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1층 로비를 지나 승강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사람을 한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모든 문은 카드 한장으로 열렸다. 실내로 들어서는 순간 지연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불, 불빛, 불빛들.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차들이 쏘아내는 불빛들과, 한강다리 너머 강남의 건물들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불빛들이 뒤섞인 채 한데 모여 창 너머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지연이 이 도시에 살게 된 이래 목격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예쁘지?”
지연의 어깨를 팔로 감싸안으며 민규가 물었다.
“꼭 보여주고 싶었어.”
민규의 말에 의하면, 지연은 그가 그 ‘집들’에 데려온 최초의 손님이었다. 외부인을 들이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지만 아무도 데려오지 않는 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민규 역시 누군가를 그곳에 초대하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 없었다고 했다. 그 말은 지연에게도 일리있는 것으로 들렸다. 직장에 친구를 부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직장의 인테리어가 아무리 근사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여긴 지연이가 보면 참 좋아할 것 같아서.”
민규가 말의 뒤끝을 흐렸다.
“딱 한번만이니까, 괜찮겠지.”
괜찮은지 아닌지 대답하는 건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연은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벅찬 풍경 앞에 서면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랐다. 민규가 집 안을 구경시켜주었다. 실내는 아주 넓지는 않았다. 거실에 놓인 물건은 삼인용 가죽 소파와 벽걸이텔레비전이 전부였고, 주방에는 빌트인 가전과 아일랜드 식탁 외에 가구라곤 높은 스툴 두개뿐이었다. 방은 두개였다. 큰방에는 더블베드가 있었다. 침대에는 마치 호텔처럼 정갈한 흰색 침구가 덮여 있었다. 누가 자고 난 자취라곤 없이 깔끔히 정돈된 상태였다. 민규가 리모컨을 누르자 창문에 설치된 롤 스크린블라인드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감춰져있던 통유리창이 드러났다. 역시, 아까 본 것과 같은 불빛들이 거기 숨겨져 있었다. 민규는 다시 리모컨을 작동시켜 블라인드를 내렸다.
작은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도, 침대도, 책상도, 스탠드도 없었다. 말 그대로 텅 빈 방이었다. 화장실도 물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수건걸이에 세면 타월이 한 장 걸려 있기는 했지만 치약이나 칫솔 등속은 보이지 않았다.
“모델하우스 같아.”
지연이 중얼거렸다. 실제로 지연은 그때까지 아파트를 분양하기 위해 건설사에서 만들어놓은 모델하우스 같은 곳에 들어가본 경험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델하우스라는 이미지를 현실에서 구현한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집은,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기이한 공간이었다. 다시 거실에 나왔을 때 지연은 민규에게 물었다.
“그럼 어디서 자?”
“나?”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규가 작은방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던데?”
“벽장에 있어, 침낭이.”
“침낭에서 잔다고?”
“응.”
“불편하지 않아?”
“아냐. 편해. 옮겨 갈 때도.”
둘둘 말린 채 벽장 속에 들어 있는 민규의 침낭에 대해 지연은 상상해보았다. 무슨 색일까. 까만색? 남색? 쥐색? 자주 세탁할 수 없으니 어두운 빛깔일 것은 분명했다. 그 곁엔 옷가지가 들어 있는 배낭이 있을 것이고, 치약과 칫솔을 담은 양치컵이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살았어?”
“서울 오고 얼마 안 돼서.”
그가 처음 찾은 알바는 강남의 한 한우식당의 발레파킹이었는데 주차하는 직원만 열명이 넘는 엄청나게 큰 식당이었다.
“거기서 우연히 군대 선임을 만났어. 비엠더블유 740을 타더라고.”
군대에서는 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선임은 민규를 무척 반가워하면서 연락처를 받아갔다고 했다.
“다음날 바로 연락이 왔더라고. 이런 일 한번 안 해보겠느냐고.”
운이 좋았지, 라고 민규는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