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36회

   편지를 읽다보니 별것을 다 기억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빠네, 싶었다.

 

   아버지는 마을 끝의 가게를 접은 후 농한기가 되면 이따금 집을 비우곤 했다. 고모는 아버지가 집을 나가면 엄마에게, 전쟁 때 처음엔 병역기피자로 나중엔 산사람들에게서 소를 지키기 위해 여기저기로 몸을 피해 다니느라 집을 떠나 있는 일이 몸에 남아 그러는 것이라 했고 엄마는 우리에게 아버지는 돈을 벌러 간 것이라고 했다. 엄마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집을 나갔다 들어오는 아버지가 빈손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 손엔 양과자나 새 자전거가 들려 있었다. 새 자전거는 언제나 큰오빠에게 갔다. 그때껏 큰오빠가 타던 자전거는 둘째에게, 둘째가 타던 것은 셋째에게…… 차례로 물려졌다. 넷째인 나에게 올 때쯤이면 자전거는 이미 거의 고물 상태였다. 바퀴에 펑크 난 자리를 자전거포에서 때운 자국이 얼룩처럼 보였다. 누더기가 된 타이어가 달린 자전거였으나 온전히 내 소유의 자전거가 생겼을 때 누린 그때의 기쁨. 그렇게 J시의 우리 집 마당에 아버지 것을 포함해 자전거 일곱대가 세워져 있던 때가 있었다. 가족 중에 유일하게 자전거를 못 타는 엄마의 자전거만 없었다.

 

   나에게 자전거 타기를 가르친 건 둘째오빠였다.

   아버지는 둘째오빠에게 헌이가 자전거를 탈 수 있게 해주라고 했다. 혼자 자전거를 탈 수 있을 때까지 뒤에서 잘 잡아주라고. 그때껏 마을에서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없는 둘째오빠는 헌이가 자전거를 타요? 아버지에게 물었다. 배워둬야지, 중학교 댕길라믄.

   ―여중 교복이 치마인데, 아버지?

   둘째오빠 말에 아버지는 잠깐 고갤 갸웃하더니 여하튼 자전거는 탈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다리가 짧은 내가 토방에 올라가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를 걸치면 둘째오빠는 자전거 뒷바퀴 사이에 서서 뒤에 달린 자전거 의자를 양손으로 잡고 자! 출발! 신호를 주었다. 나는 출발하지 못하고 곧 넘어졌다. 얼마나 넘어지고 넘어졌는지 지금도 넘어질 때의 감각이 남아 있을 지경이다. 왼쪽 무릎이 깨져서 나을 만하면 오른쪽이 깨지고 발목이 찢겼다. 양쪽 무릎이 동시에 깨져서 고름을 달고 다니기도 했다. 내 실력은 늘지 않았다. 잡아주는 걸 놓기만 하면 나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둘째오빠가 내게 자전거 타기를 가르치는 걸 포기하며 했던 말.

   ―아버지, 헌이는 자전거 못 타. 운동신경이 아예 없어요.

   물끄러미 나를 보던 아버지는 겁을 내는 나에게 한번만 배워두면 어른이 돼도 계속 탈 수 있는 게 자전거라고 했다. 그러니 얼마나 든든하고 좋으냐고. 아버지는 발 한쪽만 페달에 올리라고 했다. 다른 발은 땅에 두고 있다가 중심이 잡히기 전에 넘어지려고 하면 얼른 땅을 짚으면 된다고. 별것 아니라고, 중심만 제대로 잡으면 된다고. 아버지는 처음에 자전거 위에 있는 내 몸을 잡고 마당을 한바퀴 빙 돌았다. 내가 웃으니 아버지가 재밌냐? 물었다. 내가 고갤 끄덕이자 아버지는 넘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재밌게 여기면 금방 탈 수 있다고 했다. 넘어지려고 해도 뒤에서 아버지가 꽉 붙잡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넘어질 때는 자전거가 넘어지는 쪽으로 기울여서 그쪽 발이 먼저 땅에 닿게 하면 무릎 다칠 일도 없고 자전거도 땅에 고꾸라지지 않는다고. 내가 자꾸 넘어지자 아버지는 자전거 안장이 높아서이지 니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세상이 발달해가고 있으니 언젠가는 안장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자전거가 나올 것이라고도. 뒤에서 잡고 있으니까 안심하고 페달을 굴려보라는 아버지 말을 들으며 양발로 페달을 굴렸다.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가고 바람이 얼굴에 일렁거렸다. 나는 아버지가 자전거에서 손을 놓은 것도 모른 채 페달을 굴려 마당을 돌았다. 마당을 돌자 뒤에 있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출발 지점에 서 있었다. 아버지가 두 손을 허공에 쳐들고 흔들었다. 내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버지와 나는 집을 나와 다리 위로 자전거를 타러 갔다. 앞이 탁 트인 다리 위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자 자전거가 앞으로 쑥 나아갔다. 페달을 밟은 발에 더 힘을 주자 속도가 붙었다. 아버지는 내가 자전거를 혼자 타게 되자 옆에서 속도에 맞춰 뛰어주었다. 그날 아버지는 다리 위를 스무번도 넘게 뛰었을 것이다. 아버지 말대로 한번 배운 자전거 타기는 잊히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어 나는 자전거를 타고 읍내의 학교를 다녔고 지금도 어디서나 자전거를 보게 되면 잠깐이라도 자전거 위로 올라가 페달을 밟아본다. 이년씩 삼년씩 자전거를 타지 않았어도 페달을 밟으면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간다.

 

   아버지가 돌아온 깊은 밤엔 엄마와 두런두런 나누는 얘기가 잠결에 들리곤 했다. 어머니가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군산에서 배를 타고 장항으로 들어가 거기 용광로 일을 봐줬다고 했고 어느해인가는 고모네 옆집 사는 하철이 청년이랑 태백에서 한 계절을 나고 돌아오기도 했다.

 

 

   승엽이 보거라

 

   휴가 나왓다가 다시 드러가는 길이 얼마나 머럿느냐.

   일손이 자피지 안았겟구나.

 

   아이들을 두고 다시 비행기를 타면서 니가 무슨 생각을 햇스까.

   오래전 생각이 난다.

   어느해인가 광주 우시장에서 소를 팔고 사는 일을 중재해주는 일을 한 적이 잇다. 몇달을 그러고 지내다가 집에 왓더니 중학생이 된 니가 교복을 반듯하게 입고 교모를 쓰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들어왓다. 너를 보는데 가슴이 뿌듯햇따.

   이 아가 언제 이르케 컷나.

   키가 나만 한 것이 든든하면서도 이제는 집에 잇어야겟구나 싶엇다.

   너를 데리고 읍내 목욕탕에 처음 가던 일이 생각난다.

   내 등을 쓱쓱 밀어주던 네 손힘이 쎄서 그것이 조음서도 인자는 매사에 조심하며 살어야겟다고 다짐햇다.

   저리 큰 아들을 둔 아비 노릇이 뭣인지 아득하고 그랫다.

 

   아이드를 두고 그 먼 나라로 다시 떠나는 마음이 무거웟을 거시다.

   이런 때에도 힘이 되주지 모태 미안하구나.

   한번 보면 애타는 마음이 주러들지 아럿더니 보고 나니 또 보고 싶고 그러타.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업다.

 

   하늘 아래 니가 건강하면 그뿐이다.

 

   아. 그리고 승엽아.

   니가 지난번에 백반집 딸 이름이 ‘다래’냐고 물엇는데 대답을 못햇구나.

   그때는 그 집 딸 이름자를 몰랏다. 급하니까 니 엄마 이름이 튀어나온 거시다. 다래라는 니 엄마 이름을 적어보는 게 언젯적 일인지 모르겟구나. 니 외삼촌 이름은 머루엿다.

   백반집 딸 이름을 나중에 알앗는데 ‘순옥’이엇다. 김순옥. 나중에 그 사람도 묻더만. ‘다래’가 누구냐고.

 

   다 지나간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업다.

   하늘 아래 니가 건강하면 그뿐이다.

 

   1991년 1월 19일

   아버지가.

 

   아버지가 쓴 편지 중에 가장 짧은 것은 나에 관한 것이었다. 다급한 마음이었는지 오빠의 안부조차 묻지 않고 있었다.

 

   승엽이 보아라.

 

   한가지 무러볼 것이 잇다.

   헌이가 담배를 피우느냐?

   낮에 뒤꼍의 토란밭 아페서 헌이가 담배를 피우고 잇는 거슬 봣다. 놀란 가슴이 지금도 띤다. 내가 잘못 본 거시엇으면 조겟다.

   어찌야 할지를 모르것다. 우서는 안 본 것으로 햇다.

 

   헌이 담배 피우는 거에 대해 알고 잇는 게 잇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