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공원에서 그는 자전거와 부딪힐 뻔했다. 자전거 운전자는 날이 좋아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고, 그는 자신이 들어선 길이 자전거전용도로인지 몰랐다. 그는 잔디밭 쪽으로 몸을 피하려다 연석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운전자가 자전거를 세우고 그에게 다가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리걸음을 해보았다. 발목이 시큰거렸다. 얼굴이 저절로 찡그러졌다. 괜찮네요, 그는 말했다. 벌 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죄책감이 조금 사라졌다. 운전자가 머뭇거리고 떠나지 못하자 다시 한번 말했다. 괜찮으니 가던 길 가세요. 그리고 그는 가까운 벤치로 걸어갔다. 주머니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 받지 않았다. 벨소리가 끝나고 난 뒤 전화기를 확인해보니 부재중 전화가 열한통이나 들어와 있었다. 문자메시지는 더 많았다. 그는 답하지 않았다. 왜 그랬지? 그는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며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단지 어깨를 적셨던 침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때의 불쾌함. 그때의 축축함. 자신에게 몸을 기댔던 남자에게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지하철에 있던 승객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의식했다. 스튜디오에서 그 이야기를 하다가 그는 자신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놀이동산에서 다람쥐통에 갇혔던 이후 사춘기 시절 그를 따라다니던 시선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났다. 뒤통수가 뜨거워서. 부끄러워서.
그가 살던 동네에 야구선수 박철순과 이름이 같은 아저씨가 있었다. 이름 때문에 동네에서 그 아저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형민이 오디션에서 두번째로 떨어지던 날, 동네 골목에서 박철순 아저씨가 두 딸과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이 빨간색 실을 잡고 아빠 앞에서 걷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저씨의 손목이 실로 묶여 있었다. 그 옆을 지나가다가 형민이 아저씨에게 인사를 했다. 두 딸들이 동시에 말했다. 아빠가 잘못해서 잡혀가는 중이에요. 박철순 아저씨가 허허허 하고 웃었다. 빨래를 걷으러 옥상에 올라가던 한 아주머니가 골목길을 향해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그러자 두 딸이 옥상을 향해 소리쳤다. 아빠가 잡혀가는 중이에요. 엄마한테 잘못해서요. 그러더니 묻지도 않았는데 아빠의 잘못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온 것. 엄마가 동생을 임신 중인데도 저녁에 통닭을 사오지 않은 것. 수염 안 깎고 뽀뽀하는 것. 많은 잘못 중 가장 큰 잘못은 양말을 뒤집어 벗는 것이라고 큰딸이 말했다. 뒤에 서서 아이들에게 끌려가던 박철순 아저씨가 미안합니다, 하고 대꾸했다. 앞으론 양말 똑바로 벗겠습니다. 아니, 엄마 안 힘들게 내가 빨겠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다보니 그는 오디션에 떨어진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몇년 후, 박철순 아저씨가 저녁 아홉시 뉴스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가 모는 버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서 있던 사람이 앉아 있던 사람의 발을 밟은 것이 시작이었다. 뉴스에 나온 목격자는 맨 뒤에 앉아 있다가 그들이 말다툼 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앉아 있던 사람이 사과를 하라고 하자 서 있던 사람이 급제동을 한 버스의 잘못이니 운전기사에게 사과를 받으라고 맞받아쳤다. 그렇게 서로 옥신각신하더니 서 있던 사람이 갑자기 안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찔렀어요. 순식간이었어요. 목격자는 말했다. 범인은 운전자 쪽으로 다가가 박철순 기사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다 니가 운전을 개떡같이 해서 그래. 범인이 말했다. 그리곤 승객들을 모두 내리게 하고는 운전자를 인질 삼아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 사건으로 그는 다시는 버스운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전환해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리고 대문 앞에 앉아서 종일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호두 두알을 오른손에 굴려가면서. 그렇게 몇달이 지나자 사람이 아주 못쓰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이들에게, 아내에게, 욕을 한다는 거였다.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면 형민은 딸들과 놀이를 하던 아저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행복한 얼굴을 생각해보면 욕을 한다는 소문이 믿기지 않았다. 군 입대를 며칠 앞두고 그는 아저씨를 골목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아저씨는 전봇대에 노상방뇨를 하고 있었다. 못 본 척하려다가 며칠 전에 아내가 세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그는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아저씨가 계속 오줌을 누며 말했다. 어, 너구나. 이리 와 오줌 누어라. 그는 오줌이 마렵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가던 길을 가려는데 그의 뒤통수에 대고 아저씨가 말했다. 시끄러워서 그랬어. 내 오줌 소리조차 시끄러워. 그 말을 듣자마자 그는 등 뒤가 오싹해졌다. 아저씨가 뒷덜미를 잡을 것 같아 집까지 냅다 뛰었다. 그후 군대에서 구보를 할 때마다 형민은 그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시끄러워서 그랬어. 형민은 그 말을 곱씹어가며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다정했던 가장이 어째서 한순간 변할 수 있는지.
형민의 앞으로 세발자전거를 탄 아이가 지나갔다. 부모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자고 공원에서 아이 혼자 자전거를 타는지. 그는 벤치에서 일어나 자전거의 뒤를 따라가보았다. 자세히 보니 세발자전거가 아니라 네발자전거였다. 뒷바퀴에 작은 보조바퀴가 달린 자전거. 아이의 부모가 어디 있을까 걱정이 되어 따라 나선 것인데, 막상 걷다보니 아이의 부모가 자신을 유괴범으로 오해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는 오해를 받은 적이 별로 없었는데도 늘 오해를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자신의 성격이 싫었다. 그런 성격 때문에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미숙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을 반바퀴 정도 돌자 누군가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엄마. 아이가 자전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네. 아이가 제 엄마의 품에 안기는 걸 본 다음 그는 중얼거렸다. 앙상한 가지들을 보면서 거기에 꽃망울이 피어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봄에는 벚꽃 구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는 스튜디오에서 느꼈던 감정이 부끄러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시선을 느끼는 순간 한없이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부재중 전화 열두통. 빨간색 숫자들을 한참 들여다보니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박철순 아저씨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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