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아고라 폐인의 기록

김형수

김형수 / 시인, 소설가

나도 ‘폐인’이 되었다. 도대체 달아날 수가 없다. 두달째 중독 상태. 누구는 <시위대가 청와대로 가야 하는 이유>란 글을 올리고, 누구는 <시위대가 청와대로 갈 필요 없는 이유>를 띄운다. 잠시만 눈을 팔아도 신체에 반응이 온다. 갈증, 허기! 내가 주목했던, <물리력보다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소나기에 묻혀버렸다. 모든 것이 동사(動詞)다. 모든 것이 현재진행형이다. 나를 부르는 것, 나를 끌고 가는 것, 얼굴도 볼 수 없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오직 샘솟고, 넘치며, 물결쳐 흐를 뿐인, 이 익명의 지도력을 섣불리 대상화하고 규정하려는 시도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생명은 아직 살아 있고, 나는 매순간 위기를 돌파하는 아고라의 숱한 세포 중 하나이길 바랄 뿐.

한국 민주주의에 절망하던 날, 아니 김근태가 신지호에게 패하던 날, 세상인지 역사인지로부터 받은 타격을 견딜 수 없었다. 마치 1980년 5월 전남도청 진압 직후의 공황상태로 돌아가버린 것 같았다. 저 참혹한 잿더미 속에 불씨 같은 게 남아 있을까? 더불어 아쉬워하고 더불어 슬퍼할 체온을 만날 수 있을까? 온라인에 미숙한 몸을 끌고 낯설고 삭막한 포털싸이트들을 돌았다. 조회수 300개 이상을 1박 2일에 걸쳐 클릭하는 미친 방황이었다. 혹시, 다시 혹시…… 그러면서 다다른 토론방에서 아직 기세가 살아 있는 네티즌의 집결을 촉구하는 손짓을 보았다. “아고라로 모이자!” 다른 싸이트에서 옮겨오는(택시 기사도 모르게) 무리들 중에는 진보신당, 민노당, 창조한국당, 통합민주당 들이 있었고, 간혹 친박연대나 자유선진당도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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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에서 비를 맞는 기분이었다. ‘자학’의 경연장이 된 패잔병 구락부. 왜 우리가 같은 땅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해야 되는가? 왜 우리가 이웃에 대한 경멸을 참아야 하는가? 한나라당을 찍은 고향을 저주하고 동네를 욕하며 가족을 성토하는 노여움의 공동체가 따로 없었다. 이내 뉴타운에 홀려 몰가치를 선택한 다수에 대한 소수의 반격이 시작되고, 밤이 깊어가면서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가 떴을 때 희미한 위로감이 찾아왔다. 장사 지내줄 사람도 없이, 시대 밖으로 그냥 운구될 것 같은 ‘슬픈 김근태들’의 상속자가 없지 않다는 느낌. 광우병 쇠고기 반대, 의료 민영화 반대, 노무현 재평가, 이명박 성토, 대운하 야유 속에서 오만한 정부가 날마다 터뜨리는 실정들을 성토하기를 사흘, 나흘…… 조심히 ‘촛불시위’를 제안하는 네티즌들이 있었다. 아마도 착하셔라, 순박하셔라, 했던 이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미련’과 ‘혹시’ 때문에 슬그머니 청계천에 가보고는 놀란 것인가.

미선이·효순이 때와는 또다른 충격이었다. 초중고생들이 켜둔 촛불 앞에 김부선이 나오고, 이승환과 김장훈이 노래하며, 어릴 때 시골 장터에서 보았던 쥐약장수 퍼포먼스, 지하철을 휘젓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패러디한 “명박지옥 탄핵천국” 퍼포먼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대협에서 훈련된 시위·집회 전문가들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무대가 없어도 홀로 빛나는 생명의 언어들. 놀라운 감수성의 진화를 알리는 촛불의 춤은 어느덧 청계천 이명박의 물길 위에서 전혀 다른 말을 건네며 흔들리고 있었다.

새 물결이었다. 의미를 육화(肉化)하지 못한 발언자는 ‘수사’를 얻지 못한다. 수사학이란 세계를 대하는 태도나 감정이 생명을 얻는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마침내 우리는 4월의 절망을 이길 수 있게 하는 언어의 탄생을 본 것이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아마 80년대 정신의 제삿상을 지키게 될 종손들은 아직도 ‘위악적인 포즈’를 감추지 못했다. “나는 탄핵에 반대한다. 우리는 이명박에게 더 당해야 한다.” 그들의 귀에, 시민을 위한 예비군 활동을 시작하자, 촛불집회에서 예비군 복장을 착용하자는 제안은 얼마나 심란했을까? 그러나 국가폭력의 공포가 학습돼 있지 않은 신인류의 상상력은 거침없었다. 곧바로 등장한 해커들. 80년대의 숨막히는 거리에서 민정당 당사를 점거 농성한 소식과 맞먹는 한나라당 홈페이지 점거 소식. ‘아프리카’라는 방송이 시위현장을 중계하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렇게 자학에 빠진 공동체가 절대존엄의 상태에 도달하는 데 딱 두달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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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산업사회적 상상력을 해체하는 새 세대의 역동성이 화두로 떠오르고, 세상을 편집해온 언론의 서열이 네티즌의 손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나서서 물타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프라인에서 교사, 교육청, 경찰로 연결되는 협박이 감행되면 온라인에서 곧장 방비책이 나왔다. 난적, 난제를 풍자와 해학으로 무력화하는, 오직 최강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을 ‘아고라’는 끝없이 찾아냈다. ‘심재철 의원 18원 후원사건’ 같은 것들을 보면서 나는 놀랐고, 동시에 나의 ‘낡음’이 두려웠다.

어떤 프랑스 언론은 초반에 이미 핵심을 읽었다. “이 운동은 끊임없이 확산되면서 뚜렷한 조직이 없다… 참가자들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지도 않고, 단 하나의 정치적 요구 말고는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투쟁임에 틀림없다.” 도덕과 힘의 압도적 우위, 오직 이것이 아니고서는 가능해 보이지 않는 일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날마다 출몰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를 이끄는 힘이 순식간에, ‘대중에서 다중으로’ ‘공간 공동체에서 시간 공동체로’ ‘정치에서 문화로’ ‘지도와 계몽에서 집단지성으로’ 이동한 것을 밝히지 않고서는 이 경이로운 풍경을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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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는 지식과 정보의 터미널이다. 온갖 개인이 연대하고, 온갖 전문성이 제휴한다. ‘100분토론’에서 혹세무민한 뉴라이트 논객 하나를 세계적 기업 맥도널드와 대치시키는 데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여론을 호도하는 조중동을 응징하기 위한 자발적 숙제검사(조중동에 광고한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가 매일같이 이어지고, 한 여고생은 <아빠가 지하 취조실에서 이뤄낸 민주화예요>라고 쓴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블로거뉴스에서, 며칠 전에 막 스무살을 통과했다고 말하는 ID 하나가 “계몽은 독이다. (…) 독이 퍼지면 촛불은 서서히 숨을 거둔다”라고 쓴 문장을 보면서 나는 전율했다. 강단 지식인들이 말로만 떠들던, 좌도 우도 소멸한, 새로운 한국이 코앞에 놓여 있었다.

문제는 제도화될 수 없는 이 지도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이다. 미덕의 질서화를 꿈꾸면서 서열화를 거부한 채 오직 연대만을 허락하는 이 힘이 난공불락의 국가권력을 수정할 수 있는가? 답을 찾는다면 6월항쟁은 이제 대장정을 마치고, 마침내 21주년 행사를 마친 오늘 이 자리에서 고요히 눈을 감아도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이 기쁘지만 슬프다. 그간 나를 이끌었던 빛나는 연대기 하나가 목전에 흔들리는 촛불들 틈새에서, 제 스스로도 손에 촛불을 든 채 아름답게 산화하는 중이다.

2008.6.11 ⓒ 김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