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25회

소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이 자신의 동선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정기적으로 외출을 하는 것은 주 3회 오전에 다니는 영어학원이 전부였다. 본격적인 유학준비반을 수강할까 생각도 했지만 우선은 회화와 토플을 각 한시간씩 듣기로 했다. 무엇보다 유학준비반의 가격이 예상보다 높았기 때문이었다. 황은 괘념치 말라고 했지만 그의 도움을 최소한도로만 받고 싶었다.

학원에 갔다 들어가면 집안에 새로운 무엇인가가 어김없이 놓여 있고는 했다. 먹다 남은 우유만 들어 있던 냉장고를 열자 백화점 식품관의 가격표가 그대로 붙은 식재료들이 착착 정리되어 있는 일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시금치나 콩나물 같은 재료를 건드리지 않으니 다음번에는 아예 반찬코너에서 소포장하여 판매하는 시금치나물과 콩나물무침이 플라스틱 용기째 들어 있었다.

한번은, 아침에 갑자기 비가 내리는 줄 모르고 우산 없이 외출했다. 집에 와보니 식탁 위에 크기가 다른 우산 세개가 순서대로 놓여 있었다. 골프장에서나 쓸 것 같은 대형 장우산, 일반적인 3단 접이식 우산,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 크기만 하게 접힌 초경량 우산 들이었다. 소영은 가장 작은 우산을 손바닥 위에 얹어 보았다. 물질의 질량도 부피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진한 핑크색 바탕에 그보다 한 톤 연한 핑크색 하트무늬가 아기자기하게 찍혀 있는 그 우산을 소영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나이의 여자들이라면 일반적으로 이런 디자인을 좋아하겠지,라는 짐작으로 골랐을까. 그러나 소영은 핑크색도, 하트무늬도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또렷해졌다.

신호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황은 전화를 받았다. 소영이 앞으로는 이러시지 않아도 된다고 하자 그는 허허, 웃었다. 그리고 곧 날이 추워진다고 하니 좀 따뜻한 옷을 사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요 며칠 아우터로 걸친 옷은 검은색 카디건뿐이었다. 두툼한 점퍼나 코트는 하나도 없었다. 소영은 더욱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한번은 감기 기운이 있어 학원에 가지 못했다. 침대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어가 누웠다. 자꾸 기침이 났다. 그렇게 다시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더니 이번에는 죽 전문점의 큼지막한 종이봉투 옆에, 감기약, 진통제, 피로회복제 등 여러 종류의 약들이 놓여 있었다. 죽도 세가지 종류였다. 흰 죽, 야채죽, 해물죽. 각 뚜껑마다 친절하게도 네임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녀는 뚜껑을 열지도 않고 그것들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3분이나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황이었다.

“뭘 좀 먹어야죠. 벌써 두시인데.”

소영은 그제야 시계를 보았다. 벽시계는 한시 오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었다.

“차 보낼게요. 병원에 가야죠.”

소영은 스르르 주저앉았다. 멍하니 창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만치 떨어진 앞 동의 베란다에서 여기가 들여다보일 것도 같았다. 황급히 창가로 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급한 대로 가방에 들고 온 옷가지 몇벌만을 쑤셔넣어 현관을 나섰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파트 단지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황의 차가 막아섰다. 소영은 황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집으로 다시 끌려 올라왔다. 황은 보기보다 완력이 셌다. 소영은 그날 처음으로 황에게 구타당했다. 황은 소영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면서 뭐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러는데. 뭐 그런 소리들이었다. 말이 나오는 대로 입을 놀리는 것 같았다. 소영은 눈물을 흘릴 새도 없이 일방적으로 맞다가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