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23회

그러니 호형호제하며 지냈겠지만 삼촌들은 대개 소영의 아버지와 비슷한 부류였다. 크고 비싼 차를 리스하여 자주 바꿔 타고, 평상복으로는 골프웨어만 입고, 양복을 입어도 넥타이는 매지 않고, 돈을 물 쓰듯 쓰지만 생업이 무언지 딱히 짐작하기 힘든 그런 남자들. 아버지는 서울에서 야반도주할 때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이해할 만했다. 받을 수 있으리라 추정되는 도움의 양보다, 줘야 하는데 영원히 주지 못할 돈이 훨씬 많았을 테니까.

급한 중에도 소영은 자신이 가진 몇개의 연락처를 신중히 살펴보았다. 아버지와의 금전관계가 특히 더 복잡했으리라 짐작되는 이나, 난봉꾼들 사이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던 이에게는 선뜻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이렇게 저렇게 배제하고 나니 아버지의 후배인 황이 남았다. 소영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황은 아버지의 주변인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안심할 수 있는 종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키가 작고 단단한 체격에 말이 별로 없었다. 독신이었는데 여자를 사귀지도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와 그 친구들은 그를 공공연히 고자라거나 성불구라고 놀렸다. 그렇다고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개를 좋아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언젠가 말복 무렵에, 아버지가 누군가와 ‘개탕’을 먹으러 가자는 전화통화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 그 새끼는 빼자. 지난번 성남 그 집에 같이 갔는데 글쎄 한숟갈도 못 먹더라니까. 나중에 전골이 나오니까 아예 쓱 나가. 박사장이 따라 나갔는데 글쎄 입을 막고 욱욱거리고 있더래.”

아버지는 혀까지 끌끌 찼다. 상대방이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까지 들렸다.

“모자란 놈. 입덧하나보지.”

소영은 황이 키우는 개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소영이 ‘이모’라 부르던 여자와 헤어지고 채 열흘이 못 되어 ‘언니’라 부르던 여자를 집에 들이던 때였다. 소영과 아홉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여자였다. 아버지는 그녀를 위해 호텔의 연회장에서 파티를 열었다. 소영은 참석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소영이 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설마 했는데 파티는 대놓고 전형적인 결혼식 형태로 진행되었다. 여자는 부케를 들고 흰 웨딩드레스를 입었으며, 아버지는 검은색 턱시도에 부토니에까지 꽂았다. 소영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정중앙의 맨 앞이었다. 소영은 거기 앉지 않았다. 속상해서가 아니라 토할 것 같아서였다.

식장 밖의 복도에 서 있는데 황이 다가왔다. 황이 제 손에 들려있던 종이컵을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물이었다. 맑은 물로 입술을 적시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황이 자신의 핸드폰 속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사진첩은 온통 개 사진뿐이었다. 여러마리의 큰 개들이었다. 화면을 쓱쓱 넘기다가, 코와 입이 시커멓고 귀가 아래로 축 처진 갈색 대형견 사진에서 멈추었다.

“얘는 무슨 종이에요?”

“도사견.”

“아.”

“이 녀석들은 아메리칸 핏불테리어.”

“이걸 다 키우시는 거예요?”

그녀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좀 수줍어 보였다. 소영은 황이 건네주었던 물의 맛을 기억했다.

“저 한소영인데요.”

한명구의 딸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황은 그녀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챘다.

“어 소영씨!”

누군가에게 특히 어른이 자신의 이름 뒤에 ‘씨’를 붙여 부르는 건 어색한 일이었으므로 그녀는 좀 긴장했다. 황은 한걸음에 그녀를 데리러 왔다. 기사가 운전하는 자동차 뒤에 태우고는 음식점으로 갔다. 최상급 한우만을 취급하는 고깃집이었다. 그는 꽃등심과 안창살을 시켰다. 개량한복을 입은 종업원이 굽는 고기에 자신은 젓가락도 대지 않고 소영의 접시에만 덜어주었다. 소영이 어느 정도 먹은 후에야 그는 아버지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었다고 말했다. 가보지 못해 유감이라고, 소영에게 많이 힘들었겠다고도 했다. 그는 소영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는 묻지 않았다. 대신,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물었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소영은 대답했다.

“집이요. 지낼 곳이 없어요.”

황이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뭡니까.”

자주 생각해온 것이므로 그 질문에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이 땅을 떠나는 것이라고. 황이 검지로 제 앞의 유리잔을 긁었다.

“그럼 일단 순서대로 해야겠군요. 집을 마련하러 갑시다.”

소영이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순수한 호의라는 것을 불신하지 않던 때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면 비웃으며 내뱉었을 것이다.

“이 멍청아, 공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