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3회

“그렇게 진구가 되었어요.” 그가 말했다. “드라마가 시작되었을 때 아홉살이었죠? 진구보다 한살이 많았네요. 촬영하면서 뭐가 가장 힘들었나요?” 사회자가 물었다. 반에서 키가 가장 작았던 형민은 다시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진구는 집에 있을 때면 늘 동생을 업고 있었어요. 동생을 업고 자장가를 불러주는 장면을 좋아하는 시청자들이 많았죠. 그런데 사실 전 동생을 업는 게 싫었어요.” 그가 말했다. “싫었다고요?” 사회자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되물었다. “싫은 게 아니라…… 뭐랄까, 그 장면을 찍을 때면 늘 숨이 막힐 것 같았어요.” 그는 사회자가 왼손으로 턱을 쓰다듬는 것을 쳐다보았다. 사회자가 더 물어주길 기다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실은, 어린 제가 업기에 동생이 너무 무거웠거든요.” 사회자가 웃었다. 그는 웃지 않았다. 민지는 자주 울었다. 극 중에서 자주 우는 아이였는데, 실은 드라마를 찍지 않을 때 더 자주 울었다. 진구가 업고 마당을 서성이면 민지는 울음을 그쳤다. 오빠 배고파. 민지는 코를 훌쩍이며 말하곤 했다. “막냇동생이 좀 통통하긴 했어요. 저 사진을 봐도.” 사회자가 고물상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가리켰다. 원래 또래보다 통통했던 막내는 드라마 촬영을 시작한 지 일년이 되어가자 그가 업을 수 없을 만큼 몸무게가 늘었다. 동생을 업을 때마다 포대기 끈이 가슴을 죄어왔다. 촬영하는 동안 한번도 빨지 않았던 포대기에서는 걸레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그는 속이 울렁거렸다. 한번은 그가 용기를 내어 동생을 업는 게 힘들다고 말했다가, 공동연출을 맡았던 박PD에게 벌써부터 배부른 소리를 한다며 혼나기도 했다. 진구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것을 알게 된 김PD가 박PD에게 소리를 질렀다. 촬영장 분위기는 며칠 동안 냉랭했다. 두 PD가 싸우고 며칠 뒤, 민지의 하차가 결정되었다. 드라마 작가와 민지의 어머니가 대판 싸웠다는 것이었다. 드라마 작가가 민지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에게 밥을 좀 덜 먹이라고 말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민지는 드라마 중간에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후로 민지를 다시 본 적은 있나요?” 사회자가 물었다. “아니요. 너무 어렸을 때니까 아마 절 기억도 못하겠죠.” 그가 말했다. “민지를 업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게 민지가 죽는 거였어요. 민지가 죽으니 촬영장에 가기 싫어졌죠. 아마 그때부터 저도 흥미를 잃은 것 같아요.” 사회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칭얼거릴 때는 귀찮은 존재였지만 막상 민지가 죽자 슬픔이 밀려왔다. 촬영 중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연기를 잘한다며 박수를 쳐주었다. 한번은 촬영 중 잠깐 잠이 들었는데, 정말로 민지가 죽는 꿈을 꾸기도 했다. 꿈속에서 죽은 민지는 진구의 동생인 민지가 아니라 부잣집의 외동딸 민지였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민지의 방이 꿈에서 나왔다. 레이스가 달린 커튼과 하얀색 책상이 있는 방이었다. 흑백이 아닌 컬러의 세계. 분홍색 시트가 깔린 침대에 누워서 민지는 죽어갔다. 민지가 숨을 멈추는 순간 그의 숨도 멈춰지는 것 같았다. 그는 비명을 질렀지만 어째서인지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발버둥을 쳤다. 그때 누군가 그의 손과 발을 주무르면서 말했다. 가위에 눌렸나봐. 눈을 떠보니 진구가 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집 아주머니가 보였다. 그후로 수십편의 드라마에서 가정부 역할을 하게 될 아주머니가 진구를 꼭 껴안아주었다. 그때 악몽을 꾸면서 어찌나 발버둥을 쳤는지 발뒤꿈치가 다 까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사회자는 계속 고개를 끄떡여주었다. 그러다 그의 말이 끝나자 스튜디오 왼쪽 벽의 대형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러면 그 민지가 어떻게 컸는지 보고 싶지 않으세요?”

스튜디오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이내 스크린에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진구가 골목을 뛰어가는 장면이었다. 화질은 좋지 않았다. 진구는 맨발이었다. 민지야. 민지야. 진구가 울며 골목길을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골목길에 주저앉더니 피가 나는 발바닥을 붙잡고 울었다. 그날 그는 유리 조각을 밟았다. 대본에는 없는 장면이었지만 PD는 방송에 내보냈다. 많은 시청자들이 진구가 울 때 같이 울었다. 그 장면을 찍은 후 진구는 며칠 동안 독감을 앓았다. 발에 붕대를 감고, 독감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드라마를 찍었다. 여동생은 죽고, 형은 퇴학을 당하고, 할아버지는 치매를 앓기 시작했다. 드라마 작가의 머릿속에는 육개월 방송에 딱 맞는 이야기가 있었다. 큰아이가 퇴학을 당해도 안 되고, 막내가 죽어서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드라마 작가는 치매를 앓던 할아버지가 길을 잃고 헤매는 장면을 쓰다가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아이들을 그냥 자라나게 두었어야 한다는 것을. 가난 그 자체가 상처였다는 것을. 다른 상처는 필요 없었다는 것을. 민지가 뚱뚱해지지만 않았다면 그 드라마는 몇년이고 계속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데뷔 삼십주년 기념 토크쇼에 나와서 말했다. 형구가 정신을 차려 고물상을 물려받고, 진구는 대학에 합격하고, 민지는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토크쇼를 본 뒤로 그 드라마 작가를 싫어하게 되었다. 다시는 그 작가의 작품을 보지 않았다.

흑백 화면이 멈추고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이층집이 나왔다. 흑백에서 컬러로 화면이 바뀌니 눈이 부셨다. 하늘은 파란색이고 집은 하얀색이고 마당은 초록색이었다. 세가지 색 크레파스로만 그린 그림 같았다. 너무 선명해서 가짜처럼 보였다. 초인종을 누르니 누군가 현관문을 열었다. 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민지였다. 극 중 이름도 민지고 진짜 이름도 민지인 민지. 정민지. 43세. 그는 민지의 이름과 나이를 중얼거려보았다. 민지는 열두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거기서 결혼한 후, 남편의 직장을 따라 삼 년 전에 캐나다로 옮겨 왔다고 했다. 볼은 여전히 통통했고, 웃을 때 눈이 반달이 되는 것도 똑같았다.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이 나지는 않아요. 그냥 추웠던 기억? 배고팠던 기억?” 그렇게 말하고 민지는 깔깔깔 웃었다. 십대 소녀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웃더니 화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민지의 뒤로 누군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남편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진구오빠 안녕하세요!” 민지가 말했다. 목소리도 십대 소녀 같았다. “기억은 안 나지만, 항상, 상냥했던 것 같아요. 저에게. 그런 기억이 희미하게 나요.” 민지를 업고 촬영을 하다보면 늘 등이 축축했다. 민지의 콧물이, 민지의 침이, 그의 등을 적셨다. 난 오빠 등이 좋아. 어린 민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 나는 민지가 등에 코를 박고 그 말을 하던 순간을 좋아했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화면 속의 민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민지에게 들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화면을 향해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