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아버지가 아버지를 잃던 날에 열네살 아버지는 논에 있었다고 한다.
샛터 연정리 논에서 쟁기를 갈고 있는데 무신 일로 아버지가 논을 갈고 있는 내 앞에 나타나서 논물 안으로 들어오시서는 쟁기 날을 그리 쓰면 안 된다며 새로 맞춰주고는 어깨를 눌러주더니 이런 시절엔 소와 쟁기를 지대로 다룰 줄 알어야 여그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이르더니 팔랑팔랑 손을 흔들믄서 금세 사라져야. 소를 귀히 여기라 당부함서 방금 여기 있던 분이 눈을 뜨고 본게 없어졌어야. 집에서도 격리돼야서 얼굴도 못 보고 지내는디 아버지가 이 논에 어찌 오싰나 싶은 것이 이상하고 마음이 쓰라려서 쟁기를 논물에 내려놓고는 집으로 달려갔더만 아버지가 코피를 천장까지 닿게 쭉 내뿜고는…… 그 병에 걸리더라도 닷새만 견디면 낫는다고들 했다. 닷새 전에 가마니에 덮여나가는 사람이 수두룩이었으나 나흘을 넘기셔서 인자는 살았고나 했는디 하루만 지나면 그 닷새가 되는 날이었는디 시간아 어서 지나거라 하고 있었는디 닷새째 되는 날에 그리 가시더라. 아버지가 돌아가싰는디 암것도 생각 안 나고 눈앞이 캄캄해짐서 나는 인자 어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싶어서 하늘아 땅아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 울었더니만 니 큰고모가 나를 품음서는 내가 어디도 안 가고 너랑 살랑게로 두려워도 말고 울지도 말라고 하던 소리가 지금도 남어 있네.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아버지 직업란에 농업이라고 적었으나 아버지는 모판에 모를 기를 때도 모내기를 할 때도 가뭄이 들어 수시로 삽을 들고 논에 물을 대러 나갈 때도 농부 같지 않고 무언지 서툴러 보였다. 어린 내 눈에 그렇게 보였던 것은 아버지가 다른 아버지들처럼 농사일에 집중하는 것 같지가 않아서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가게뿐 아니라 텃밭에 우사를 지어 소를 키우기도 하고 농사일이 없을 때는 엽총을 들고 새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어느 땐 돈을 벌러 가겠다며 한겨울씩 집을 떠나기도 했다. 아버지가 돈을 벌어왔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볍씨에 싹을 틔워야 할 때엔 돌아와서 모판에 볍씨를 앉혔다. 농사를 짓는 일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어 아버지가 안 해본 일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는데 어린 내 눈에는 한동안 아버지가 농부로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햇볕에 그을린 모습이 아니라 유난히 희어서였는지도. 산밭에서 고구마를 캐서 리어카에 싣고 내려오는 다른 아버지들처럼 탄탄한 다리를 가진 게 아니라 이따금 병석에 누워 지내서 그랬는지도. 어느 때엔 동네 사람들은 입지 않는 가죽잠바를 입고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오토바이를 타고 신작로를 내달려서 그랬는지도. 아버지에 대한 이런 인상의 조각조각들이 어린 나의 눈엔, 이웃의 다른 아버지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농사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 뭔가 다른 데 마음이 있는 분이다,로 각인되었다.
아버지의 일생은 J시의 그 집터에 집을 두번 허물고 다시 지었을 뿐 다른 곳에 집을 가져본 적이 없이 흘러갔다. 1933년, 아버지가 그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어디서든 1933년이라는 연도를 발견하면 잠깐 그 숫자에 시선을 멈추곤 했다.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한 해가 1933년이라는 것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1933년이면 일제 강점기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 엄혹한 시절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하기도 했구나, 생각되어 가슴이 뭉클해졌다가도 그때에 이미 미국에선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이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과 일체의 감상을 배제한 문체의 하드보일드문학을 선보이고 있던 때였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면 난감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뿐인가. 지금도 세련되고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달리나 피카소가 그때 이미 자신들의 작품세계를 견고하게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이 찾아들었다. 어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관심과 지원 아래 이 세계를 마음껏 표현하며 불멸의 이름으로 살다 가고 나의 아버지 같은 이들은 한국의 남쪽 J읍에서도 시골 쪽으로 한참 들어가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농가에서 태어나 학교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한 채 생존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로는 그 집을 떠나본 적이 없는 흙먼지 같은 일생을 살기도 하는 게 인간의 삶이기도 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때 어린 딸에게 외면당하기도 하면서.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J시의 다리가 떠오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다리 위에서 아버지를 외면했던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의 모습이.
집은 읍내에서 4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바람이 불면 먼지가 일고 걸을 때면 돌멩이가 발에 차이던 신작로를 십리를 걸어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길에 아스팔트를 깔고 돌아가는 길을 직선으로 만들어 지금은 시내와 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제법 반듯한 길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시내이지만 기억 속의 그 다리 위에서 아버지와 마주쳤을 때는 J읍이었으므로 읍내였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읍내의 이쪽과 저쪽이 이어졌다. 다리의 이름은 대흥리였다. 그 다리가 왜 그런 이름으로 불리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궁금해서 언젠가 다리의 서사를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어느 이야기 속에도 다리 이름이 왜 대흥리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다리가 놓여 있는 곳은 남산리지 대흥리도 아니었고 대흥리라는 지명이 J시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확인하게 된 건 대흥리 다리가 일제 강점기에 건설되었다는 게 사실이라는 것뿐. 어렸을 때 일본놈들이 지은 다리가 제일 튼튼하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다리 밑엔 집이 없는 사람들이 움막을 쳐놓고 살았는데 그 다리를 지나가다보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다 보였다. 그들은 다리 밑 하천 물에 고구마나 감자를 씻거나 솥을 걸어놓고 불을 때거나 하천에 똥을 누거나 더울 때는 옷을 벗고 하천으로 들어가 목욕을 했다. 추수가 끝날 무렵의 들판에서도 그들을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은 이미 수확을 거둔 감자밭을 뒤져 감자를 줍고 논에서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벼이삭을 주웠다. 어두워질 때 그들은 다리 밑에서 나와 하천가에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다리 위로 불 냄새가 올라왔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때는 한겨울이었다. 그들이 입을 수 있는 것들은 다 입고 걸칠 수 있는 것들은 다 걸치고 그 다리 밑에 바짝 붙어 겨울을 났기 때문에 한겨울엔 그들의 모습이 다리 위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봄이 오면 다리 밑에 오리나 병아리를 파는 장이 섰고 그들도 볕을 쬐러 하천가로 나왔다. 어느 해 봄에 다리 밑에서 겨우살이를 마치고 하천가로 나온 한 여자의 부른 배를 보았고 어느날엔 그 다리 밑에서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내가 J시를 떠날 무렵엔 하천 정비공사로 인해 그들이 살던 다리 밑이 평평해졌다. 그들은 더이상 그곳에 살지 않았다. 도시에서 터전을 옮기는 일로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을 뉴스로 볼 때면 그때 다리 밑의 그들이 어떻게 그곳을 떠났을지,가 궁금해지곤 했다. 다리 밑을 떠난 그들이 어디로들 갔을지가.
처음엔 J시의 긴 하천을 건너 읍내로 들어갈 수 있는 다리는 대흥리 다리뿐이었으나 나중에 하천의 위쪽 J시 고등학교 쪽으로 두개, 하천의 아래쪽 연지동과 기차역 쪽으로 두개의 다리가 건설되었다. 하천 정비공사를 했어도 폭우가 쏟아질 때면 하천에 물이 넘쳐서 다리 밑은 물 천지가 되곤 했다. 어느 땐 거칠게 흐르는 물이 다리 위로 솟아오를 지경이었다. 늦게 건설된 다리들은 그 폭우에 자주 침수되거나 무너지곤 했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다리가 끊어졌다,고들 했다. 봄비에 위쪽 다리가 끊어지면 여름장마엔 아래쪽 다리가 끊어졌다. 곤혹스럽게도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대흥리 다리만 어떤 비에도 건재했다. 누군가 J시의 대표 다리는 대흥리 다리라며 그 다리가 얼마나 튼튼한지에 대해 칭찬을 하면 또 누군가는 일본놈들이 아예 여기를 자기네 영토로 믿고 물러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증거라고 반박했다.
그 다리 위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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