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
그날의 절도는 두고두고 소영의 기억 속에서 그녀를 짓눌렀다. 남의 것을 뺏거나 훔쳐본 일은 맹세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절도의 공소시효가 얼마나 되는지 검색해본 적도 있었다. 단순절도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기간은 5년이었다. 5년이 지나고 난 뒤에도 간혹 그와 관련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정복 경찰들이 어떤 문 앞에 서 있다. 문이 확 열리면 한 여자가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뺨 위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경찰들이 여자의 팔을 양쪽에서 붙들고 일어선다. 여자는 구체관절인형처럼 맥없이 이끌려간다. 소영은 그 여자가 누군지 너무도 잘 알았다. 바로, 자신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그날의 범죄가 만천하에 들통나고 말리라는 불안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화되어갔다. 한소영이 아니라 한소이의 비중이 더 커질수록 불안도 함께 자랐다. 그것은 커다란 마대자루 입구에 아주 조금, 비죽이 튀어나와 있는 가느다란 쥐꼬리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가 우연히 잡아당긴다면 그 줄은 길게, 길게 끝도 없이 이어져 나올 것이다. 그 끊어지지 않는, 질겨빠진, 더러운 줄이 자신의 인생을 칭칭 휘감아버릴 것만 같았다.
모텔에서 나와 무조건 편의점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막 출발선을 떠난 마라톤 선수의 속도로 달렸다. 얼마든지 더 빨리 달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혼자가 되는 순간을 갈망해왔음을 알았다. 모텔 건물이 보이지 않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까지도 목적지는 정하지 못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누구를 만나려도 강을 건너가야 했다.
현기에게는 서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현기가 서울에 살았었다면서, 아는 사람이 없는지 물었을 때도 모르는 척했다. 몇몇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불과 이년이 못 되는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전화번호가 바뀐 경우도 있었고, 그나마 전화를 받은 친구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한결같이 놀랐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느껴지는가 보았다.
“잠깐 들어온 거야. 금방 다시 나가.”
둘러대는 자신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렸다. 이년 전, 급히 떠나면서 미국에 가게 되었다고 거짓말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혹시 잠깐 나올 수 있어? 오랜만에 보고 싶어서.”
너희 집 앞으로 갈게,라고 덧붙여도 선뜻 나오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한명만이 나오겠다고 했다. 예술중학교에 다니며 무용을 전공할 때의 동기였다. 아파트 옆동에 살았고 3년 내내 스쿨버스를 같이 탔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는, 그대로 거기 있었다.
“잘 봐라. 여기가 압구정 현대야.”
그곳에 처음 이사 오던 날, 아버지가 감격에 겨워 말했다. 그는 언제나 허풍스러웠고 허세를 잘 떠는 부류의 인간이었지만 그날의 감격어린 소감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였다. 황토색으로 외벽을 칠한 아파트들이 멋없이 늘어서 있었다. 소영의 눈에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곳에서 유년 시절의 후반을 보냈다. 그동안 아버지는 세명의 여자를 차례로 집안에 들였고 차례로 내보냈다. 소영은 그중 나이든 여자에게는 ‘아줌마’, 젊은 여자에게는 ‘이모’, 어린 여자에게는 ‘언니’라고 불렀다. 어떤 여자는 소영을 미워했고 어떤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 어떤 여자는 소영과 가까워지고 싶어 안달했고 어떤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 소영은 세 여자에게 공평하게 대했다. 냉랭하기보다는 다정함에 가까운 태도였으나 실제로 정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밤이 늦었다. 캄캄한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오래 기다렸지만 약속한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갈 곳이 없었다. 그녀는 분연히 일어섰다.
그 후에는, 취직을 했다. 지역정보지의 구인광고를 통해 고른 자리였다. 조심스럽게 고른다고 골랐는데 예상한 것보다는 거친 곳이었다. 기간으로는 한달도 채 못 되는 동안이었는데 그 시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발설해본 적이 없었다. 현기의 돈을 훔친 날처럼 꿈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삼촌’이라고 부르던 아버지의 지인들에게만은 절대로 연락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마음먹은 대로만은 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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