 2회나 3회쯤에 일어날 법한 일화였다.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던 남자는, 알고 보니 재벌의 숨겨진 아들이거나, 또. 지연의 생각은 거기에서 더 가지를 뻗어나가지 못했다. 그녀는 쓴웃음이 났다. 드라마의 남아 있는 14회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런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그런 식의 판타지를 믿지도 않았다. 그녀가 믿는 것은 자신의 지갑 속 체크카드의 잔액, 급여 지급을 미루는 고용주를 신고할 수 있는 고용노동청의 전화번호 정도가 다였다. 어느새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걸었는데 보통 때보다 빨리 도착했다는 느낌이었다.

“어디로 가나요?”

민규가 지연의 눈을 보고 물었다. 지연은 집으로 간다고 말했다. 평일 저녁 아르바이트는 자리도 별로 없고 구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원래 저녁 알바 있는데 오늘은 못 간다고 했어요.”

민규의 눈빛은 몹시 진지했다. 지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눈을 살짝 피했다. 이것은, 그녀가 바라온 시작이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시작이기도 했다. 어떤 시작 앞에 서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훗날, 그들은 그날을 두 사람의 ‘첫날’로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