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20회

형민의 아버지는 일곱살 때 큰형을 따라 서커스를 구경 간 적이 있다. 중학교에 다니던 그의 큰형은 한달 후에 서커스가 온다는 소문을 들은 뒤로 읍내 쌀가게 사장에게 부탁하여 배달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돈을 모아 동생들을 데리고 서커스 구경을 갔다. 누나는 곰이 통을 굴리는 것을 보면서 박수를 쳤고, 남동생은 공중그네를 보면서 무섭다고 울었다. 그는 서커스 입구에서 팔던 정체불명의 음료수를 사 마신 뒤 오랫동안 배앓이를 했다. 보리차에 설탕을 탄 듯한 맛이었다. 일주일 내내 설사를 했고, 그래서 허리띠를 한칸 줄여야 할 정도로 살이 빠졌다. 설사가 멈출 때까지 그는 흰죽에 간장만 먹었다. 앓는 동안 그는 좁은 상자 안에 몸을 집어넣는 악몽을 반복해서 꾸었다. 그건 서커스를 구경할 적에 그가 가장 신기해하던 쇼였다. 꿈속에서 상자 안에 몸을 집어넣는 일은 매번 실패했다. 언제나 오른쪽 다리가 남았다. 상자 안에 몸을 집어넣은 다음에는 다시 나오지 못했다. 그때마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이불과 베개가 축축했다. 설사는 멈추었지만 그후로도 배앓이는 계속되었다. 늘 배꼽 주위가 싸르르 아파왔고 식욕이 돌지 않았다. 형민의 할머니는 저녁마다 아궁이에 차돌을 데워 아들의 배꼽에 올려놓았다. 배꼽에 따뜻한 돌을 올려놓으면 잠시나마 배가 아픈 게 가라앉았다. 양귀비를 몰래 구해다 먹이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어디 가서 이거 먹었다고 말하면 안 돼, 큰일 나. 그 말 때문인지 양귀비를 먹으면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배가 더 아파왔다. 그의 국민학교 동창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늘 얼굴을 찡그리고 구부정하게 몸을 구부리며 걷던 아이. 그는 체육시간이면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을 구경하곤 했다. 운동회를 하면 달리기에서 꼴찌를 했다. 달리기를 잘하던 누나는 일등 상품으로 공책을 받아왔다. 그리고 꼴찌를 해서 상심한 동생에게 공책을 주었다. 그는 그 공책에는 아름다운 말만 적고 싶었다. 하지만 한글을 겨우 쓸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에 국어교과서에 있는 글자들을 노트에 베끼기 시작했다. 글을 베끼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을 때마다 필사를 하는 버릇이 생겼고, 훗날 아들이 태어나길 기다리던 산부인과에서 병원 복도에 붙어 있던 안내 문구를 수첩에 베껴 쓰고 또 베껴 썼다. 병원 이름은 서민병원이어서 수첩에 서민이라는 단어도 여러번 썼다. 그러다 문득 태어날 아이의 이름이 떠올랐다. 형민. 빛날 형에 백성 민.

국민학교 6학년 때 전학 온 아이가 생일이라며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면사무소장의 아들이었는데, 갓난아이였을 때 부뚜막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 아이의 부모님은 아들이 친구들에게 놀림 받을까봐 생일이면 친구들을 불러 근사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날 그는 밥을 두공기나 먹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어본 불고기 때문이었는지, 보리가 들어가지 않은 흰 쌀밥 때문이었는지, 음식들이 씹을수록 달았다. 침이 저절로 나왔다. 같이 간 아이들이 불고기를 다 먹은 다음, 그는 남은 국물이 아까워 거기에 밥을 비벼 먹었다. 그후로 기적처럼 배앓이가 사라졌다. 뒤늦게 키가 크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달리기는 꼴찌였다. 군대 시절, 혹한기 훈련을 할 적이면 그는 자기 전 텐트에 누워 불고기 국물에 밥을 자작하게 말아서 배추김치를 얹어 먹는 상상을 하곤 했다. 나중에 결혼해서 아들이 생기면, 그래서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꼭 불고기를 안주로 사주리라고 결심하기도 했다. 그는 텐트에 누워 입김을 불어보았다. 하얀 김이 담배연기처럼 보였다. 옆에 누운 김이병이 그러지 마, 그러지 마, 하고 잠꼬대를 했다. 훈련이 조금 고된 날이면 김이병은 늘 악몽을 꾸었다. 그는 김이병의 잠꼬대를 들으면서 어떤 꿈이기에 저리 간절히 애원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김이병과 같이 야간보초를 서던 날, 그는 작은 상자에 몸을 집어넣는 서커스 단원이 되는 꿈을 십오년째 꾸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십오년째 실패를 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오른쪽 다리가 들어가지 않거든. 그 말을 듣던 김이병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박상병님, 저거 보십시오.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반딧불이가 보였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었다. 별들이 거기에 있었다. 움직이는 별이네. 그가 말했다. 그리고 한동안 둘은 아무 말 없이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것을 구경했다. 빛날 빈. 빛날 형. 빛날 휘. 빛날 희. 빛날 창. 김이병이 빠른 속도로 단어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저는 꼭 이런 한자들로 지을 겁니다. 그 말을 듣던 그가 대답했다. 나도 그래야겠다. 빛날 형. 난 그게 마음에 드네.

군대에서 제대한 뒤 그는 철물점을 운영하던 큰형 가게에서 일을 돕기 시작했다. 쌀가게에서 배달 일을 할 적부터 큰형은 장사를 해야만 돈을 벌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무작정 상경한 후 이런 저런 가게에서 일을 하다 철물점을 인수했다. 제대를 한 그에게 큰형은 이렇게 말했다. 겨울이 사라지지 않는 한 보일러 장사는 망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는 보일러 수리를 배워라. 철물점 옆에서 미용실을 하던 미용사가 그의 머리를 자르다 여자 친구 있으세요? 하고 물었다. 그가 없다고 하자, 재미있는 아가씨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그 말이 좋았다. 참한 아가씨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재미있는 아가씨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처음 만나기로 한 날 그는 약속에 늦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약속 장소인 다방까지 그는 뛰었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늦어서, 헉헉, 미안해요. 헉헉. 그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그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후로 일년 이개월 동안 데이트를 할 때마다 그는 늘 늦었다. 그리고 늘 뛰었다. 그녀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뛰었다. 그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던 그녀는 항상 약속시간보다 일찍 장소에 도착해 있었고, 그는 부러 십분씩 늦게 도착하곤 했다.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등을 토닥여주는 게 좋아서, 빳빳하게 다린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주는 게 좋아서, 그는 뛰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형민은 아버지가 뛰었던 것처럼 뛰었다. 그대로 계속 뛰다보니 연애를 할 적에 아내와 자전거를 탔던 공원이 나왔다. 형민은 저 멀리 공원의 벤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치 거기에 아내가 앉아 있는 것처럼. 아내가 그를 기다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