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아버지는 전쟁 때 이야기가 나오면 ‘제6사단 사람들’이라고 표현을 한다. 인민군이라고도 하지 않고 제6사단 사람들이라고. 7월에 제6사단 사람들이 J시로 밀고 들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이 돌변하기 시작했다고. 6사단 사람들은 J시를 짓밟고 광주를 뚫는 게 목표여서 그 길목인 장성으로 갔다고. 아버지가 정확히 6사단 사람들이라고 하는 게 이상해서 6사단인지 어떻게 알아요? 물었더니 잊을 수 있간? 그 사람들한테 죽은 사람들이 얼맨데? 했다. 작은아버지 한분이 경찰 아니었냐…… 전주 할아버지요? 아니 그 위로 또 한분 있었다. 또 한분 있었다는 아버지의 작은아버지. 순창 지서에 계셨는디 집에 우리덜만 있으니 살피러 잠깐 들렀는디 작은아버지가 여기에 있다는 걸 누가 꼬질렀는지 6사단 사람들 몇이…… 그들이 마당으로 들어오는 것과,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으나 나의 작은할아버지였던 그가 뒷문으로 나가 장꽝을 건너 쭝나무를 타고 나무 위로 숨는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 그래서요? 머뭇거리는 아버지에게 나는 그래서요?라고 또 묻는다. 쭝나무 위에 숨어 있는 걸 어찌 알고는 나무 위에 대고 총을 타타타 타타 쏴서는 작은아버지가 뒤 깨밭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장꽝 사이에 숨어서 들었네…… 경찰 가족이라고 그렇게 작은아버지들이 다들…… 그날을 생각하믄 이렇게 숨 쉬고 있는 것이 이상허다, 이래 살어 있다는 게 도무지 실감이 안 난당게. 한밤중에 용산 작은아버지와 나랑 또 동네 몇사람을 모 심어놓은 논을 향해 세우더니 열을 세면 논 속으로 뛰어가라고 해서 논 속으로 뛰어들었더니 뒤에서 총을 쏴서는…… 총소리를 들음서 논 흙탕 속에 처박혔는디 눈을 떠보니 새벽인디 모두 다 죽고 나만 살어서 논 속에서 기어나와 몸에 다닥다닥 들러붙은 거머리들을 떼내던 기억이…… 난리통에 여러 작은아버지들이 다 그르케 죽어버리고 살아남은 작은아버지는 전주 작은아버지뿐이라…… 나중에는 총 쏘는 것도 아까웠던가벼. 또랑가의 팽나무에 쭉 둘러앉게 해놓고는 죽창으로…… 그것으로 죽을 때까지 찔렀다. 나중에는 저들은 가만있고 서로 찌르게 해서는…… 온 마을이 비명소리에 피 냄새에 눈알이 터지고 배가 터지고 창시가 터지고……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살아남을 사람은 살아남드라,고 했다. 제삿날이면 큰 솥에 펼쳐놓고 찐 홍어를 맛나게 찢어서 아버지 접시 위에 올려주던 숙근이 고모할머니 목에 기다랗게 나 있는 흉터가 그때 죽창에 찔린 자국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막걸리라도 한잔 마시게 되면 가녀린 목덜미 위로 붉게 솟아오른 것처럼 보이던 흉터 자국.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 아버지는 입대하라는 소집령을 받았다. 우리가 전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의 입대를 결사적으로 막았다. 아버지에게 막내 작은아버지였던 전주 할아버지는 형사였다. 그는 아버지가 불려오면 무슨 수를 썼는지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소년병은 ‘매년 9월 1일부터 익년 8월 31일 출생으로 만 20세에 달한 남자’인데 아버지는 만으로 17세 전이니 징집을 피해도 기피자가 아니며 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이니 어쩌든 살아남아 집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의 나직한 말을 나는 적는다. 언젠가는 가뭇없이 사라져갈 목소리에 담긴 말을 노트에 가만히 적는다. 집에 지킬 것이 뭣이 남어 있었간디…… 전주 할아버지의 말을 곱씹을 적마다 아버지는 허탈하게 웃었다. 지킬 것이라곤 소 한마리뿐이었는디……
소년 아버지가 다시 소집령을 받고 또 경찰서에 소환되어 오자 전주 작은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이슬어지에 있는 사당에 다녀오라고 했다. 거기에 가면 큰봉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이슬어지는 선산이 있는 곳이고 거기 사당에는 큰봉이 살았다. 큰봉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을 할 줄 모르는 두상이 큰 사람으로 내 기억에도 남아 있다. 이름도 없이 떠도는 이를 누군가 머리가 크다고 큰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왜 큰봉이야?라고 반문하는 게 부질없을 정도로 그의 머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컸다. 특히 얼굴이 작은 아버지 옆에 있으면 더 커 보이곤 했다. 떠돌이로 거처가 없던 큰봉은 언제부턴가 문중 선산 아래 제 지내는 사당에서 닭을 기르며 함께 살았다. 가끔은 흑염소가 한두마리 있을 때도 있었다. 큰봉이 하는 일의 가장 큰 몫은 봄에 시제를 지낼 때나 추석 때 선산 묘지를 벌초하는 일이었다. 전주 작은할아버지가 이른 대로 소년 아버지가 큰봉에게 갔을 때 큰봉은 묵묵히 아버지를 사당의 헛간으로 데리고 가더니 안에서 문을 잠갔다. 큰봉은 수건을 둘둘 말아서 소년의 눈을 가렸다. 소년의 오른손을 쥐게 하더니 검지만을 펼쳐서 어딘가에 올려놓았다. 손가락 마디에 와 닿는 차가운 촉감에 몸을 움츠린 것도 잠시, 무엇인가 싸한 것이 중지 가운데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가 뭘 하려고? 물어도 큰봉은 대답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큰봉은 아무것도 모른 채 긴장하고 있는 아버지 오른손 검지를 작두 사이에 끼워 넣고는 빠른 속도로 작두날을 내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놀라서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눈을 가린 수건을 벗겨냈을 때 큰봉은 잘린 손가락을 짓밟아 으스러뜨리고 있었다고. 그때는 큰봉이 자신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몰랐던 아버지는 큰봉이 무서워 입조차 뗄 수가 없었다고. 잘린 후에 으깨지기까지 한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눈을 가렸던 수건에 감싸서 사당을 도망쳐 나올 때 잘린 자리에서는 피조차 나지 않았다고. 한의원이었던 할아버지 곁에서 약초를 다루는 법을 익혔던 고모가 피범벅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의 손에 약초 이긴 것을 두껍게 붙였다. 그때야 공포에 질린 마음을 풀고 눈물을 쏟는 소년 아버지의 등을 고모는 쓰다듬었다. 이제 방아쇠를 당길 수 없게 되었으니 징집되지 않을 거라면서. 큰봉은 잘린 손가락을 아예 봉합시킬 수 없게 하려고 짓밟기까지 한 것이었다. 손가락은 잊어버리고 살자,며 고모는 동생의 잘린 검지손가락을 우물 옆에 묻었다.
이 얘기를 나는 언제 알았을까? 누가 얘기해준 것일까?
아버지의 오른쪽 뭉툭한 검지손가락을 보면 기묘한 슬픔이 밀려오곤 했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된 후 한때 나는 마음속으로 전주 할아버지를 미워했다. 겨울 제삿날이 되어 할아버지가 귤 박스를 사들고 제사를 지내러 전주에서 올 때 모두들 인사를 하는데 나 혼자 저 뒤에 서서 할아버지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 마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주홍색 귤을 할아버지가 나눠줄 때에도 받지 않았다. 겨우 귤을 받지 않는 것,이 어린 내게는 전주 할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저항이었다. 그것도 고모가 버릇없다고 눈을 흘기면 두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던 귤. 공손히 받아서는 눈밭에 던져버렸다. 겨울날 흰 눈 속에 나동그라지던 주황색 귤. 아버지의 뭉툭한 손가락을 보면 밀려들던 기묘한 슬픔. 기묘한,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치유되지 않을 것 같은 슬픔. 그럴 때면 내 손을 뻗어서 아버지 손가락들과 깍지를 끼곤 했다. 아버지 손은 크고 내 손은 작아서 균형이 맞지 않는 깍지를 끼고 아버지! 부르며 괜히 허공을 향해 깍지 낀 아버지 손과 내 손을 뻗어 흔들어보곤 했다. 한번은 아버지에게 손가락이 이래서 불편하지 않아요? 물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손톱도 없이 뭉툭한 자신의 손가락을 잠깐 바라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했다. 아무렇지도 않다, 이런 것은……이라고. 눈을 가리고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른 채 손가락을 잃은 후부터 그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될 때까지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을지.
아버지에 대해, 아버지가 겪은 전쟁에 대해 들을수록 수수께끼로 남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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