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2회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와 헤어지게 될 때 가끔 그때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멈춰 서는 버스를 보며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르던 다급한 내 목소리. 헤어지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 관계에 봉착할 때면 그때 그 신작로에서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던 절박한 내 목소리가 북소리가 되어 둥둥둥 머릿속에 울린다. 내가 떠난 후에 그 자리엔 무엇이 남을지를 생각할 때도 그때 내가 아버지 나 가요, 소리치며 버스에 올라탄 후 차창 밖에 홀로 남겨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타야 할 버스는 멈춰 서 있고 인사를 해야 할 아버지는 안에 있어서 혹여라도 버스가 출발해버릴까봐 나는 어두운 가게 안쪽에 대고 아버지, 나 가요…… 소리치고는 뛰어서 버스를 타버렸다. 버스에 오른 후에 고개를 빼고 아버지 가게 쪽을 쳐다보았다. 버스 창을 열려고 해봤으나 열리지 않았다. 나는 창에 손바닥을 대고 어둠 속에 서 있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가게에서 막 뛰쳐나와 한쪽 발엔 슬리퍼를 한쪽 발엔 고무신을 끼어 신고 손을 흔들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나를 태운 버스를 쳐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방금 붙잡았다가 세차게 놓아서 그때까지도 흔들리고 있는 검은 고무줄 옆 어둠속에 서 있던 아버지의 실루엣. 가게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아버지의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표정에 그늘과 얼룩을 만들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작별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버스는 출발해버렸다. 가끔 그때 생각도 한다. 버스가 출발한 후 아버지는 그 자리에 얼마나 더 서 있었을지를. 나를 태운 버스가 사라진 후의 어두운 신작로를 아버지는 무슨 마음으로 내다보았을지를. 아버지가 얼마 후에나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을지를. 도시생활을 하는 내내, 나와 그렇게 헤어지고 아버지가 그 허름한 가게에서 울었을 생각을 하면 괜히 손이 이마로 향하고 마음이 고요해지며 웬만한 일에는 기다림과 인내심이 발동하곤 했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 막걸리를 마시던 가게 안에 놓여 있던 오래된 기다란 의자, 독 안의 막걸리를 퍼 담던 손잡이가 달린 나무됫박, 여름이면 시원해지라고 고무통에 찬물을 받아 넣어두었던 맥주병…… 그리고 그 가게의 어두운 방 안 윗목에 아무렇게나 그러나 항상 놓여 있던 아버지의 북과 북채, 그리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던 거의 검은빛에 가까운 작은 나무궤짝.

 

   나무궤짝 안에는 아버지가 가게를 운영해서 번 얼마간의 돈이 들어 있었다. 세종대왕이 그려진 백원짜리 지폐는 반듯하게 착착 펴진 채 몇장이 겹쳐져 있어 세종대왕의 얼굴도 펴져 있었다. 오백원짜리 지폐가 한두장 들어 있을 때도 있었고 어쩌다 천원짜리 지폐. 그리고 그 옆의 동전들. 이순신 장군이나 거북선, 퇴계 이황 같은 얼굴을 나는 그 궤짝 안에 들어 있던 지폐에서 처음 만났다. 아이에게도 꼭 쓸 돈은 필요해서 학교 가기 전에 돈을 타러 아버지에게 가면 아버지는 가게 바닥 물청소를 하고 있다가 얼마가 필요한지 물었다. 그 얼마를 말하는데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붉어짐과 두근거림과는 아랑곳없이 아버지가 내 손에 동전을 쥐여주었다. 아버지는 내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거나 돈을 아껴 쓰라거나 하는 아버지들이 할 법한 잔소리에 해당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물청소를 하던 중이었으면 수건에 손을 닦고 그 나무궤짝을 열어 내가 말한 만큼의 돈을 꺼내주면서 물끄러미 내 눈을 바라보고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었을 뿐이다. 그 나무궤짝은 처음 가게를 맡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직접 만든 것이다. 책 다섯권쯤 넣어놓을 수 있는 크기의 작은 궤짝을 만들던 때의 아버지의 나이가 겨우 서른몇이었으니 지금의 내가 지나와도 한참 지나온 나이다. 아버지는 열고 닫을 수 있게 알맞은 경첩을 달고 열쇠를 채울 수 있는 자물통까지 그 궤짝에 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걸터앉을 수도 있었던 높이의 나무궤짝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풍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야무지게 매달린 자물통을 보면 그걸 아버지가 직접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기도 했다.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뒤에 그 나무궤짝은 한동안 집의 마루에서 굴러다녔다. 오빠 중의 한 사람이 거기에 죽은 새를 넣어놓을 때가 있어 기겁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아버지가 가게를 하지 않을 때 마루에서 굴러다니던 그 나무궤짝은 시시때때로 내 형제들에게 급히 무언가를 넣어둘 게 필요할 때 사용되었던 듯도 하다. 그것도 잠시였고 나무궤짝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 누군가 여기에 두면 다른 사람이 저기에 두고 또 다른 사람이 저기에 두고 하다가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할 때쯤에 내 것이 되었다. 나는 그 나무궤짝에 다른 사람들이 건들지 못하게 새 크레파스 상자를 넣어두거나 일찍 떨어진 감이 홍시가 될 때까지 보관하거나 학교에서 빌려온 책을 읽다가 페이지를 접어 넣어두었다. 일기장을 넣고 야무지게 열쇠까지 채우기도 했다. 아버지가 다시 그 가게를 맡게 되자 잠시 나의 것이 되었던 나무궤짝은 그 가게로 돌아가 아버지의 돈 궤짝이 되었다. 아버지가 그 마을 끝 가게를 두번 운영했을 때가 우리 집이 가장 돈이 필요했었을 때라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여섯이나 되는 우리 형제들이 거침없이 먹고 고등학교 중학교에 차례로 입학하던 때. 아버지가 가게를 다시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난 후 그 궤짝도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까? 그때는 이미 내가 집을 떠난 후였다. 아버지가 두번째로 그 가게를 정리한 후로 그 궤짝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 뒤에 가게를 맡은 사람에게도 셈을 마친 돈을 넣어둘 데가 필요했을 테니 그곳에 남겨두고 왔을 수도. 어떤 물건들은 그렇게 사라진다. 버리지도 없애지도 누구에게 준 적도 부숴버린 적이 없어도 어느 시간 속에서 놓치고 나면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고 희미해진다. 그래었지, 그래었는데,라는 여운을 남겨놓고.

 

   아버지는 J시의 그 집에서 1933년 초여름에 태어났다. 처음부터 장남은 아니었다. 위로 형이 셋, 누나가 둘이 있었으니 여섯째였으나 전염병이 돌던 해에 형 셋을 잃고 장남이 되었다. 그것도 종가의 장남. 명의였다는 말은 못 들었으나 마을에서 한의원이었던 조부는 한꺼번에 아들 셋을 잃고 두려움에 차서 아버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어린 아버지를 슬하에 두고 소학을 가르치고 명심보감을 외우게 했다. 아버지는 그때 조부에게서 배운 것들을 지금도 또렷이 외운다. 잠잘 때 기울어 자지 아니하며 앉을 때 가에 치우쳐 앉지 아니하며 설 때 외발로 치우쳐 서지 아니하며…… 귀로는 남의 나쁜 것을 듣지 않고, 눈으로는 남의 단점을 보지 않고 썩은 나무는 조각하지 못하고 썩은 흙으로 만든 담은 흙손질하지 못하니……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남을 천하게 여기지 말며…… 바른 자리가 아니면 앉지 아니하며 눈으로 사특한 색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을 가르치되 물 뿌리고 쓸고 응하고 대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차와 어버이를 사랑하고 스승을 높이며 벗을 친히 하는…… 한번 읊기 시작하면 풀어지는 실타래처럼 끝도 없어서 내가 어떻게 아직도 이걸 다 읊어요 아버지? 했더니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것잉게, 하다가 읊는 것을 멈추고 학교에나 보내주실 일이제, 조부에 대한 원망을 내보였다. 조부가 전염병의 공포에 지지 않고 아버지를 학교에 보내주었으면 아버지는 다른 삶을 살았을까? 언젠가 집을 떠날 수도 있었을까? 나는 낙심하는 아버지를 위로한다고 그때 학교에 갔으면 아버지는 이름을 바꿔야 했을지도 몰라요, 일본 이름으로 말이에요, 했다. 아버지는 학교에 가지 않고 논에 갔다. 쟁기로 밭을 갈고 문중 논에 모를 심었다. 아버지가 열네살 때 다시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다. 전염병에 내놓지 않으려고 아버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조부가 전염병에 걸렸다. 큰집에만 가지 않았으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조부를 생각할 때면 늘 하는 말이다. 조부의 큰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렸고 한약을 다려 큰집엘 다녀온 뒤 조부도 병에 걸렸다. 조부를 살피던 조모도 감염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 여름에 이틀 간격으로 부모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