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31회

   겨울날 밤을 기억한다. 겨울이 되면 나흘씩 장설이 내려 쌓이는 J시였다. 나는 작가가 된 이후 이와 비슷한 문장을 수도 없이 썼다. 겨울이 되면 나흘씩 장설이 내리는 곳이 J시라고. 들판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철길로 도랑으로 밭을 넘어 마당으로 마루까지 들이닥쳤다. 문풍지가 흔들리는 소리에 한밤에 잠이 깨곤 했다. 눈발이 흩날리는 그림자가 방문에 어룽대서 이불 속에서 물끄러미 눈 그림자를 바라보던 겨울밤. 아랫목엔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은 아버지의 밥이 담요에 둘둘 말려 묻혀 있고 윗목엔 아버지의 밥상이 차려져 있던 그런 겨울밤. 엄마는 아버지가 밥을 비빌 때 참기름만 내주는 게 아니었다. 바람 불고 눈 내리는 겨울밤 마을 사랑방에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귀가가 늦는 아버지 밥상에만 구운 김을 내놓았다. 젊은 아버지. 술도 몇잔 마신 기분 좋은 아버지는 열린 대문으로 들어와 눈이 들이치는 토방에서 허리를 굽혀 눈을 맞고 있는 식구들의 흐트러진 신발들을 마루 밑으로 밀어넣고 마루까지 들이친 눈들을 쓸어내고 찬바람과 함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하느라 한밤에 다니느냐고 퉁명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어머니는 윗목에 차려놓은 밥상의 상보를 걷고 아랫목에 묻어놓은 밥그릇을 상 위에 올리고 기름을 발라 사각으로 자른 구운 김을 접시에 담아 아버지 밥그릇 옆에 놓았다. 고소한 김 냄새가 겨울밤의 방 안에 퍼지면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아버지 밥상 옆으로 하나둘 다가가서 빙 둘러앉았다. 어려서부터 장남이라고 어른 대접을 받아온 큰오빠만 어른이라 아버지 곁으로 오지 못하고 작은방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김 한장에 밥을 얹고 여며서 쪼로록 앉아 있는 우리들 입에 차례로 넣어주었다. 엄마가 아버지 밥도 못 먹게 성가시게 군다고 하면 아버지는 나는 밥 먹었네, 했다. 늦은 밤까지 바깥에 있으면서 저녁을 먹지 않았으리라고는 엄마도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늦은 겨울밤에 구운 김이 있는 밥상을 아버지 앞에 차려주었다.

 

   눈 내리는 겨울밤, 늦게 귀가한 아버지가 엄마가 내놓은 참기름을 발라 구운 김에 밥을 싸서 빙 둘러앉아 있는 우리들의 입에 차례로 넣어주는 일을 나는 여러번 글로 썼다. 그때그때마다 비유가 달랐겠지만 우리는 무슨 참나무 숲의 딱따구리 새끼들처럼 아버지가 싸준 김밥을 쏙쏙 받아먹었다고. 그때는 입안에 남아 있는 고소한 김의 여운을 느끼며 다시 내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릴 뿐이었으나 언젠가 어떤 인터뷰에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문득 그 겨울밤이 떠올랐고 아버지가 김에 싸준 밥을 받아먹었을 때 참 행복했다고, 대답했다. 큰오빠가 그 글이 실린 것을 패널로 만들어 내게도 보내주고 여기에도 가져와 작은방 책장 앞에 세워두었다. 아버지가 읽고는 그때 행복했냐?고 물었다.

   ―예, 아버지.

   아버지는 헛헛하게 웃었다. 내가 행복했다는 그때를 두고 아버지는 무서웠다고 했다. 젊은 날에 당신의 새끼들인 우리가 음식을 먹는 걸 보면 무서웠다고.

   ―무서우셨어요? 뭐가요?

   내가 의아해서 묻자 아버지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막막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설명이 되냐?

   아버지가 말을 거두려 하자 엄마가 옆에서 거들었다.

   ―너그들이 먹성이 얼매나 좋으냐. 양석 걱정 없이 살 게 된 지가 얼마나 되간? 오늘 저녁밥 먹음서 내일 끼니 걱정을 하며 살었는디. 밥 지을라고 광으로 쌀 푸러 갈 때마다 쌀독 바닥이 보이는 때도 있었는디. 그 가슴 철렁함을 누가 알겄냐. 쌀독은 점점 바닥을 보이는디 먹성 좋은 자식 여섯이 마구 달려들어봐라, 안 무서운가……

   아버지가 삼킨 말을 대신하는 동안 무거워진 생각을 털어내듯 엄마는 곧 생기를 되찾곤 했다.

   ―무섭기만 했시믄 어찌 매일을 살겄냐. 무섭기도 하고 살어갈 힘이 되기도 허고……

   엄마는 아버지에게 당신도 그랬지라오? 동의를 구하니 아버지는 말할 것 없제,라고 대답했다. 나는 말할 것 없다,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랬을까. 아버지도 엄마처럼 우리의 먹성이 무섭기만 한 게 아니라 힘이 되기도 했을까, 생기를 되찾는 엄마와는 반대로 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버지가 고백처럼 젊은 날에 우리들의 먹성이 무서웠다고 한 말은 내겐 충격이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아버지의 소년 시절을, 아버지의 청년 시절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전염병으로 이틀 사이로 부모를 잃은 마음을, 전쟁을 겪을 때의 마음을, 얼굴 한번 보고 엄마와 결혼하던 때의 마음을, 큰오빠가 태어났을 때의 아버지 마음은 어떤 것이었나를. 짐작이 되지 않았다. 형들을 잃고 종가의 장손이 되어 여태 살아온 아버지의 젊은 날들 또한 떠올리려 노력해봤으나 어려웠다. 어린 시절의 사진 한장 남아 있지 않은 게 아버지가 살아온 시간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뿐. 내가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고모의 말이나 엄마의 말 속에 깃들어 있던 아버지 일뿐이라는 것도.

 

   나는 아버지를 한번도 개별적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도 그때야 깨달았다. 아버지를 농부로, 전쟁을 겪은 세대로, 소를 기르는 사람으로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버릇이 들어서 개인 아버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게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아버지가 간혹 조부를 원망하며 학교에나 보내주실 일이지, 했던 혼잣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자식들이 하나둘 학교에 가고 다시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마침내는 대학을 다니기 위해 집을 떠날 때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지.

 

   두렵고 무섭지 않은 날이 단 하루라도 있었을는지.

 

   나는 폐가의 거미줄투성이의 방에서 발견한 나무궤짝 안의 묵은 편지들을 읽으며 갑자기 또 깨달았다. 내가 평소에 나의 아버지에게서, 보통 아버지라고 할 때 으레 따라붙는 가부장적인 억압을 느끼지 않고 엄마보다 아버지를 다정히 여기며 살아온 것은 아버지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것을. 무섭고 두려운 게 많은 아버지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과 대적해왔다는 것도. 아버지가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말할 것이 없제,였다. 말할 것이 없다…… 아버지는 기쁜 일이 생겨 그걸 표현할 때도 말할 것이 없제,라고 했고, 고통스러운 일이 발생할 때도 말할 것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말수가 점점 더 줄어들다가 언젠가부터 말할 것 없제,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할 것도 없다는 말조차 하지 않을 때는 곁에 엄마가 아버지 마음인 것처럼 대답을 대신했다. 그게 말이다, 사실은…… 하면서.

 

   승엽이 보거라

 

   이곳은 겨울이 와따.

   너가 있는 고슨 일년 내내 여름뿐이라니 눈 내리는 거슨 못 보겟구나.

 

   그 나라에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는 사막이 있다고 하더라. 죽음의 땅이라고 부를 때는 그럴 이유가 잇것지.

   나는 오늘에사 알앗다.

   사하라사막 기픈 곳에서 거대한 호수가 발견되어서 그 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대수로 공사를 하러 한국 사람들이 거기로 일하러 갓다는 거슬 말이다.

   사막에 일만년 전부터 고여 있던 물이라니 상상이 안 되는구나. 어마어마하겠구나. 그 지하 호수를 상상을 해보려다 실패햇으나 벅찬 일이다. 그 호수에서 물을 끄러올리면 사막이 농토가 되는 것이냐? 그 나라 땅은 대부분 사막이라고 햇는데 대수로 공사가 성공하게 되먼 그 넓은 땅이 모두 농토가 되느냐?

   이 세상 어딘가에서는 그런 대공사가 버러지고 잇다는 것이 신기하다.

 

   나는 이 마을에서 나서 여기서만 사럿다.

   절믄 날에는 만이 여기저기 다녓는데 다른 살길을 차자다니는 거여서 여유가 업어서 내가 어디를 다녓던 거신지 남어 잇는 기억이 업다

   서울을 처음 갓을 때는 마음에 나머 잇다. 안 이친다.

   여그서는 먹고 살기나 하지 너희들 학교를 끄까지 보낼 수는 업것다 시퍼서 어쩌든 서울이란 고세 가보자 마음먹엇네. 너그들이 생기니까 굶지 안고 사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럿제. 돈도 사라미 만이 모이는 곳에 잇는 법이다 시퍼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슬 그저 밤기차를 타고 갓다. 나 한 사람 일할 자리가 업것나 햇지. 아무려나 농사짓는 것보다 나슬 것이다 그거만 생각하고 갓다.

 

   60년도엿다. 그해 사월에 셋째가 나왓는디 갓난애 눈이 뭔 그리 또릿또릿 햇나 몰라. 셋째는 낫슬 때부터 그랫다. 이제 태어난 애기가 사흘 되나 시픈 날에 바로 눈을 뜨고 나를 보는데 까맣고 또릿한 눈이 나를 보는데 가슴이 덜컥하더라. 동네 친구들보다 내가 혼인이 빨럿다. 돌아보니 서른도 되기 전에 나는 벌서 아들을 셋이나 얻엇서야. 헌이 나기 전엔 아들놈만 셋이라 너그드를 아페 두면 겁이 덜컥 낫다. 학교도 지대로 안 댕긴 내가 이 아이들을 어찌 바로 키워내나 시퍼서 밤에 자다가도 가스미 눌리는 거 가터 벌떡 일어나 안곤 햇다.

 

   돈을 버러야 한다. 돈이 흔한 고스로 가자 생각햇다. 어찌던지 내가 집을 떠나 머슬 해서든지 돈을 가져와야겟다 생갓햇따. 나 업슬 때를 생각히서 지붕을 고치고 변소칸의 똥을 퍼내고 뜨더진 마룻장을 덧달고 햇다.

   내 마음을 니가 아럿는지 니가 나를 종종 따라다녓다.

   아버지, 아버지 부르면서. 지금도 생각나는구나. 철길 여프 논둑의 풀을 비고 잇는디 학교에 다녀온 니가 책보를 멘 채로 아버지, 아버지 부름서 뛰어와서는 내 품을 들이밧듯이 숨을 내뿌므며 파고드러서 뭔 일이 잇냐고 물으니 너는 숨이 차서 헐떡임서 아버지 여그 잇엇네 너는 환하게 웃엇다. 숨이 가라안은 뒤에 내게서 떠러져 베어놓은 풀 위에 털썩 주저안즈며 니가 나에게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햇다.

   너는 내 마음을 다 알고 잇엇다. 너는 아버지만 여페 잇으면 공부를 잘하겟다고 햇다 둘째에게도 산수도 가르키겟다고도 햇다. 요새는 학교에 가도 공부가 안 된다고 햇다. 아버지가 어디로 가버렷을 거 가타 자꾸 창밖만 보게 된다고 햇다. 집에 아버지가 업스면 잠이 안 온다고 햇다. 너랑 나는 논둑에 안저서 철길로 달려가는 기차를 봣다. 너는 어서 커서 검사가 되겟다고도 햇다. 엄마하고도 약속햇다고.

 

   너는 처음부터 그랫다.

   더 어렷을 때부터 내가 어디 갓다가 오면 한사코 내 여페 붙어다녓다. 니가 처음 나를 향해 아……바 하고 불럿을 때가 생각난다. 친구들은 아무도 혼인도 안 햇을 때다. 나만 일찍 혼인을 해서 나를 아……바라고 부르는 너가 생깃다. 첨에는 그거시 어색햇다. 친구들은 훌훌 자유로와서 어디라도 쉽게 가고 놀고 하는데 너가 생기고는 그것이 어려워따. 친구들하고 어울리려고 꼬무락거리는 손가락으로 내 옷자락를 붓잡는 너를 떼어노코 대문을 나서면 너는 아……바, 아빠…… 부르다가 소리 내 울곤 햇다. 좀 자라더니 너는 아빠, 아빠 부르며 어디든지 나를 따라다녓다. 걸음도 못 걸을 때 내가 마루에 안자 있으면 니가 방에서 뽁뽁 기어서 내 여프로 왓고 걷게 되어서는 토방을 아장거리며 내려와서 종종걸음으로 거름을 퍼내는 내 여프로 와서 아빠, 하고 불럿다. 안자 놀먼서도 아빠 부르고 넘어지면서도 아빠 불럿다. 걸음을 떼면서부터는 방에서든 어디서든 내가 일어나기만 하먼 너는 아빠 아빠…… 하고 나를 따라부텃다. 친구들이 냇가에서 기다리고 잇는데 너는 내 손을 붓잡고 일어서려 하고 옷자락을 붓잡고 걸으려 하고 내 팔과 종아리를 붓잡고 함께 나서려고 햇다. 기어이 너를 떼노코 혼자 친구들을 만나 다리 밑으로 읍내로 나갓다. 니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니까 조키도 하고 귀찬기도 햇다. 너를 떨치고 나오면 어디에 잇으나 아빠 아빠 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서 뒤도 도라보고 저 멀리도 보고 그랫다. 영 마음이 편치 안터라. 친구들을 두고 다시 너를 보려고 집으로 가곤 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