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회
아버지가 직접 만든 나무궤짝엔 아직도 경첩까지 그대로 달려 있다. 열쇠를 채울 수 있게 자물통을 걸 수 있는 자리도 여전했다. 아버지가 가게를 그만두었을 때 집 여기저기에서 굴러다니던 나무궤짝에 빌려 온 책이나 떨어진 감이나 새 크레파스 같은 것을 넣어놓고 자물쇠를 채워놓던 때가 생각났다. 오빠 중 한 사람이 여기에 죽은 새를 넣어놓기도 했었지. 아버지가 가게를 그만두고 나자 이 나무궤짝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 누군가 여기에 두면 다른 사람이 저기에 두고 또 다른 사람이 저기에 두고 했었는데…… 이게 여기에 있었네, 시간의 풍파 속에서 거무튀튀해진 나무궤짝 뚜껑을 열었다. 맨 위에 자물통이 올려져 있고 그 아래에 뭔가 수북이 들어 있다.
편지?
나무궤짝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안에 편지가 들어 있을 거라는 건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두번째로 마을 끝 가게를 접은 후로는 행방이 묘연했던 나무궤짝 안에 들어 있는 편지라니. 나는 편지들을 누르고 있는 자물쇠를 꺼내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편지들은 두 꾸러미로 나뉘어 고무줄로 묶여 있다. 고무줄을 늘여서 맨 위의 편지를 꺼내 겉봉투를 읽어보았다. 받는 사람을 쓰는 자리에 굵은 사인펜 글씨로 아버지의 외자 이름이 적혀 있다. 어디서 많이 본 활달한 글씨체. J시로 바뀌기 전의 사인펜으로 적은 주소가 번져서 어떤 글씨는 지워질 듯 뭉개져 있다. 나는 보낸 사람의 주소가 적힌 곳을 살펴보았다. 트리폴리. 리비아? 글씨체가 눈에 익는다 생각했는데 큰오빠의 글씨체였다.
큰오빠가 파견근무로 리비아에 나가 있었을 때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나는 편지 묶음을 가늠해보았다. 오빠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많은 편지를 썼구나. 나로서는 몰랐던 일이었다. 오빠의 글씨체를 알아본 것은 그때 큰오빠와 나도 자주 편지를 주고받아서였다. 오빠가 리비아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격주로 한번씩 서울역 앞에 있던 오빠 회사 해외업무 관리실에 들렀다.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들렀던 것도 같다. 아이들을 기르느라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올케가 오빠에게 보내는 물품이나 편지를 내가 대신 그곳에 맡기면서 오빠가 서울로 보내온 편지나 물품을 받아 와 올케에게 전달했다. 서울이 아닌 지방으로 보내는 물품이나 편지는 회사에서 직접 우편으로 보냈다. 지방에 사는 직원 가족들이 편지나 물품을 본사 해외관리실로 보내면 그것들을 모아서 해외 파견지에 보내주는 일도 해외업무 관리실에서 했다. 편지를 보고 있자니 J시에 갔다가 엄마가 챙겨주는 오빠에게 보낼 것들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와서 화요일에 해외관리실에 맡겼던 기억도 났다. 나는 오빠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꾸러미 아래 놓인 다른 편지 묶음을 살폈다. 아버지가 오빠에게 보냈던 편지들이다. 서울역 앞의 오빠 회사 해외관리실 주소와 이 집의 옛 주소가 읽혔다. 겉봉투의 주소들은 오래되어 사라질 듯이 희미했다. 아버지가 오빠에게 이렇게 많은 편지를 썼던 것인가. 이 편지들이 왜 여기에 있을까? 오빠가 이 편지들을 모아두었다가 다시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린 것인가? 아니면 오빠 집에 갔을 때 아버지가 가져온 것인가? 나무궤짝 안엔 그 두 꾸러미 외에도 다른 편지들이 아래에 놓여 있었다. 나는 의아해져 편지들의 앞뒤를 살펴보다가 파견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오빠가 내가 보낸 편지들도 이렇게 묶어서 돌려주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이걸 왜 돌려줘……
어색해하면서도 되돌려 받았던 편지들. 오빠는 아까워서 모아뒀다가 가져온 거라고 했다. 너는 작가니까 필요할지도 모르고……라고. 등단을 했으나 일년 후에 등단한 잡지에 단편을 한편 발표했을 뿐 청탁받은 지면이 없던 때였다. 등단을 했다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으나 청탁이 없으니 등단 전이나 후나 막막한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다. 선릉에 있던 『여고시대』라는 잡지사에 입사할 때 이력서에 등단한 연도를 적어넣을 수는 있었다. 그것이 취직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빠가 나에게 돌려준 편지들은 내 집 어디에 있을까? 오빠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훗날 책상 서랍 정리를 하다가 오빠가 돌려준 편지를 읽고서 「멀어지는 산」이라는 단편을 썼다. 오빠가 트리폴리 본부에서 근무할 때, 와우 알게비르 비행장 공사 현장에 출장을 가게 되었던 때의 이야기. 오빠는 트리폴리에서 세바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왔으나 와우까지는 육로로 500킬로미터를 자동차로 달려야 했다고 했다. 태국인 기사가 운전을 하고 오빠는 그 옆자리에 타고 있었다고. 가는 길이 사막이고 앞뒤로 똑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모래 위의 햇빛이 굴절되어 신기루가 일었다. 반복되는 똑같은 풍경을 내다보다가 졸기도 했다고.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쳐 이마를 찡그리며 보고 있는데 그 모래바람에 자동차가 옆으로 세바퀴를 굴렀다.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태국인 운전기사와 오빠는 정신을 잃었다. 자동차가 전복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오빠가 눈을 떠보니 사막의 태양이 눈을 찌를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고. 오빠는 그때 탔던 차종을 정확히 기억했다. 프린스3.0. 겨우 몸을 일으켜 끝없이 펼쳐진 모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살펴보니 세번이나 굴러서 모래에 처박힌 자동차는 직각으로 바로 세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고 사막의 풍경은 똑같아서 지금까지 달려온 곳이 이쪽인지 저쪽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프린스3.0이 프레임만 남고 산산조각이 났는데도 신기하게 태국인 운전기사와 오빠는 무사했다.
―내가 신을 믿게 되었다니까……
그때를 회상할 때면 오빠는 경건한 표정이 되곤 했다. 일요일이면 올케를 따라 성당에 나가지만 미사 중에 끄덕끄덕 졸다 왔던 오빠는 파견근무에서 돌아온 이후엔 바른 자세로 미사를 봤다. 나는 태국인 운전기사를 사막에 사는 베두인족으로, 소설의 모델이 된 오빠를 ‘윤’으로 설정해 「멀어지는 산」을 썼다. 차가 전복되기 직전에 태국인 운전기사가 도착지인 와우까지는 10킬로미터 정도 남았다고 했으나 차가 전복된 뒤 모래바람이 일어 풍경이 똑같아지고 방향감각까지 잃자 어느 쪽에서 왔는지 알 수 없어 막막했다고 쓴 오빠의 편지가 영감이 되어 쓰게 된 작품이었다. 와우와의 통신수단은 무전기가 유일했는데 차가 전복될 때 무전기도 튀어나가 어느 모래에 박혀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다섯시가 지나면 사막엔 들개들이 설칠 것이었다. 무엇보다 기온이 떨어져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었다. 차는 너덜너덜해지고 통신은 두절되고 시간은 자꾸 지나 해가 지려고 하는 현실 속에서 오빠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썼다. 믿기지 않게도 아주 멀리서 농부가 운전하는 차량이 한대 나타났다고. 처음엔 점으로 보였던 농부의 차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며 오빠는 그 안에 예수님이 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농담을 했다. 태국인 기사와 오빠는 그 농부의 차를 얻어 타고 와우 경찰서로 갈 수 있었지만 나는 오빠의 편지 내용과는 반대로 썼다. 두 사람은 전복된 자동차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어느 쪽에서 왔는지 알 수 없게 된 사막에서 동전을 꺼내 앞이 나오면 이쪽, 뒤가 나오면 저쪽으로 가자고 정하는 것으로. 두 사람은 동전으로 다시 이동할 방향을 정하고 운전을 해갔는데 가도가도 똑같은 길이 펼쳐지는 것으로. 결국 도착지가 아니라 처음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오빠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꺼내는데 빗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느닷없이 웬 비람. 나는 방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빗소리가 물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비가 세차게 몰아쳤다. 나는 우산도 없이 외출한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신호가 오래 이어지는데도 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망연히 거친 비를 바라보다가 나는 손에 쥔 편지 한장을 펼쳐보았다.
아버지 전 상서
나는 검은 선이 쭉쭉 그어진 오래전의 편지지의 맨 위 두칸에 걸쳐서 쓰여 있는 “아버지 전 상서”라는 글씨를 가만 응시했다. 전 상서…… 오랜만에 읽어보는 단어다. 사라진 말이 여기 있네, 마음이 애잔해졌다. 오래전 트리폴리라는 도시에서 이 편지지를 꺼내놓고 “아버지 전 상서”라고 쓰고 있었을 오빠의 굽은 어깨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오빠는 편지지의 칸 두칸을 잡아 크게 글씨를 쓰고도 한 문장이 끝나면 아래 두 칸을 여유 있게 비워놓고 편지를 이어갔다.
그동안 무탈하셨는지요?
저는 그저께 이곳에 잘 도착했습니다.
비행시간이 스무시간이 걸렸습니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의 알래스카 공항에서 내려 세시간을 기다렸다가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출발했고 그곳에서 또 여섯시간을 기다려 이곳 트리폴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기다리는 시간 빼고 비행기 안에서만 총 스무시간을 있었군요.
제주도에 가는 비행기도 한번 안 타본 제가 비행기를 스무시간을 타고 이곳 북아프리카 까지 오게 되다니 제 인생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곳은 리비아이고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이 있는 곳은 트리폴리라는 도시입니다. 리비아니 트리폴리니 발음하시기도 힘드시지요? 우리나라하고는 전혀 다른 풍광을 지닌 나라입니다. 모래사막이 전 국토에 걸쳐 있습니다. 모래사막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보셔요, 아버지.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모래땅이 국토의 거의 전부인 나라랍니다. 농경지는 겨우 0.19%라고 하는군요.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상상도 안 되는 그런 곳이긴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여기 모래사막 속 깊은 곳에는 석유가 묻혀 있습니다.
점점 더 상상이 안 가시지요?
제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실 것 같아서 제가 도착한 이 나라에 대해 설명을 해드리고자 하는데 사실 아직 저도 잘 모르는 나라입니다. 이제 이곳에서 살게 되었으니 점차적으로 알게 되겠지요.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아버지께도 전해드리겠습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트리폴리는 한국으로 치면 서울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이 나라의 수도입니다.
생활도 단순하고 업무도 단순해서 서울에서 지낼 때와는 달리 시간적으로 여유 있게 지내게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 편지를 자주 쓰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멀리 떠나 있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한국에서도 아버지는 J읍에 저는 서울에 살고 있었지 않아요? 거기서 크게 달라진 게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어떨는지요? 제 근무지가 서울이 아니라 좀 멀어진 것뿐이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아니면 아버지. 이 세상 어딘가에 ‘리비아’라는 나라가 있고 거기 트리폴리라는 도시로 내 아들이 여행을 간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다, 이렇게 여기시면 어떨는지요? 제가 서울에 없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서울엔 여전히 아이들 엄마가 헌이와 셋째와 함께 있습니다. 저도 없는 집에 헌이와 셋째까지 아이들 엄마와 같이 지내는 게 걱정이 돼서 아내와도 상의했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집은 세를 내주고 친가에 가 있고 싶으면 그리 해도 된다고 했는데 아내는 며칠 생각을 해보더니 이대로 지내겠다고 하더군요. 결혼한 지도 꽤 되었는데 친가로 돌아가 지내는 것도 객쩍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저도 없는 집에 헌이와 셋째까지 떠나면 텅 비어서 외로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아빠도 떠나고 없는데 같이 살던 삼촌과 고모까지 없으면 공백이 클 거라고요. 사실 헌이와 셋째를 분가시킬 여유가 없는 게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르나 아내는 말은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집을 구하면서 제가 받을 수 있는 대출도 다 받아 쓴 상태라서요. 이런 말을 시시콜콜 아버지께 전하다니요. 아내와 아무런 상의도 없었을까 걱정하시는 것 같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어쨌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바라는 것은 제가 없더라도 부모님이 마음 편하게 지내시는 것입니다. 이곳은 먼 곳이지만 당분간 이곳이 제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제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할 테니 두분 부모님께서도 그곳에서 전과 다름없이 건강하게 지내주시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가득이지만 오늘은 이만 쓰겠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배송을 맡을 업무실에 지금 이 편지를 가져다줘야 내일 떠나는 비행기에 이 편지가 실릴 것입니다. 매주 이렇게 제가 편지를 쓰겠습니다. 아버지께선 답장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편지로 인해서 제가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시면 그것으로 만족입니다.
그럼 이만 총총……
1989년 4월
아들 올림
P.S. 아, 아버지.
이 나라 이름이 리비아라고 말씀드렸지요? ‘바다 중심’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저께 처음 만난 동료가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바다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근사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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