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회
오후가 되어 문방구에 손님이 한명 찾아왔다.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지방을 쓸 화선지가 떨어졌다는 거였다. 강차장은 화선지와 붓펜을 판 돈 오천원을 형민에게 보여주었다. “이것 봐. 술값은 벌잖아. 돈 벌었으니 고기 사러 가자.” 형민은 오천원으로 무슨 고기를 사느냐고 말하려다 자기가 계산할 마음으로 양복 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정육점까지 가는 길에 강차장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슨 노래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익숙한 음이어서 형민은 따라 흥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강차장은 남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싫어해서 회식 때도 노래방에 가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그런 사람이 노래라니. 형민은 일부러 한발 뒤에서 걸었다. 강차장이 혼자 콧노래를 부르도록.
정육점에 갔더니 부부가 삼겹살을 구워 저녁을 먹고 있었다. “목살 사서 김치찜 하려 했는데. 삼겹살 보니 또 삼겹살이 먹고 싶네.” 강차장이 그러면서 손님들한테 삼겹살 팔려고 일부러 가게에서 저녁을 해먹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했다. 강차장이 형민에게 삼겹살인지 목살을 넣은 김치찜인지 고르라고 했다. “소고기 등심이요.” 형민이 말했다. 그러자 강차장이 목살 한근 줘요, 하고 재빨리 주문했다. 정육점 부인이 상추에 삼겹살을 싸서 강차장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삼겹살을 두개 넣어 쌈을 만든 다음 형민에게도 주었다. 형민하고 강차장이 동시에 카드를 내밀었고 정육점 남자가 강차장의 카드를 집었다. “놀러왔으니 얻어먹어요.” 정육점 남자가 비닐봉지를 건네주며 한근 넘게 담았다고 생색을 냈다. 고기는 형민이 받아들었다. 양조장으로 가면서 강차장은 쌈을 싸주었던 삼겹살 가게 안주인이 국민학교 동창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네살 많은 선배인데, 둘이 몰래 연애하는 걸 최초로 목격한 사람이 자기였다는 말이었다. “고등학생 때였어. 극장을 갔는데 맨 뒷자리에 걔가 있더라고. 군복을 입은 어떤 남자랑. 그때 비밀로 해달라며 부탁하길래 통닭을 얻어먹었지.” 강차장에게 이런저런 동네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덧 양조장에 도착했다. 형민은 나무로 된 양조장 문을 밀었다. 묵직한 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강차장이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진우야, 하고. “여기로 들어와.”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가보니 양조장 사장이 잘 왔다며 반색을 했다. 시험 중인 막걸리들이 있는데 시음해보라는 거였다. 형민은 여덟종류의 막걸리를 조금씩 번갈아가면서 맛을 보았다. “세번째 거요.” 형민이 말하자 양조장 사장이 그럼 그거 더 마시고 가요, 하며 한 주전자를 내왔다.
안주는 더덕. 생더덕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강차장이 낮에 형민과 술을 마실 때 안주를 먼저 먹고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양조장 사장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원래 내 막걸리는 안주가 필요 없어. 술에서 안주 맛이 나거든.” 그 말을 하면서 천연덕스럽게 더덕 안주를 두개나 먹는 모습을 보고 형민이 웃었다. “얘가, 6학년 1반. 오락부장이었어.”강차장이 말했다. “부인도 아마 웃겨서 꼬셨을 걸.” 그 말에 양조장 사장이 그건 인정, 하고 대꾸했다. 양조장 사장이 아내를 만난 것은 스물아홉살 때였다. 지게차 자격증을 따기 전에 그는 트럭 운전을 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을 떠나 오빠 집에 살고 있다는 여자에게 그는 말했다. 트럭 타고 밤길 달려봤어요? 답답하면 말해요, 언제든지 운전해줄게요. 마침 새언니와의 갈등 때문에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던 여자는 그 말에 반색을 했다. 그후로, 그는 여자와 토요일 밤에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며 연애를 했다.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라디오를 듣지 않아도 괜찮았고, 그래서 그는 여자를 웃기기 위해 유머모음집이라는 책을 사서 읽었다. 그때 이런 퀴즈들을 냈다. 소금이 죽으면? 아몬드가 죽으면? 같은. 그중에서 여자가 가장 많이 웃었던 퀴즈는 이거였다. 슈퍼맨의 가슴에 새겨진 S자의 의미는? “그 책 덕에 아내와 결혼할 수 있었어.” 양조장 사장이 말했다. 형민은 친구들하고 서로 그런 퀴즈를 내며 낄낄거렸던 이십대 시절이 생각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양조장 사장이 낸 퀴즈의 정답이 전부 기억이 났다. “스판이요. 스판.” 정답을 맞혔다며 양조장 사장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내친 김에 형민이 기억나는 퀴즈를 하나 냈다. “눈도 두개 코도 두개. 그런데 왜 입은 하나일까요?” 양조장 사장이 손을 들었다. “서로 먹으려고 싸울까봐.” “정답.” 그러자 강차장이 자기도 기억나는 게 있다고 했다. “기러기를 거꾸로 하면 기러기. 그러면 쓰레기통을 거꾸로 하면?” 양조장 사장과 형민이 동시에 말했다. “쏟아진다.” 그러고는 셋이 동시에 웃었다. 유치해. 유치해. 다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런 유치한 퀴즈를 좋아해준 여자와 결혼한 양조장 사장은 역시 아빠의 썰렁한 농담을 좋아하게 될 딸들을 얻게 되었다. 양조장 사장은 두 딸의 자는 모습을 보면 얼른 깨워 웃기고 싶은 생각에 몸이 근질근질했다. 언젠가 두 딸 중 한 아이가 일기장에 이렇게 적은 적도 있었다. 우리 아빠는 왜 코미디언이 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부자가 되었을 텐데. 그는 그 말이 좋아서 한동안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다녔다. 내가 그렇게 부자가 될 수도 있는데 안 하는 거라며. “유쾌한 사람. 나는 그 말이 좋았어. 그런데 발목이 부러져 산속에서 구급대원들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제 마냥 유쾌한 사람으로 살 수는 없겠구나. 다리를 잃은 아르바이트생은 매일 회사 앞에서 시위를 했고 그 아이를 친 후배 녀석은 출산 중 한 아이를 잃었지. 그때도 나는 우리 딸들하고 영화도 보고, 제주도 여행도 갔다 오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형민이 화장실 좀, 하고 중얼거리며 슬쩍 자리를 피해주었다. 오줌이 그다지 마렵지는 않았지만 오줌을 누었다. 화장실 앞에서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는 개미들의 행렬을 발견하고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구경했다. 한참 후에 돌아와 보니 둘이 웃고 있었다. 형민이 자리에 앉으니 강차장이 말했다. “이 녀석 딸이 먹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울면서도 먹는대.” 형민은 자기 딸도 어릴 적에 그랬다고 말해주었다. 엄마한테 혼나면서도 치킨을 계속 먹던 모습이 떠올라 저절로 웃음이 났다. “내가 왜 양조장을 인수했는지 들었어요?” 사장이 형민에게 물었다. “산소를 잘못 찾아서 그랬다고.” 형민의 말에 사장이 오른손 검지를 들어 흔들었다. “아니에요. 어느 날 프로야구 중계를 봤거든요. 유격수가 간단히 잡을 수 있는 공을 빠뜨리자 해설자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저 선수는 어려운 걸 잘 잡고 쉬운 걸 못 잡아요.” 사장에게 그 말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그래서 내려왔어요. 쉬운 걸 잘 잡기 위해.” 형민은 왠지 그 말이 슬펐다. 쉬운 걸 매번 놓치는 선수 때문에 슬펐다. 그래서 그날 밤 술을 꽤 마셨다. 양조장에서 막걸리 네통을 사 들고 문방구로 돌아와 목살을 넣은 김치찜을 해서 먹었고, 낮에 할머니가 주신 시금치로 샐러드를 만들었다. 술이 떨어지면 양조장으로 달려가 잠을 자는 사장을 깨워 다시 술을 샀다. 그렇게 네번. 밤새워 네번을 왔다 갔다 하자 나중엔 사장이 화를 냈다. “한번에 많이 사가요.” 형민이 말했다. “강차장님 말이 그러면 취한대요. 술이 떨어질 때마다 아, 그만 마셔야지, 하고 반성을 해야 한대요.” 밤을 새우면서 형민은 강차장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에는 취해서 거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번이나 울었던 기억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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