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20회

3장 처음과 다음

 

소영은 함께 서울에 왔던 고등학교 선배 현기와 두달 만에 헤어졌다. 현기는 인근에서 가장 큰 갈빗집과 모텔을 소유한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는데 공부는 지지리 못했으나 허우대가 멀쩡하고 순수했다. 소영을 여자친구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여러명의 연적을 물리쳤다고 자부했다. 그중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내심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했던 존재는 제희였다. 제희는 중학교 때부터 지역에서 유명한 일진이면서 폭력조직의 조직원으로 스카우트되었다는 소문이 있던 인물로, 현기의 동급생이었다. 그러나 제희가 복잡하게 얽힌 조직폭력배 간의 다툼에 연루되어 소년교도소에 들어가게 된 것이 현기에게는 행운이었다.

제희가 연루된 폭력사건의 숨겨진 이유가 실은 소영이며, 조직이 소영의 안위를 위협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희가 자수를 했고, 심지어 소영의 몸속에 제희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등의 출처가 불분명한 소문들만이 고등학교 교정에 자욱하게 퍼졌다. 제희가 사라진 것과 비슷한 시기에 소영 역시 학교에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 말들은 더욱 증폭되었다. 현기가 그 이야기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역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설령 알았다 해도 소영을 깊이 사랑하는 그의 마음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현기의 아버지는 실향민 출신이었는데, 공공금융기관과 세무당국에 뿌리 깊은 불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사업장에서 거둬들이는 현금의 절반가량을 집 안에 보관하는 습관은 그 불신에 기인했다. 디데이 아침, 현기는 보통 때처럼 학교에 등교했다. 그리고 온 가족이 외출하고 없는 점심시간에 조용히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의 집 뒤뜰에는 자그마한 텃밭이 있었다. 현기의 아버지는 고전적인 보관 방법을 선호했다. 땅속에는 플라스틱 재질의 대형 김치통 몇개가 묻혀 있었다. 현기는 신발장 한쪽에 늘 보관되어 있는 삽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어렵지 않게 파내었다. 김장비닐 안에 차곡차곡 쌓인 현금다발들을 꺼내 등산용 배낭 안에 꾹꾹 채웠다. 물론 그 배낭마저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때 소영은 시외버스터미널 앞의 커피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숍 안에는 손님이 많았지만, 갈색의 긴 생머리를 어깨에 닿도록 풀고 은은한 핑크색의 립스틱을 바른 소영을, 학교에 가지 않은 고등학생으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수업시간에 맞추어 서울로 강의를 들으러 가는 여대생으로 보였다. 짐이라곤 옆자리에 올려놓은 초록색 이스트팩이 전부였다.

현기가 등산용 배낭을 짊어지고 커피숍 안에 들어서자 그를 발견한 소영이 번쩍 손을 쳐들었다. 소영이 환히 웃었다. 훗날, 현기는 거듭하여 그 순간을 떠올리고는 했다. 첫번째 결혼식에서 신랑의 자격으로 먼저 입장하여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 들어올 신부를 기다리던 순간, 그가 떠올린 것은 잠시 후 법적인 아내가 될 여자의 얼굴이 아니라 소영의 그 해맑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결혼생활은 오래지 않아 실패했다. 합의이혼을 위해 가정법원에서의 마지막 절차를 치르던 날, 늦게 오는 아내를 기다리며 현기가 무심결에 떠올린 것도 역시 열일곱살 소영의 웃는 얼굴이었다.

“우리, 어떻게 가지?”

소영이 현기에게 물었다. 평생 현기는 눈치가 빠르거나 센스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때 그녀의 물음 안에 무척 여러가지의 감정들이 뒤섞여 요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어쩌면 의도적으로 목적지를 생략했다는 것, 그리고 그 생략된 목적지가 ‘서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현기는 소영의 손을 부여잡고 일어섰다. 버스터미널로 들어가는 대신, 터미널 건물 앞에 늘어선 택시 중 맨 앞에 선 차에 올라탔다.

“서울로 가주세요.”

그의 음성은 제법 비장했다. 그것이 그때 현기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호기로운 행동이었다. 그녀를 위해 증명할 수 있는 사랑의 최대치였다. 택시 기사는 룸미러로 뒷자리의 어린 연인들을 흘끗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