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젊은 고모의 얼굴이 담긴 사진 한장.
사진 속에서 고모는 머리를 뒤로 잡아당겨 쪽을 쪄서 비녀를 꽂고 흰 저고리를 옷핀으로 여미고 검정 치마 한끝을 감쳐 한 손으로 잡고 있다. 치켜올려진 치마 밑으로 코박신이라고 불렀던 흰 고무신이 보인다. 버선도 양말도 안 신은 맨발이다. 고모는 세상을 향해 눈을 흘기듯이 쌍꺼풀 없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치뜨고 아버지를 꽉 붙잡고 서 있다. 어느 해인가. 아버지가 집을 떠나 있다가 여름날 이틀 간격으로 있는 부모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을로 돌아왔을 때 찍힌 것인데 그것이 고모가 이 세상에서 찍은 첫 사진이다.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귀에 남아 있는 고모의 목소리. 엄마는 초가집 마루 끝에 앉아 있고 고모는 봉초 담배를 종이에 말아 입에 물며 마루 가운데에 앉아 있다. 고모는 이 집의 어른이다. 언제나 이 집에 들어서면 고모는 마루에 앉을 때는 가운데에, 밥상 앞에 앉을 때는 큰오빠 자리인 아버지 앞에 대등하게 앉았다. 고모는 언제나 어디서든 아버지를 두둔하고 있다. 봄에 집을 나간 아버지가 여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엄마 입에서 한탄이 흘러나온다. 고모는 사진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엄마를 향해 눈을 흘긴다. 호랭이 아비가 답답해서 그런 거 아닝가, 이게 다 전쟁 탓이랑게. 갸 잘못이 아니여. 국군이 될라고 소집 장소에 가므는 집안의 장손이라고 살아 있어야 한담서 작은아버지가 돌려보내서 기피자가 되어서 어디 한곳에 몸을 뉠 수가 있었어야 말이제. ‘호랑이’는 큰오빠의 태명이다. 호랑이가 고모에게 가면 호랭이가 된다. 고모는 흠, 소리를 내며 마당을 휘둘러보며 봉초 담배 한대를 다시 말아서 입에 물고는 길게 들이마신다. 나중에는 인민군한테 안 잡혀갈라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서는 집에 있지를 못허고 소를 델꼬 새벽이슬을 맞고 다녔구먼. 자네가 미워서 그렁 게 아니고 그때 떠도는 병이 들어 그렇다니깐. 그 소리 한번 더 들으믄 천번이오! 고모는 엄마의 기세에 밀려 말꼬리를 흐렸다. 엄마는 그때만 고모에게 대들 듯이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가 농사 지으라고 했간디요, 그것은 내가 놉 얻어서 한다니깐! 뭔 논이 많기나 하간요! 아그들이 저리 자라는데 아버지란 작자가 자꾸 집을 나가니깐 아그들이 뽄받을까 싶어 그러제요. 고모는 봉초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인자 곧 제사니까 그때는 올 것이네, 했다. 어디에 있더라도 그날엔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고.
고모 말이 틀린 적은 없다.
아버지는 어디에 있든지 제삿날이면 집으로 돌아와 상에 올릴 닭을 잡고 밤을 쳐주고 전쟁 통에 사라진 위패를 대신해 지방을 썼다. 우리 형제들이 전주 할아버지라고 부른 아버지의 작은아버지는 당숙들과 작은아버지와 자정이 되면 제를 올리고 그때까지 자지 않고 있는 우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어 음복을 하게 했다. 나는 가운데에 칼집을 넣어 문양을 내 소복이 쌓아놓은 삶은 달걀을 좋아했다. 곶감을 집어주려다가 내가 그 달걀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버지는 곶감 옆에 노른자가 꽃 속처럼 보이는 달걀을 얹어주었다.
대문 안으로 택배 기사가 바쁜 걸음으로 들어왔다.
내가 작은방의 창에 달린 커튼을 젖히려는 순간과 택배 기사가 대문으로 들어오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택배 기사는 현관으로 통하는 계단에 택배를 놓고 가려다가 창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꾸벅 묵례를 하더니 내게 물었다.
―할아버지 안 계세요?
할아버지란 아버지를 뜻하는가보았다. 병원에 다녀온 후 아버지는 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기분이 나아진 듯도 보였다. 오늘 아침엔 내가 아침 식사로 연두부를 내놓으면서 간장 대신 명란을 올리고 들기름을 한방울 떨어뜨린 것을 두고 맛이 고소하다고 칭찬도 했다. J시로 내려와 있는 동안 아버지에게 처음 듣는 칭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는 달력을 한참 보더니 병원의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오늘 날짜에 붉은 동그라미를 쳐놓았는데 그 표시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농협에서 나눠준 달력의 날짜들은 백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컸다. 마음속으로 아버지가 붉은 동그라미를 쳐놓은 걸 엄마가 어찌 알 것이라고 엄마에게 묻나, 했는데 엄마는 국악원 사람들과 점심 모임 있는 날이고, 백운 양반이 함께 가기로 해서 열한시 반쯤 그이가 올 것이니까 아버지는 집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엄마는, 꼭 가야 쓰겄소? 물었다. 방금 전까지 기억도 못하던 아버지는 꼭 가야제,라고 대답했다. 가서 뭐할라고 그러요? 엄마가 다시 묻자 아버지는 뭐 할 것은 없는디 내가 지난번에도 안 가서 이번에도 안 나가면 없는 사람인 줄 알 거 아닌가,라고 대답했다. 열한시 반에 백운 양반이 집으로 아버지를 데리러 온다고 했음에도 아버지는 신작로에 나가 있겠다며 약속시간 삼십분 전인 열한시부터 서둘렀다. 갑자기 후드득후드득 비가 쏟아져서 내가 아버지 비 오는데 나가지 말지? 하자 아버지는 하늘을 내다보더니 지나가는 비다, 했다. 아버지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비는 나무 냄새, 흙 냄새를 잠깐 실어나르더니 이내 멈추고 해가 났다. 아버지 얼굴에 선크림을 발라주자 아버지는 끈적인다고 바로 닦아냈다. 이거는 끈적임이 없는 선크림이에요, 내가 다시 발라주자 아버지는 뿌리치는 것도 귀찮은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가만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머리에 모자를 씌워줄 때도 가만있었다. 지팡이를 챙겨주었으나 아버지는 대문 앞에 세워두고 골목으로 걸어나갔다. 몸피가 작아져 셔츠 위에 걸친 재킷도 바지도 바람이 들어간 듯 훌렁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밀고 나간 대문으로 택배 기사가 들어온 것이다.
내가 창문을 열고 택배 기사에게 계단에 내려놓고 가도 된다고 하자, 택배 기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할아버지가 항상 직접 받으셨거든요, 했다. 가능하면 할머니 모르게 해달라고도 하셔서…… 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빤히 쳐다보자 택배 기사는 할 수 없다는 듯 내가 가리킨 현관으로 통하는 계단에 택배를 내려놓고는 다시 대문으로 나갔다. 나가다가 못 미더운 듯 다시 한번 택배 쪽을 돌아다보았다. 무엇이길래? 싶어서 바깥으로 나가 계단에 놓인 택배를 살펴보았다. 방 안에서는 모르겠더니 부피가 상당히 컸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홈쇼핑에서 배송한 프라이팬 세트였다. 엄마가 주문을 한 것일까? 나는 상자를 풀어보려다가 귀찮은 생각이 들어 헛간의 평상 위에 택배를 내려놓고는 며칠 전 밤 아버지가 쭈그리고 앉아 있던 헛간 한편을 바라보았다. 벽에 걸린 농기구들은 그날 그대로다. 나는 몸을 일으켜 헛간 옆문을 슬며시 밀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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