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19회

   아버지는 지금도 누가 장성에서 왔다고 하거나 그곳에서 살았다,고 하면 그를 깊게 응시한다. 그러고는 곧 그에게 혹시 난리가 지난 뒤에 ‘박 무릉’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박 무릉. 그는 누구일까.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이름이다. 장성 사람이라 여겨지면 난리 후에 ‘박 무릉’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아버지의 얼굴에 머물던 스산함. 장성의 ‘박 무릉’은 대체 누구기에 아버지가 그런 스산한 표정을 짓게 하는지. 그가 누구인지 아버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표정에서 ‘박 무릉’이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만 짐작할 뿐.

 

   장성은 J시가 속한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가르는 접경지역이다. 내가 J읍의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J읍의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 행선지 중에 마을 신작로를 통과해 가는 장성행 버스가 있었다. 지금도 그 버스는 배차되어 있을까? 입암, 천안, 장성이라는 팻말을 달고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버스는 마을을 지나갔다. 그중 입암과 천안까지는 전라북도이나 장성은 전라남도 장성군에 속해 있다. 노령산맥 줄기이다. 마을의 철길이나 산밭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멀리 가까이 그리고 좌우 어디로나 육중한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곧 닿을 것만 같은 봉우리 중의 하나가 장성의 갈재였다. 아버지는 갈재를 두고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 가보려고 하면 걸어도 걸어도 닿지 않아 애를 먹인다고. 게다가 갈재는 경사가 가팔라서 찾는 사람이 드물고 산길인가 싶어 따라가다보면 군데군데 웃자란 잡초들이 우거져 그 풀숲을 헤쳐나가는 일만도 험난하다고. 늪이 있어 발이 한번 빠지면 그대로 끌려들어가 다른 손의 도움 없이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간신히 빠져나오면 길을 잃기 알맞게 여기인지 저기인지 분간이 안 가고 독사라도 만나면 목숨을 부지 못한다고. 아버지는 갈재에 대해 환했다. 갈재에 다녀와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그 풀숲을 이루고 있는 갈대와 느닷없이 그 사이에서 푸드덕 창공으로 튀어오르는 산꿩에 대해서까지 세목세목 기억했다. 갈재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아느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내가 거기를 어찌 잊겄냐, 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다시 서울을 수복할 때까지는 석달이 걸렸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해서 압록강에 이르렀지만 남쪽 J시는 전쟁 초기보다 더 깊은 난리 통이 되었다. 마을에 국군과 인민군이 낮과 밤을 달리해 주둔했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아버지는 J시에서도 우리 집이 있는 마을이 장성 갈재와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처음 장성 갈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곳은 또 어디일까? 싶어 책자들을 찾아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노령이라고 불렸던 장성 갈재의 정상엔 갈대가 많다고 쓰여 있었다. 산에 갈대가 많았다고? 억새겠지, 생각했다. 노령은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의 산맥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름이라고.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갈대가 많아서 갈재로 불렸는데 사실은 갈대가 아니라 억새였다는 설명이 뒤따라 나왔다. 갈대가 아니라 억새였다는 사실이 갈재가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갈대와 억새를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갈대는 바닷가나 하천에서 자란다고 배워서 그리 알고 있을 뿐. 다만 갈대가 아니라 억새라는 게 알려졌다면 갈재가 아니라 억새재로 불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갈대는 바닷가나 하천에 살고 억새는 산에서 자란다고 배웠어도 나는 지금도 산에 피어 있는 억새를 보고 갈대라고 부를 때가 많다. 그러니 하천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억새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갈재도 그곳에 핀 게 갈대인지 억새인지 혼용되어 있다가 어느날 갈재가 되었을 것이다. 어딘가에 “갈재는 전남 장성군 북이면 목란마을과 J시의 입암면 군령마을 사이에 있던 길”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조선시대부터 과거를 보러 갈 때 전라도와 한양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갈재였다고 했다. 한양에 가려면 갈재를 넘을 수밖에 없었다고. 갈재를 넘어와 저 다리를 건너야 한양에 갈 수 있었다는 ‘과교(科橋)’ 다리가 지금도 마을에 있다. 다리만 건너면 마을이라 언제나 반가웠던 다리. 비만 내리면 다리 밑으로 물이 콸콸콸 소리를 내며 거세게 흘러서 학교를 가다가 그 다리 위에 서서 물 구경을 하곤 했다. 여름비가 그치고 거친 물이 빠져나가고 나면 양편으로 풀숲을 거느리고 맑은 물이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걸 바라보았던 과교 다리. 부산을 사수하기 위한 최후의 저지선이었던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자 낙동강 구석으로 몰린 인민군은 지리산과 덕유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쳤다. 우리 집이 있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갈재에도 인민군과 빨치산이 숨어들었다. 그들이 갈재로 들어가면서 국군이나 경찰 가족들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갈재에 숨어든 인민군들은 밤이 되면 마을로 내려왔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산생활을 하는 동안 먹을 양식이었다. 집집마다 숨겨둔 곡식이 털렸고, 닭이 모가지를 비틀린 채 잡혀가고, 다음해 씨앗용으로 쓰려고 문간에 걸어둔 옥수수도 걷어갔다.

 

   아버지는 소를 지키기로 했다. 낮에 쟁기를 달고 밭을 갈던 소를 해가 뉘엿해지면 앞세우고 과교다리를 건너 당고개를 넘어 대흥리 다리 끝에 있는 지서로 갔다. 지서 옆에 소를 누이고 소의 배를 벤 채 밤을 지새우고 동이 트면 다시 소를 앞세우고 마을로 돌아와 소에게 달구지를 달고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난리도 그런 난리는 없었응게……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들어오게 되자 어제까지도 같은 마을 사람들이었던 사람들이 편이 갈라졌다. 낮에는 국군이 저쪽 사람들과 내통하는 자가 없는지 살피고 밤에는 인민군이 저쪽 사람들 편이라고 생각되는 자들을 색출해내서 처형했다. 뭔 판단을 험서 살아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아, 아버지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고통스러운지 어깨를 움츠리고 등을 구부렸다. 아버지는 사람이 무서웠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누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고.

 

   갈재에 숨어든 인민군은 밤이 되면 마을로 내려와 힘 좀 쓸 것같이 보이는 사람이면 강제로 끌고 갔다. 큰봉에게 손가락이 잘려 병역을 피한 아버지는 이번엔 인민군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다시 떠돌아야 했다. 소를 데리고 저물녘이면 집을 떠나 숨을 곳을 찾아다니는 모습은 눈에 쉽게 띄었다. 어느날은 지서 앞에 소만 간신히 매놓고 집일 좀 보려고 돌아왔는데 그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너그 고모가 나를 건넌방의 소금가마니 속에 들어가게 하고 급히 그 위에 허드레 것을 쌓아놓았는디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죽창이 가마니 속으로 쑥 들어오더랑게.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면 어디든 찔러보는 죽창이 아버지 귀 옆을 스치고 갔다. 기어코 소랑 함께 잡혀서 끌려간 적도 있었다. 빨치산이 돼가지고 완장을 차고 댕기던 쌍군이 사람이, 끌려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를 지목하더니 풀어주라고 허더라. 양친 잃고 혼자 남어서 살아볼라고 애쓰는 불쌍헌 아그인게 소도 돌려주라고. 아버지는 그 사람 덕에 소랑 풀려나서 여태 살어 있는 것이다, 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이가 돈 한푼 없이 아픈 어머니를 들쳐업고 왔을 때 아버지가 사람이 금방 숨넘어가게 생겨서 침 놔주고 약 지어준 사람이라고 하더라. 쌍군이는 마을의 도랑물이 시작되는 위쪽 마을 이름이다. 아버지는 살아남아 난리가 지난 뒤에 쌍군이로 그를 찾아갔으나 갈재로 들어간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