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36회

오후 세시가 넘었는데도 박대리는 줄넘기를 하러 가지 않았다. 형민은 화장실에 갔다가 금이 간 세면대 거울에 누군가 하트 모양의 스티커를 붙여놓은 것을 보았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거울 하나 바로 갈아주지 않는 회사가 쪼잔하다며 속으로 비웃었는데, 하트 모양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트 모양의 스티커를 보았기 때문인지 화장실을 나오면서 형민은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복도에서 마주친 직원이 좋은 일 있느냐고 묻는 바람에 콧노래를 흥얼거린다는 것을 알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형민은 박대리에게 줄넘기를 빌려달라고 했다. “이상하게 졸리네. 줄넘기를 하면 잠이 달아날까 하고.” 형민이 말했다. 박대리가 줄넘기를 빌려주면서 말했다. “이거 하고 나면 피곤해서 더 조는 거 아니에요?”

옥상에 올라와보니 담배를 피우는 직원들이 보였다. 형민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벤치에 앉아서 기다렸다. 왠지 누군가 앞에서 줄넘기를 하기는 창피했다. 형민은 어려운 일이 닥칠 때면 어린 시절에 했던 짝짓기 게임을 떠올려보곤 했다. 형민은 그 게임이 싫었다. 아니 싫었다기보다는 무서웠다. 동그랗게 모여 담배를 피우는 네명의 남자들을 보면서 형민은 속으로 ‘셋’이라고 중얼거려보았다. 그리고 넷 중 무리에 끼지 못할 한 사람을 가늠해보았다. 누구를 밀어낼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넷이 동시에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담뱃불을 끄고 내려갔다. 그제야 형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줄넘기를 했다. 열번도 넘지 못하고 계속 발에 걸렸다. 금방 숨이 찼다. “어디 그렇게 해서 잠 달아나겠어요?” 박대리가 양손에 컵을 들고 서 있었다. “앞으로 백번만 더 넘으면 커피 드릴게요.” 박대리가 벤치에 앉으면서 말했다. “아이스야?” 형민이 묻자 박대리가 하나는 아이스커피고 하나는 따뜻한 커피라고 말했다. “골라 드시라고요.” 형민은 얼음이 다 녹기 전에 마시겠다며 줄넘기를 시작했다. 처음은 열두번. 그 다음은 세번. 세번만에 발이 걸리니 박대리가 웃었다. 다음에는 이를 악물고 줄을 넘었고 그래서 스물세번을 넘었다. 최고 기록이었다. 그 다음은 열한번. 열다섯번. 다시는 스무번을 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곱번 도전해서 겨우 백개를 넘었다. 숨을 헐떡이며 형민은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맛있다고 칭찬하자 박대리가 줄넘기를 백번 하면 시원한 물은 다 맛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줄넘기를 천번 하면 맛없는 음식이 없다고 덧붙였다. 나중에 늙어서 입맛 없어지면 그때 도전해보겠다고 했더니 박대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땐 줄넘기하다 무릎 나가요. 아니, 천번 하다간 죽을 수도 있어요. 참, 내일 딸하고 저녁 먹어요?” 박대리가 물었다. 형민은 이번 토요일에 먹기로 했다고 말했다. “제 생일이 원래 2월 29일인 거 알죠?” 박대리가 말했다. “그럼, 알지.” 형민은 말했다. 박대리가 입사한 다음 해가 2월 29일이 있는 윤달이었는데, 그때 박대리가 진짜 자기 생일이라고 고백을 해서 생일 파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박대리는 29일 오후 11시 55분에 태어났다. 그래서 부모님은 출생신고를 3월 1일에 했고 생일도 3월 1일이 되었다. “사실 저는 태어나지 못할 뻔했어요. 제가 다섯번째 아들이었거든요.” 박대리의 어머니는 연년생으로 아들 넷을 키우면서 남자라면 징글징글하다는 생각에 우울증에 걸렸다. 밥을 먹을 때 달걀프라이를 먼저 먹으려고 싸우는 형제들을 보면서 그중 두명은 엄마 볼에 뽀뽀를 해주는 딸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넷째는 딸인 줄 알고 낳았다. 태몽도 그렇고 배 모양도 그렇고 의사도 딸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들을 낳았고, 너무 상심한 나머지 우는 아이를 윗목에 두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넷째형 성격이 까칠해요. 엄마한테도 제일 못되게 굴고요. 암튼, 그래서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만 제가 생긴 거예요. 실수로.” 박대리의 어머니는 혹시 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달을 기다렸다. 의사가 아들이라고 하면 그때 지우리라 생각하면서. 14주가 되었을 때 의사에게 물으니 의사가 아직 모르겠다고 했다. 2주를 기다렸다가 다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태아 성별을 말해주는 것은 불법이라며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럼 그 전에는 왜 말해줬어요? 박대리의 어머니가 항의하자 의사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박대리의 어머니는 병원을 옮기겠다고 화를 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둘째가 립스틱으로 벽에 낙서를 해놓았다. 그래서 아이 엉덩이를 때렸다. 한 아이가 울자 나머지 아이들이 따라 울었고 박대리 어머니도 같이 울었다. 엄마가 울자 아이들이 울음을 그쳤다. 울면서 박대리 어머니는 의사가 한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딸이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아들이라고 말하면 아이를 지울까봐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아이를 지우자. 박대리 어머니는 그렇게 결심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탁기를 세번 돌려가며 빨래를 했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밑반찬들을 만들었다. 정육점에 가서 한우 양지를 사왔다. 미역국을 한 솥 끓이면서 박대리 어머니는 딸이 태어났을 때를 위해 지어둔 이름을 중얼거려보았다. 박은영. 딸을 낳으면 동그라미가 많은 이름을 짓고 싶었다. 처녀 때부터 소원이었다. 아이들을 옆집에 부탁하고 병원으로 가던 길에 박대리의 어머니는 길에서 넘어진 아이를 보았다. 유치원 원복을 입고 있는 아이였다. 박대리 어머니가 아이를 일으켜 세우면서 괜찮냐고 물었다. 아이가 괜찮다고 대답했다. 무릎에서 피가 나오고 있었다. 피를 보고도 울지 않던 아이가 바닥에 떨어진 뭉개진 케이크 조각을 보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엄마 생일이라 용돈을 모아 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박대리 어머니는 옷소매 끝자락으로 우는 아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아이의 유치원 가방에 박은영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아줌마. 왜 울어요? 아이가 물었다. 박대리 어머니는 아이에게 말했다. 니가 너무 예뻐서. “그날 엄마는 그 아이에게 케이크를 사주었대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미역국에 밥을 한그릇 말아 먹었대요. 건강해야 다섯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박대리가 커피를 다 마신 다음에 줄넘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형민의 앞에 서서 줄넘기를 했다. 보란 듯이 한번에 백개를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