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
네발자전거를 탄 아이가 사라진 도로 끝에서 자전거 운전자가 달려왔다. 아직 있었네요. 운전자가 말했다. 정면에서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자 페달을 밟을 때마다 허벅지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약국에 갔다 왔다며 운전자는 그에게 파스를 내밀었다. 발목 인대는 조심해야 해요. 한번 다치면 자꾸 그쪽으로 넘어지더라고요. 형민은 반대편으로 사라지는 자전거를 보면서 매 계절마다 발목을 접질리는 청년에 대해 상상해보았다. 삐끗. 기울어진 보도블록을 밟아서 삐끗. 마트에 맥주를 사러 가다가 삐끗. 애인과 벚꽃 구경을 가다가 삐끗. 친구들과 당구를 치다가 삐끗. 그런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났다. 못된 생각인 줄 알았지만 넘어지는 상상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는 연석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었다. 양말도 벗었다. 양말 바닥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순면 100%. 그는 그 글자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면도 아니고 순면이라니. 아침에만 해도 방송출연을 한다고 새 양말을 신은 게 조금은 부끄러웠다. 다 큰 어른이 새 옷도 아니고 새 신발도 아니고 그저 새 양말이라니. 누가 그 사실을 알면 놀림을 받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순면 100%라니. 그 글자를 여태 밟고 다녔다니. 그는 스티커를 떼지 않았다. 그 말이 부적처럼 느껴졌다. 파스를 붙이고 그는 공원 입구까지 부러 절뚝거리며 걸었다. 파스를 붙인 자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파스 냄새를 좋아해서 시도 때도 없이 멘소래담을 무릎에 바르던 사춘기 시절을 생각했다. 그러고 나면 학교 운동부 아이들에게서 나던 냄새가 자신의 몸에서도 났고, 왠지 운동장 스무바퀴쯤은 거뜬히 뛸 수 있는 남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택시가 멈추었다. 뒷문이 열리더니 목발이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 다음으로 깁스를 한 오른발이 보였다. 횡단보도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반대편에서 왼발에 깁스를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목발을 짚고 있지는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삐끗한 사람이 많다니.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았다. 그리고 깁스를 한 남자가 내린 택시를 탔다. 나도 방금 삐끗했으니 택시 정도는 타야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사가 어디까지 가냐고 묻자 그는 사는 동네 이름을 말했다. 그러다 다음 사거리에서 차가 멈추었을 때, 어느 건물 옥상에 붙어 있는 광고판을 보다, 불쑥 버스터미널로 가자고 말했다. 고향으로 내려가 문방구를 차린 직장 상사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강정구 차장은 고향으로 내려간 뒤 일년에 두번 그에게 안부 메시지를 남겼다. 봄에 한번. 겨울에 한번. 문구는 매번 똑같았다. 겨울 내내 살아 있었지? 꽃구경하러 한번 와. 난 이제 겨울잠을 잘 거야. 너도 푹 자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그는 버스터미널에서 표를 산 다음 강차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지금은 꽃구경도 못하고 폭설에 고립되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와. 묵은지가 맛있어. 강정구 차장이 대리였을 때 그는 신입사원이었다. 첫 출근 날 강차장이 그에게 말했다. 사수가 무슨 뜻인지 사전에서 찾아봐.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라면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당연히 알 수 있는 말이었기에 그는 사전을 찾아보지 않았다. 그랬더니 다음 날 강차장이 자신의 사전에 밑줄을 그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사수라는 단어가 열개도 넘게 있었다. 난 이 중에서 이 말이 제일 좋아. 강차장이 검지로 한 단어를 가리켰다. 검지의 손톱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지킴. 출근하자마자 마신 커피 때문인지 그 문장을 보자마자 배꼽 안쪽이 사르르 아파오기 시작했다. 강차장이 그를 보고는 검지를 눈앞까지 들었다가 내렸다. 그건 알아들었지,라는 뜻이었다. 그후로 하루에도 수십번 보게 될 행동이었고, 강차장이 불명예스럽게 회사를 그만둔 뒤로 형민이 부하 직원들에게 자주 하게 될 행동이기도 했다. 그날 그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니까 상사가 부하직원을 지킨다는 것인지, 부하직원이 상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인지. 어찌되었든 둘 다 지켜지지는 않았다. 강차장은 형민이 실수를 해도 그 자리에서 지적하는 법이 없었다. 일을 할 때도 세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아서 형민은 자신에게 일이 주어지면 겁부터 났다. 물어볼 데가 없었다. 알아서 해. 강차장은 늘 그렇게 말했다. 그러다 그가 큰 실수를 하게 되면 책상 위에 메모 한장을 남겨놓았다. 어째서 그렇게 해선 안 되는지. 그런 실수 하나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메모의 마지막은 늘 똑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알아들었으면 퇴근 후 어느 식당으로 나오라는. 그때 그는 새로운 음식을 참 많이도 먹어보았다. 양념한 주꾸미를 철판에 구워서 무쌈에 싸 먹는 맛이란. 프라이드치킨을 먹는 날은 파가 잔뜩 들어간 골뱅이무침을 2차로 먹었다. 입사 이년 후에, 강차장이 새로운 부서로 옮겨 가면서 그도 같이 옮겼다. 커피 자판기를 임대하고 관리하는 일로는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한 사장이 새 부서를 만들었다. 껌 자판기. 책 자판기. 라면 자판기. 콘돔 자판기. 그때 강차장이 낸 아이디어 중에는 칫솔 자판기도 있었다. 강차장의 어린 아들이 충치 치료를 하러 치과에 갔다가 의사에게 양치질을 안 하면 이를 몽땅 뽑을 거라는 무서운 충고를 듣고는, 아빠에게 그런 자판기를 만들어달라고 한 것이었다. 그때 팀원들 모두 웃고 말았는데 강차장만이 정색하면서 말했다. 오만원 내기 하자. 나중에 정말 칫솔 자판기 생길지 안 생길지. 휴게소 화장실 앞에서 그는 정말 칫솔 자판기를 보았다. 어느 회사에서 만들었는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형민은 칫솔 자판기를 사진기로 찍으면서 중얼거렸다. 차장님이 내기에서 이겼어요. 충치가 무서워 악몽을 꾸던 그 어린 아들은 중학생이 되면서 아무 것도 무서운 게 없어졌다. 장례식장에서 강차장의 부인이 남편의 가슴팍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멱살을 잡고 흔들며 울부짖었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이라고. 그 장면을 잊으려고 형민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갓길에 차 두대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운전자로 보이는 두 남자가 싸우는 것 같았다. 논두렁마다, 나무 아래마다, 눈이 남아 있었다. 아직 녹지 않았네. 그는 부러 중얼거려보았다. 그래도 자꾸만 환청처럼 그 말이 들렸다. 부인에게 맞아서 목덜미가 벌게진 강차장이 와이셔츠의 단추를 여미던 모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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