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16회

그는 녹화를 끝내면 사회자와 술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술자리에 가는 일이 피곤했다. 일년에 한번씩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지도 삼년이 되었다. 업무상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시는 날이면 그는 집 앞 단골 술집에 들러 가지튀김과 맥주 한잔을 마셨다. 안주도 맛있고 술값도 쌌지만, 모든 테이블이 2인석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술집은 늘 조용했고, 그래서인지 그곳에서 술을 마시면 하루를 잘 마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시끌벅적한 술집이 생각났다. 곱창전골이나 삼겹살구이 같은 안주들. 가운데 불판에 있는 둥근 드럼통 테이블이 있는 술집.

그의 어머니는 마흔이 넘어 뒤늦게 술을 배웠다. 어머니의 분식집 옆에 순대볶음집이 새로 들어왔는데, 그 가게 주인이 어머니를 언니라고 부르며 살갑게 굴었다. 그의 어머니는 가게 문을 닫으면 순대볶음집에 들러 술을 한잔하곤 했다. 순대집 여자가 남은 재료로 어머니를 위해 안주를 만들어주었다. 같은 상가에서 팔년째 속옷가게를 하는 여자도 종종 끼었다. 술을 마시다보니 신세 한탄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어머니는 속옷가게 여자도 일찍 남편을 잃고 딸을 하나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대집 여자는 결혼한 지 일년 만에 이혼을 했고, 그후로 두명의 남자와 사귀었고, 그중 한명과는 육개월 정도 같이 살았지만 잘 안되었다고 고백했다. 셋은 건배를 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기다릴 남편도 없는데 마시자. 그의 어머니는 술을 마시면 실없이 웃었다. 웃으면서 어머니는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이제서야 마시게 된 걸까, 하고. 한번은 상가 사람들과 남쪽으로 꽃구경을 갔다 왔는데 돌아와서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다른 건 하나도 안 미안한데 아버지에게 술을 배우지 못하게 된 건 미안하다고. 그때 그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마, 엄마. 엄마가 재혼할 때까지 술 안 배우고 있을게. “물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죠. 어머니 몰래 술을 마셨거든요.” 그가 말했다. “전 솔직히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술을 배운 아들을 본 적이 없어요.” 사회자가 말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사회자가 박수를 한번 쳤다. “우리는 딸들에게 처음으로 술을 사주는 아버지가 되도록 해봅시다.” 사회자는 박수를 친 두 손을 계속 맞잡고 있었다. 마치 기도를 하는 것처럼.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연달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망쳤다. 고등학생이 되어 가장 열심히 공부한 게 그해 여름방학이었기 때문에 그는 크게 실망했다. 성적이 떨어지자 겨울방학 중 자율학습을 신청해 매일 학교에 나갔다.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오래된 집은 단열이 잘되지 않아 이불 속에 누워 있으면 코끝이 시렸다. 그는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공부를 했다. 이불이 무거워서 금방 어깨가 아파왔다. 게다가 엉덩이는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뜨거웠다. 다음날 문제집을 펼쳐보면 전날 풀었던 문제들이 처음 본 것처럼 낯설었다. 나는 누구를 닮아 이렇게 멍청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아버지 탓을 했다. 아버지를 닮아서 공부를 못하는 거라고. 그렇게 세상에 없는 사람을 탓하고 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학교에 나갔다. 자율학습을 신청한 아이들이 스무명 정도 되었는데, 공부를 하다 고개를 들면 빈자리의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맨 뒷자리에 앉아서 아이들의 뒤통수를 연결해보았다. 어떤 날은 북두칠성을 만들었고, 어떤 날은 받침이 없는 단어들을 만들었다. 바보. 비. 너, 나. 그런 단어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그는 학교에 갔다. 새해에도 하루만 쉬고 학교에 갔다. 그런 날은 아이들이 몇명 없었다. 대체로 반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을 내는 아이들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쉬는 날에는 쉬었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아예 자율학습을 하지 않았다. 어중간한 녀석들뿐이네. 그는 반 아이들의 뒤통수를 보면서 어중간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중간이라는 말 앞에 붙은 ‘어’ 자는 무엇인가. 어중간, 어정쩡, 어수룩…… 어로 시작되는 말을 찾아보다가 그 모든 단어들이 자기를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풀던 문제집을 덮고 가방을 쌌다. 어쩌구. 어쩌려구. 가방을 싸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었다. 앞에 앉은 아이가 뒤돌아보았다. 교문 밖을 나서니 찻길 건너 문방구 주인이 가게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게 보였다. 그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문방구 주인이 담배 연기를 내뿜을 때, 그 앞을 지나면서 숨을 깊게 들이마셔보았다. 조금 더 길을 걷다보니 전봇대에 광고지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술집 광고였다. 두명이 오면 소주 한병이 공짜, 네명이 오면 안주 하나가 공짜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그날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갔다. 길을 걸으면서 가게들을 기웃거려보았는데, 하나같이 장사가 잘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자신이 사는 동네로 갈수록 더더욱 그런 가게들이 보였다. 그는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는 구멍가게에 이마를 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할머니가 앉아서 졸고 있었다. 그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뭐 찾아? 할머니가 물었다. 아이스크림이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스크림이라고 말을 했다. 없어. 할머니가 말했다. 아이스크림도 팔지 않는 슈퍼라니. 그럼 콜라는요? 그는 물었다. 할머니가 그의 뒤를 가리켰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콜라 옆에 소주가 보였다. 그는 소주 한병을 꺼냈다. 할머니에게 천원을 내밀자 거스름돈을 주면서 할머니가 말했다. 안주는? 그는 할머니가 자신의 나이를 묻지 않은 게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안주는 필요없어요. 그는 가방에 소주 한병을 넣고 길을 걸었다. 어디서 마셔야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장소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속담이 생각났어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요. 어머니는 늘 늦게 돌아오니까요. 게다가 두시간이나 걸었더니 발가락이 꽁꽁 얼었거든요.” 그래서 그는 집으로 갔다. 당연히 집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현관문을 열기 전에 노크를 했다. 문을 열면서 계세요, 하고 소리도 냈다. 도둑이 된 기분이 들었다. 찬장에는 소주잔이 없었다. 그는 컵에 소주를 반쯤 따랐다. 그걸 세번에 나눠 마셨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반찬이라고는 김치밖에 없었다. 첫 안주로 김치를 먹을 수는 없지. 그는 생각했다. 그는 방바닥에 깔아놓은 이불 밑으로 발을 넣었다. 언 발이 녹으면서 발가락이 간질간질했다. 누가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것 같더니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밖으로 나와 마당을 서성였다. 그러다 담벼락에 쌓여 있는 눈뭉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차가운 눈이 입안에서 녹았다. 울렁거리던 기운이 가라앉았다. 눈이 맛있게 느껴졌다. “전 지금도 얼음을 안주로 먹어요. 소주 한잔에 얼음 한조각. 녹여 먹어도 맛있고 씹어 먹어도 맛있죠.” 그는 말했다. 사회자가 안줏값이 별로 들지 않아 좋겠다고 대꾸했다. 어쩌다 집에서 술 한잔하게 되면 어린 그의 딸이 그의 입에 얼음을 넣어주곤 했다. 아빠 손 시려, 빨리. 그렇게 말하면 그는 얼음 안주를 먹기 위해서라도 재빨리 술을 마셨다. “참, 이 방송을 보는 청소년 여러분. 십대에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사회자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말했다. “그러면 저처럼 평생 맛없는 안주를 먹게 된답니다. 술은 꼭 좋은 안주를 사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거든 마셔요.” 그는 자신의 말이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방청객 아무도 그 말을 듣고 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