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17회

   한 남자가 있었다. 갈대와 띠풀이 무성하고 갯벌에 칠면조 군락이 넓게 펼쳐지는 줄포에서 나서 양친을 잃은 남동생들을 두고 집을 떠나지 못하는 아내와의 혼인생활을 위해 J읍으로 건너와 살았던 사람. 줄포는 어촌이고 J읍은 농촌이다. 그는 줄포에서 제방을 쌓다가 바닷물도 젓갈도 도미도 갈치도 소금밭도 없는 J읍으로 와서 아내의 남동생들에게 매형 역할을 하며 살다가…… 분가를 해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한 지 이년인가 후에 집에 불이 나서 그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불이야, 불이야…… 붉게 타오르는 불 속에서 아내와 아이 둘을 구해낸 뒤 그 자신은 불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타 죽었다.

 

   어떤 사실들은 때로 믿기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이라 시간이 흘러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끝내 사실일까? 싶은 의문과 회의가 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싶어서 사실이 우연이나 조작에 의한 것처럼 보이고 어떤 형식에 맞추기 위해 도식을 끌어온 것처럼 여겨지며 상상에 의한 허구가 오히려 사실처럼 느껴진다.

 

   소가 두마리 있었다면 아버지는 겨리쟁기질도 열심히 터득했을 것이다. 자갈이 섞이고 흙이 돌덩이같이 뭉쳐진 거친 산밭은 겨리쟁기질이 필요했으니까. 한동안 쟁기질은 아버지에게 돈벌이가 되어주었다. 어린 고모는 어린 아버지가 쟁기질을 해서 품삯으로 받아 온 돈을 받는 것을 멋쩍어했다. 아버지는 빨래를 널고 있거나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고모 주변에 꾸깃하게 접은 돈을 버리듯 내려놓고는 고모의 등을 툭 치면서 누나…… 땅에 돈 떨어졌네! 하고는 내뺐다. 어른이 없어 적막한 집에서 이따금 남매는 마당의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를 사이에 두고 무언가에 발동이 걸려 서로를 잡거나 내빼는 장난을 치느라 큰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간혹 어린 고모의 손에 어린 아버지 바지가 잡히기도 했다. 고모의 손힘에 고무줄이 늘어난 바지가 아래로 흘러내릴 듯하면 아버지는 마당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모도 주저앉으려고 하면 아버지는 일어서서 다시 도망을 쳤다. 다 주저앉지도 못하고 다시 일어서서 도망치는 아버지를 잡으려고 고모는 야아 야아아…… 소리를 치며 동생을 쫓았다. 잡힐 듯 잡힐 듯하다가 잡히지 않는 서로의 등을 남매가 쫓고 쫓으면 닭장 앞의 닭들이 놀라서 퍼덕이고 울타리에 앉아 있던 개가 몸을 일으켜 헛간 쪽으로 자리를 바꾸고 흙담을 타고 뻗어가던 호박넝쿨 속 애호박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돼지막에 갇혀 있는 돼지가 까만 눈으로 마당의 분란을 살피며 귀를 쫑긋 세웠다.

 

   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이 집에서 그런 날들이 여러날 있었다.

 

   전쟁이 났을 때 아버지는 열일곱이었다,라고 쓰는데 이상한 느낌이 든다. 나는 어려서부터 전쟁이 났을 때,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듣고 자랐다. 이 마을이라고 전쟁에 휩쓸리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평시에는 담담한 이웃들로 지내다가 무슨 일이 생겨 싸움이 벌어지면 그 말싸움에 전쟁 통에 생긴 일들이 자연스레 튀어나오곤 했다. 그때 벽장에 숨겨주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목숨이 살아서 은혜도 모른 채 이까짓 일로 해코지를 한다고 했고, 그때 당신이 완장을 차고 고자질해서 끌려간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도 지금껏 사과 한마디 없이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다닌다고도 했다. 아버지는 양친을 앗아간 전염병과 전쟁을 두고 ‘난리’라는 단어를 썼다. 그 ‘난리’가 났고 그 난리를 겪고도 살아남은 것이 일생 의문이라고. 난리 통을 겪은 후에는 살아가는 것이 덤처럼 느껴졌다고.

   J시의 이 마을은 중심에서 십여리는 떨어진 외곽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회사라든지 공무원이라든지 혹은 지업사나 상업 활동을 하는 읍내 사람들과는 달리 논과 밭을 비롯한 땅을 다루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농사짓는 방식이 지금과는 달라서 서로 협업을 해야만 논에 모내기를 할 수 있고 추수도 할 수 있는 상황이라 남의 집 논밭일 돌아가는 거에 대해 서로 간에 빠꼼하게 알고 지냈다. 전쟁이 났을 때도……라고 쓰는데 또 멈칫해진다. 여태 전쟁이 났을 때,라든지 전쟁이 났다……라든지 하는 말에 특별한 걸림이 없었다. 지금 내가 전쟁이 났을 때,라고 쓰려고 하니 이 동사의 활용형이 전쟁에까지 미치는 게 맞는가, 싶은 갑작스러운 회의가 든다. 전쟁을 두고, 아버지 표현 형태인, 살아남은 후의 삶이 덤으로 느껴질 만큼의 엄청난 난리를 두고 “눈물이 났을 때”라든지, “상처가 났다”든지 어느 길에 “바퀴 자국이 났다”와 같은 선상에서 표현되는 게 낯선 이 느낌은 무엇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어 쓴다. 전쟁이 났을 때,라고.

 

   전쟁이 났을 때도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을 계속했다. 논에 모를 심고, 산밭을 일구어 들깨를 심고 흙덩이를 부수고 모아서 고추 모종을 했다. 아버지는 첨에는 난리가 난 것이 실감이 안 되었어야, 했다. 하기는 열두살에 해방된 것도 실감이 안 나더라. 해방이 되었다는디 어찌서 삼팔선이 생겼으까, 싶고 그거이 생기더니 아예 북쪽으로는 가지 못한다는 얘기들이 들리더라. 그짝 사람들과는 연락도 안 되고 오도 가도 못한다고. 해방이라는디 뭔지 옴쭉달쭉 못하게 되었구나 싶더라. 친구덜이랑 어렸을 적에 모의하기를 언진가는 백두산에 호랭이 잡으러 가자고 했지야. 대성 아재, 북산 아재랑요? 응…… 여그가 호남평야의 곡창지대라고들 해도 내 논마지기가 많은 것도 아니고 논에서 나는 거 밭에서 나는 거 외에는 암것도 없는디…… 어린 마음에 북쪽에는 곰도 많다고 허니 호랑이 못 잡으면 곰을 대신 잡아서 웅담을 꺼내 팔아서 그걸 밑천으로 서울서 자리를 잡자고들…… 아버지는 헛웃음을 웃었다. 나도 웃었다. 호랑이를 못 잡으면 대신에 곰을 잡아 웅담을 팔 생각을 했던 소년들이 생각나서. 소년들은 호랑이나 곰을 보기나 했을까? 웅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요? 알기는 무신…… 아버지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북쪽은 가보지도 못했어야, 그럴 수도 없었고…… 답답하니깐 꿈이라고 꿔봤던 것이제. 어디 가면 뭐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라도 할 수 있으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어느날 첫새벽에 북에서 인민군들이 밀고 내려와서는 남쪽이 어째 보지도 못허고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겨불고…… 여그가 남쪽이고 남쪽이라 들리는 소문만 무성했고 첨에는 난리가 났는지 어쨌는지 잘 모리고 그저 삼팔선 쪽에 뭔 분쟁이 났는갑다 생각하고는 어제 하던 일을 오늘 이어 하고 있었고만…… 허기는 그때는 서울이라는 곳이 이야기 속에나 있는 곳이었응게. 원체 멀어놔서 가본 적도 없고 서울이라고 하면 넘의 나라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께…… 서로 선을 지키자고 만들었담서 그 삼팔선이 무너지고 전투기가 날마다 하늘을 날아댕겨서 대통령이 서울을 버리고 피란을 떠났다고들 하고 서울 사람들도 보따리를 싸서 피란길에 나섰다는디도 이짝으로 오는 건 아니어서…… 처음에는 실감을 못했는디,

 

   전쟁이 난 후 한달도 못 되어 남쪽 J시는 인민군에게 점령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