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34회

 

   니가 학교에 간 사이에 집을 나왓다.

   니 얼굴을 보며는 떠날 수가 업을 테니까.  

 

   밤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렷다. 9시쯤 기차를 탓는데 서울에 도착하니 새벽이엇다. 너의 대학 졸업식이 있었을 때 니가 내게 서울은 처음이냐고 물엇는디 내가 대답을 모탄 거슨 절믄 날에 서울에 와본 적이 잇어서엿다. 여태 그때의 일을 누구에게도 말을 안 햇다.

 

   서울역에 내려 변소에 갓는데 깜짝 놀랏다. 거지들이 변소에서 신문지를 깔아놓고 자고 잇더라. 저절로 고개를 돌리게 햇다. 코를 막을 만큼 오물 냄새가 낫다. 서울은 다를 줄 알앗는데 J시의 다리 밑에서 사는 사람들 가튼 행색이 서울역에 가득이엇다. 대합실 의자에도 신문을 덥고 자는 사람들이 빼곡햇다. 역겨움을 참으며 소변을 보고 역 바깥트로 나오니까 그 새벽에 상이군인이 잘린 다리를 내놓고 구걸을 하고 잇더라. 서울에 실망햇다. 가난을 털어낼 수 이쓰까 하고 왓는데 그날 새벽 서울은 더 초라하고 아수라장으로 보엿다. 서울역 광장에 넋을 빼고 서 잇으니 날이 발가오더라. 어렴풋한 빛 속에 말로만 듣던 시계탑이 보이고 그 뒤로 남산이 훤하게 보엿다. 그나마 건너건너 남산을 보니 숨통이 좀 트엿다. 타이어가 달린 리어카를 끌고 짐 나르는 사람드를 유시미 봣다. 나도 일자리를 구해야 햇으니까. 채소며 뭐며를 어찌나 만이 실엇는지 리어카가 뒤로 너머갈라니까 아페서 손잡이를 힘껏 누르는 사람이 잇어서 가치 힘써주기도 햇다. 서울역 광장에 자전거 탄 사람들이 휙휙 지나가는 걸 보며 첨에는 서울도 별거 아니네 생각도 햇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의 짐을 받아서 지게에 실는 사람들도 보엿다. 지겟꾼은 유심히 봐두엇다. 내가 지겟꾼이 될지도 모르니까.

 

   나중에 니가 입사한 회사가 서울역 아페 높이 소사 있어서 남산이 안 보이더구나. 그 빌딩이 생기기 전이엇는갑다.

 

   부부로 보이는 여자와 남자가 리어카를 세워노코 네모난 빵에 계란 물을 이펴서 구워 팔고 잇더라. 무언가가 썩는 냄새가 진동하기는 마찬가지엿어. 그러메도 저 사람드른 저거를 만드러 팔아 하루에 얼마나 버는지 궁금햇따. 배가 고팟지만 참엇다. 얼마간의 돈이야 갖고 잇엇지만 하루에 얼마라도 벌지 안고는 돈을 쓰지 안기로 햇다. 그것마니 살길이라 여겨졋다.

 

   사람 만은 곳에는 뭐든 할 일이 있는 거니까 나 한 사람 일할 데가 업겟나 시픈 배짱이엇는데 막상 아는 사람 한 사람 업는 곳에 서게 되니 한걸음 내딛는 것도 불안허더라.

 

   첫날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햇다. 서울역에서 길을 건너서 아래로 내려와 걸엇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가 명동이엇고 남대문 시장통이엇어. 건물보다 사람들이 더 만엇다. 장사하는 사람도 만엇지만 거지며 몰려다니는 아이들이며 주저안자 있는 상이군인이 여기저기에 가득이엇다. 그들 눈에 나라고 달랏것냐. 그 사람들 속에 끼어서 종일 여기저기 걸어다니다가 좌판을 차려노코 콩물에 우무가사리를 넣어서 파는 집에 드러가서 한그릇 먹고는 돈이 없으니 무엇이라도 시키면 그거슬 해주것다고 했다. 돈을 못 번 날은 돈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엇으니까. 여기서 버티려면 어쩌든 말을 해서 아는 사람을 만들어두는 게 가장 먼저 할 일 같앗다. 그것이 나로서는 가장 힘든 일이엇다. 주인이 보더니 시골서 왓냐고 물어서 그러타고 햇더니 세상이 어지러우니 이런 때는 시골에서 조용히 사는 게 몸이라도 보전하는 일이라면서 여하튼 우리 집에선 할 일이 업으니 뭐라도 해볼라며는 저기로 가보라며 손짓을 해서 그곳으로 가보니 시장 안 깊숙이에 잇는 백반집이엇다. 백반집 간판에 J읍이 부터 잇엇다 시장 사람들이 밥 먹을 때인지 비좁은 구석까지 사람들이 가득이라 일단은 드러가서 반찬드를 식탁에 나르고 분주히 움직엿더니 바쁜 때라 주인이 누구냐고 묻지도 안고 버려둬서 그 집 문 닫을 때까지 일햇다. 나중에서야 어디서 왓냐 무럿다. J읍에서 왓다 하니 주인이 간판을 보고 내가 임기웅변으로 둘러대는 줄 알앗는지 귓등으로 듣더니 내가 정말이라고 깨따리에서 왓다고 하니 깨따리? 하고 묻더라. 우리 동네를 깨따리라고들 불럿다. 깨따리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만이 통하는 이름이라 백반집 주인은 그제사 믿는 눈치엿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드른 타지에서 다 외롭다.

   백반집 주인은 엄밀히 말하자면 고향이 J시도 아닌데도 내가 J시에서 왓다 하니 반가운 손님이 온 듯이 잘 데는 잇는가 묻더라. 젊은 날에 차천자를 차자서 여기 입암으로 드러가 집을 짓고 사랐는데 차천자가 죽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 J읍을 떠나왓다고 하더라. 입암으로 드러갈 때와는 달리 빈손이 되어서 처음에는 패거리들과 함께 여기저기로 뭉쳐다니다가 회의가 생기서 빠져나와 남대문으로 드러오게 되엇다고 햇다. 처음에는 장사가 안 되엇는데 J읍에서 햇감자 나올 때 감자를 캐서 밑에 깔고 위에 갈치를 얹고 조림을 해 먹었던 생각이 나서 그걸 새 메뉴로 내놓았는데 터졋다고, 차천자 때문이엇지만 결국 J읍에 드러가 살엇던 때 그곳 사람들이 만들어 먹은 갈치조림이 터져서 딸을 대학에도 보낼 수 있게 되엇다고 하더라.

   햇감자 넣고 만든 갈치조림 너도 좋아하니까 알것네.

   원래는 무를 썰어서 쓰는 거신데 햇감자 나올 무렵에는 무가 귀하니까 무 대신 감자를 쓴 것인데 그 갈치조림을 먼저는 시장 사람드리 점심때먼 찾더니 또 다른 사람 데리고 오더니 자꾸만 그러케 늘더니 나중에는 줄을 서야 될 정도가 되엇다고 하더라.

   서울에 종각이라는 곳이 잇고 그곳에 조계사라는 큰 절이 잇는데 나중에 거기 가보자고도 햇다. 입암에 세워진 보천교 본소 십일전 건물이 헐리고 나서 그 건축 재료들로 조계사를 지엇다고. 십일전 건물을 지을 때 그 목재들은 백두산에서 가져온 거신데 아냐고 무러서 드른 적은 잇다 햇다. 그는 나를 갈치조림 식당의 의자들을 부쳐놓고 자게 해주엇다. 그게 내가 서울에서 보낸 첫 밤이다.

 

   자다가 갈치조림 냄새 때문에 깻다. 쉴 새 업시 갈치조림을 만드니까 장사를 안 할 때도 식당 어디에고 갈치조림 냄새가 배어 잇엇다. 다시 잠을 잘 수가 업엇다. 가게 바까트로 나가봣다. 새벽인데도 시장통은 불이 환하고 사람드른 바삐 오가서 내 걸음도 괜히 빨라졋다. 그 새벽에도 넝마주이는 종이들을 줍고 구두닥이들은 구두를 닥고 신문팔이들도 열심히 뛰어가더라. 지겟꾼들 지게에 배추나 포목점 비단이 실려 잇고 휘황하더라. 바삐 움직이는 사람드를 보니 나도 열시미 살어봐야겟다는 마음이 생겻다. 내가 지금은 무직이나 이제 여그서 일자리를 얻어 열심히 돈을 벌어서 다른 거슨 몰라도 내 자식들 대학 공부까지는 시킬 수 잇겟다는 자신감이 생겻다.

 

   자신감이 생겼다고 쓴 아버지는 서울에 도착한 지 두달 만에 다시 서울역에서 J시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아버지는 큰오빠에게 쓰고 있었다. J시로 다시 돌아오는 선택을 후회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훗날 큰오빠를 혼자 서울에 보낸 다음이었다고. 시위대가 대통령의 동상을 끌어내려 새끼줄에 묵어서 거리를 끌고 다니는 것을 봤어도, 다시 전쟁이 터진 것 같았어도, 견딜 수 있었는데,라고 아버지는 쓰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의 행간을 살펴보았다. 다시 전쟁이 난 것 같은 서울까지도 견딜 수 있었다는 아버지를 더이상 견딜 수 없게 한 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었으나 쓰여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때 무엇을 보았든 어떤 마음이었든 용기를 내고 자신을 지켜서 서울에 기반을 마련했더라면 큰오빠가 나중에 서울에 가서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만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