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24회

황은, 빈 집들이 몇 있다고 했다. 그중 여자 혼자 지내기에 마땅한 곳이 있는데 실내가 넓지는 않다고,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소영이 정말 감사드린다고 하자 황이 미소 지었다.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찾을 거라고, 그러고 나서 제 힘으로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때까지 잠시 동안만 신세를 지겠다고 소영은 말했다. 황은 한결 여유 있게 미소 지었다.

“편하게, 오래 있어요.”

소영은 손사래 쳤다.

“오래는 아니에요. 저도 계속 이렇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지낼 수는 없으니까요.”

소영의 태도가 완강한 사양으로 비쳐졌는지 황은 어쨌든 마음 편한 대로 하면 된다고 했다. 소영은 남자의 표정이 방금 전보다 좀 딱딱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은 무심한 듯 지갑을 꺼냈다. 빽빽하게 꽂힌 여러개의 신용카드 중 하나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필요한 거 좀 준비하고 청소하고 하면 이틀은 필요할 테니 그동안은 어디 안전한 곳에서 지내요. 신라나 하얏트나 특별히 좋아하는 곳을 말해주면 예약은 내가 해둘게요. 식사도 다 그 안에서 하시고.”

소영은 그 은색의 카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때 그녀는 아버지의 카드를 사용했다. 한도가 얼만지 결제일이 언젠지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십대의 그녀는 백만원짜리 옷을 턱턱 사지는 않았지만 십만원짜리 옷은 마음 내키는 대로 몇벌이라도 살 수 있었다. 하굣길에 떡볶이와 김밥을 간식으로 먹기도 했지만 값비싼 음식을 파는 식당의 계산대 앞에서 머뭇거리는 일도 없었다. 그 카드가 정지되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 떠올랐다.

자신의 생일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같은 무용과 교수에게 레슨을 받던 아이들 서넛과 함께 생일파티를 겸해 이딸리안 레스토랑에 갔다. 또래들이 큰맘 먹고 가곤 하는 패밀리 레스토랑보다 어른스럽고 점잖은 곳에 가는 일은 어떤 선(線)을 우아하게 넘나드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친구들은 교복구두처럼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플랫슈즈를 맞춰 입고 무릎 선 위에서 찰랑이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었다. 그녀도 같은 차림이었다. 계산대 앞의 직원은 몇번이나 계산을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전에 없던 일이라 소영은 의아하기만 했다. 카드기에 문제가 있으면 간혹 그렇기도 하더라고 한 친구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소영은 언짢은 심기를 애써 누르며 물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곤란한 경우를 당한다 해도 버럭 성을 내고 보는 성격은 아니었다. 음식 값은 다른 친구가 현금으로 치렀다.

“미안. 내일 줄게.”

친구에게 말하면서 소영은 어떤 불안감도 느끼지 못했다. 카드기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손님에게 난처한 상황을 겪도록 만든 음식점 측에 화가 났을 뿐이다. 그날 돈을 대신 내준 친구에게는 다음날 바로 갚았다. 얘기를 들은 아버지가 별일 아니라는 듯 빳빳한 만원권 한다발을 주었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이걸로 쓰면 된다.”

그후 처음 가지게 되는 카드였다. 카드 뒷면 서명란에는 황의 사인이 되어 있었다. 상형문자 같아만 보이는 그 사인을 따라 할 수 있을까. 소영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글씨든, 그림이든, 만들기든 손으로 하는 거라면 그녀는 무엇이든 다 잘했다. ‘제가 이걸 들고 도망가버리면요?’ 문득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허허 웃으며 편하신 대로 하라고 할 것 같았다. 만약 그때 황의 카드를 받지 않았더라면. 까닭 모를 그의 친절을 거절했더라면. 뒤늦은 후회의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소영은 그뒤로 이따금씩 상상해보곤 했다. 만약 그랬다면,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고.

그녀가 살게 된 집은, 막 입주를 시작한 대규모 아파트단지였다. 타워형 구조로 설계되어 한층에 모두 네호가 있었다. 각 호의 현관문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문고리부터 벽지까지 모든 것이 새것이었다. 침대와 소파, 식탁, 책상도 모두 새것이었는데 모두 같은 가구브랜드 제품이었다. 꾸민 이의 취향이랄 게 전혀 드러나지 않는 집이었다. 찬장에는 흰색 식기가 적당히 들어차 있었다. 윤이 반짝반짝 나는 새 냄비와 프라이팬도 있었다. 막 지은 콘도미니엄에 놀러온 것 같았다.

황은 소영에게 학교에 다녀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황은 재차 무용을 계속하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잘했잖아요. 정말 예뻤는데.”

그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황도 언젠가 아버지의 초대로 공연을 보러 왔을지도 몰랐다. 과시를 좋아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참가하는 공연 티켓을 수십장 사서 여기저기 뿌려대곤 했다. 소영은 한번도 주인공을 맡아본 적이 없었고 얼굴도 구분하기 힘든 군무에나 참여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다른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맘껏 하라고 황은 말했다.

“참, 이거.”

황이 준 것은 핸드폰이었다. 거기 고리 형태로 매달린 것이 집의 카드열쇠였다. 요즘 열쇠는 이렇구나,라고 소영은 생각했다. 그것을 가진 사람은 둘뿐이었다. 소영과 황. 그렇다고 처음부터 황이 수시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가 오는 것은 그녀가 집을 비울 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