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민규는 퍽 성실한 성격이었다. 두군데의 일터에서 한번도 결근이나 지각을 한 적 없었고 5분이라도 일찍 나가 준비하는 태도가 몸에 밴 듯했다. 지연을 만난 뒤부터는, 일과 일 사이에 간신히 나는 여유시간의 전부를 그녀를 위해 사용했다. 그는 지연에게 자꾸 무언가를 해주려 했다. 그녀가 무심코 했던 말을 놓치지 않았다. 언젠가 한번은 밤에 전화통화를 하다가, 머리칼을 묶는 고무줄밴드는 사놓기만 하면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린다는 이야기를 그녀가 한 적이 있었다. 다음날 출근길 그는 비닐팩에 담긴 고무줄밴드 묶음을 한무더기 들고 와서 잠자코 내밀었다. 삼년 동안 머리를 묶어도 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지연은 어쩐지 기가 질렸다.
“어디서 났어?”
설마 훔치기라도 했겠느냐는 표정으로 민규가 대답했다.
“저 앞 마트에서 샀는데.”
“혹시 거기 있는 거 전부 싹 쓸어 온 거야?”
“응.”
“왜?”
“없다고 했었잖아.”
“아.”
지연은 제가 그렇게 말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행동이 그가 보유한 성실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도 특별한 것인지 지연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원래 누굴 사귈 때 잘해주는 편?”
퇴근길, 여느 때처럼 늘 가는 밥집을 향해 손을 잡고 걷다가 지연이 무심코 물었다. 잠시의 간격을 두고 민규가 입을 열었다.
“음, 몰라.”
“그걸 왜 몰라.”
장난스럽게 지연이 받아쳤다. 민규가 걸음을 멈추었다.
“전에 누굴 사귄 적이 없어서.”
“핏.”
지연은 당연히 그가 하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알아들었다. 민규가 그녀와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지연의 손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팠다.
“정말이야.”
그는 입꼬리를 위로 치켜 올리지도 않고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그 자리에 정지해 있었다. 그녀도 함께 멈춰 서 있었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한줄기 불어왔다. 미처 정리되지 않은 지연의 앞 머리카락이 한쪽 눈을 덮었다. 지연은 어쩌면 그때 민규에게 붙잡힌 손을 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머리칼을 정리하는 척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가 또 다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처음이야.”
민규가 지연을 비스듬히 마주 보고 섰다.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앞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겨 귀에 꽂아주었다. 그러곤 그녀의 이마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손바닥의 온도가 뜨거웠다. 지연은 손을 놓을 수 있는 타이밍이 이미 지나갔음을 깨달았다. 지금껏 그녀는 누군가의 처음이 되어본 적 없었다. 타인에게 맹목적 사랑이나 관심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그때 그녀를 휘감은 감정은 창백하고 낯선 두려움에 가까웠다.
일주일쯤 뒤 민규가 저녁에 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지연이 이유를 묻자 민규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러라고 했잖아.”
지연으로서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언제?”
“엊그제 밥 먹으면서 그랬잖아. 일찍 헤어지기가 아쉽다고.”
“응?”
지연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무심결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도 같았다. 그것은 늘 같은 패턴으로, 늦은 오후에서 어둠이 내리기 직전까지만 이루어지는 데이트 아닌 데이트가 아쉽다는 뜻이었지, 민규더러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라는 뜻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민규는 정색을 한 채 말하고 있었다. 뒤늦게 지연이 당혹스러워하는 기미를 눈치챘는지 그가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 사는 곳도 너무 멀어지게 되어서 밤에 들어가기가 애매하기도 하고.”
이사를 한다는 말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는데?”
“음, 나도 아직 정확하게 몰라. 마포구 어디야. 이번엔 멀어.”
“그럼 부모님이 정하는 거야?”
민규가 고개를 한번 가로저었다.
“아니.”
“그러면 누가 정하는데?”
“사장.”
그 의미를 오래지 않아 지연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