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이년 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서울을 급히 떠나야 했을 때 소영은 곧 되돌아오겠다는 결심은 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지도 않았다. 그녀는 쉽게 희망을 품는 성격이 아니었다. 가능성의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앞이 캄캄하기만 할 때, 희망은 또다른 상처가 될 뿐임을 익히 알았다. 저 멀리 한톨의 희망 비슷한 것이라도 보이면, 눈앞의 캄캄한 현실에 적응할 마음 따위는 먹지 않는 게 인간이었다. 그 희망이 맥없이 사라지고 나면 결국 피해자는 자신이다.
이런 방식으로 돌아가게 될 줄 몰랐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택시의 뒷자리에서 소영은 차창 밖의 풍경들이 참 낯설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손을 숫제 제 무릎 위에 가져다놓고 마음껏 주물럭거리고 있는 옆자리의 허여멀건 남자아이 역시 낯설었다. 동서울까지 10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소영은 깨달았다. 급히 떠나왔다고 해서 그곳이 무턱대고 그립지는 않다는 사실을. 그녀는 서울이 그립지 않았다.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딘가에 갈 수 있다면, 돌아가기는 싫었다. 새로운 곳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 전혀 모르는 곳에 가고 싶었다. 서울에 가까이 오자 고속도로가 정체되었다. 여기서 택시 문을 열고 내려선다면? 어리벙벙하게 소리치는 남자아이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마구 달려 도망친다면? 저 산등성이를 넘어 계속 달려간다면? 어딘가에서 뛰어내려 새로운 곳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다면, 열일곱해를 살아오는 동안 그녀는 백번도 넘게 인생이라는 차에서 풀쩍 뛰어내렸을 것이다. 정체는 오래지 않아 풀리고 차는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다시, 서울이었다.
현기는 서울에 잘 아는 형이 있다고 했다. 중학교 때 과외를 배웠던 형인데 신촌의 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분명히 자신들을 이해하고 도와줄 거라고 했다. 신촌의 작은 커피숍에서 두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그 아는 형이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얼굴이 거무튀튀하고 휴가 나온 군인처럼 짧은 스포츠형 머리 스타일을 한 남자였다. 남자는 그들을 데리고 맥주와 소주를 함께 파는 어두컴컴한 술집에 갔다. 그곳에서 현기는 집을 나왔다는 사실을 너무도 진지하게 고백했다. 형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픽 웃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뭘 할지 생각해봐야죠.”
“네가?”
남자는 다시 한번 웃었다.
“네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데?”
“무슨 일이든지요.”
지나치게 호기롭게 말했다 싶었는지, 덧붙이는 말은 조금 작았다.
“저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소영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가만히 팝콘을 씹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는데 자꾸만 졸렸다. 현기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남자가 소영에게 물었다.
“쟤랑 사귀는 거야?”
달리 뭐라 해야 할지 몰라서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좁은 테이블 밑에서 마주 앉아 있던 남자의 다리가 소영의 종아리 쪽으로 슬며시 얽혀왔다. 소영은 놀라서 자신의 다리를 빼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의 힘이 더 셌다. 그녀의 다리를 완력으로 꽉 붙들고는 놔주지 않았다. 현기가 자리에 돌아오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영의 다리를 풀어주었다. 짧다면 짧은 동안이었을 것이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현기의 잔에 술을 채워주는 남자의 옆모습을 소영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뒤론 팝콘의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타다 만 석탄가루처럼 입속에서 힘없이 바스러졌다.
남자는 현기와 소영을 뒷골목 안쪽의 한 모텔 앞까지 데려다주고 갔다. 현기는 오래 지낼 수 있는지 카운터에서 물어보았다. 잔뜩 졸아든 음성은 감춰지지 않았다. 카운터의 중년 여자는 선불이면 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들이 몇살인지 묻지도 않았고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요구도 없었다. 현기는 한달치 방값에 해당하는 돈을 현금으로 냈다.
그들은 주로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고, 고작 외출해봐야 근처 피씨방에서 시간을 때우는 게 고작이었다. 현기는 시도 때도 없이 성관계를 원했고, 소영은 그렇지 않았다. 투숙한 지 며칠 만에 소영은 이렇게는 더 지낼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현기가 편의점에 간식거리를 사러 간 사이, 소영은 자신의 옷가지들을 챙겼다. 현기의 배낭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현금 딱 두 뭉치만을 집어 들어 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가방이 작아서 더 넣기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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