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회
제대하고 지금까지 그가 모은 돈은 천만원이 좀 넘었다. 어머니, 아버지, 형,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당당하게 요구할 때마다 의무적으로 상납하듯 가져다 바치지 않았다면 그보다는 훨씬 많은 액수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입맛이 썼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나마 천만원도, 서울 바닥에 몸 붙이고 살면서 주거비를 한푼도 들이지 않아 모을 수 있는 액수였다. 그 점에 대해 민규는 자신이 운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끔은 자신이 평생 가진 모든 운을 여기 다 써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무서울 정도였다.
오랜만에 형이 연락을 해왔을 때 직감적으로 또 돈 문제인 줄을 알았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자 형은 메시지를 남겼다.
―급해서 그래. 세장만.
그는 읽고서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한장만,
한장이라는 것이 설마 천은 아닐 테니 백만원을 말하는 걸까. 당장 급히 그 정도의 가욋돈이 필요할 때 속수무책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자란 동네 사람들은 대개 그랬다. 그렇다고 그들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형도 마찬가지였다. 자라면서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번번이 이런저런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고는 했지만 얼마 전 여자를 만나 동거 비슷한 것을 시작하고 난 뒤부터는 그래도 제법 마음을 잡고 사는 눈치였다. 아는 사람의 가게에 나가 일을 배운다고 했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얼마를 버는지는 민규도 알지 못했다. 형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네 형수가 애가 생겼는데. 병원에 가야 해서. 면목 없는데 진짜 비빌 데가 없어서 그래.
애를 낳으러 간다는 것인지, 낳지 않기 위해 간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답장을 보내려다 전화기를 그냥 엎어두었다. 형이 이렇게 사는 것이 누구의 책임일까? 전적으로 형의 잘못만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형의 잘못이 아니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견딜 수 있었다.
지연이 사는 집은, 전형적인 원룸촌에 있었다. 오래된 주택가의 노후된 주택들을 허물고, 일조권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다닥다닥 붙여 지은 멋없는 건물들. 지연의 집은 지하 1층이었는데 지연은 연애 초반에는 민규를 여간해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지연의 마음을 알 것 같았기 때문에 민규는 더 조르지 않았다. 지연을 데려다주고 현관을 열고 안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서 돌아섰다. 그러나 그가 방 안의 불이 켜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쉽게 떠나지 못하고 근처에서 창문을 오래 지켜보다 돌아서는 것을 지연은 알지 못했다. 지연의 창문에는 굵은 쇠창살들이 제법 촘촘히 세워져 있었다. 안전을 위한 장치일 터였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이 상했다. 저 방 안에서 지연은 쇠창살로 가린 바깥 풍경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지연을 조금 더 환한 곳으로, 밝은 곳으로, 쇠창살 없는 곳으로 꺼내주고 싶었다. 민규는 그것을 지연도 원할 것이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그 무렵, 그가 골몰한 것은 오직, 같이 살자는 말을 그녀에게 하려면 필요한 무엇인가였다. 무엇인가는,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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