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37회

형민이 처음으로 샀던 딸의 생일선물은 미니 금고였다. 영어사전 모양으로 된 금고였는데, 그걸 진짜 사전으로 착각한 딸은 열살밖에 안 된 아이한테 벌써부터 공부를 시킨다며 투덜댔다. 형민은 리본을 묶은 금고 열쇠를 딸에게 주었다. 딸은 열쇠를 받고서야 사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그전까지 형민은 딸의 생일에는 항상 케이크를 샀다. 그게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형민은 가게 점원이 케이크를 포장하면서 초는 몇개 넣어드릴까요? 하는 묻는 순간이 좋았다. 일곱개요. 여덟개요. 해마다 하나씩 늘 때마다 딸이 자라고 있는 게 실감되었다. 어린 딸이 입을 오므리고 입바람을 불어 초를 끄는 순간, 형민과 아내가 박수를 치는 순간, 그 순간이면 이런 게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때마다 형민은 고작 생일 케이크 하나에 감동을 받는 중년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풍경에 마음이 녹았다. 어느 날, 딸이 학교에 갔다 와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 짝이 생일선물로 보석만들기 세트를 선물받았다고. 그걸 학교에 가져와 보여줬는데 부러워 죽는 줄 알았다고. 부러워. 형민은 딸이 부럽다고 말하는 걸 처음 들어보았다. 그제야 형민은 딸에게 뭘 사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케이크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퇴근길에 형민은 금고를 배달하는 사람들과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금고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꽉 찼고 그래서 형민은 벽에 붙어 서 있었다. 이 낡은 아파트에 금고라니. 형민은 참 이상했다. 금고를 들이는 가정집이 많으냐고 물어보니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생각보다 많다고. 한번 장만해봐요. 의외로 이 안에 넣을 둘 것들이 많아요. 그렇게 말하고 남자가 금고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형민은 저녁 먹다 딸에게 금고를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번쩍하고 떠올랐다. 형민의 딸은 비타민C 영양제 깡통에 아끼는 물건들을 보관했다. 그 비타민은 부하직원이 자기 동생이 약국을 개업했다며 선물한 것이었다. 한번은 형민의 아내가 몰래 깡통을 열어보았다. 안에 뭐가 있는지 눈으로 보기만 하고 바로 뚜껑을 닫았기 때문에 들켰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딸한테 끝까지 아니라고 우겼다. 그런데 딸이 노란색 실을 아내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걸 뚜껑에 끼워두었는데 와보니 침대에 떨어져 있었다고 딸이 말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형민은 그날 밤 딸이 경찰이 되는 꿈을 꾸었다. 딸은 과학수사대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 꿈이 하도 황당해서 형민은 새벽에 일어나 천장을 보고 웃었다. 아침을 먹으며 꿈 이야기를 했더니 딸이 비웃었다. 상상력이 고작 그거냐고. 아빠. 내 꿈은 맥도날드 가게 주인이 되는 거야. 딸이 말했다. 딸은 햄버거를 좋아해서 울다가도 햄버거 사줄게 하고 말하면 울음을 그치곤 했다. 생일날 금고를 선물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형민은 딸의 금고가 몹시 궁금해졌다. 비타민 상자가 궁금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딸이 친구의 생일파티에 간 어느 일요일에 형민은 딸의 방을 뒤져 열쇠를 찾아보았다. 아무리 뒤져도 열쇠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걸 지켜보던 아내가 말했다. 그 열쇠는 필통에 들어 있다고. 그리고 아이는 그 필통을 늘 가지고 다닌다고. 그렇게 말하고는 형민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내가 열어줄까? 오만원이야. 형민은 지갑에서 오만원을 꺼내 아내에게 바로 주었다. 형민의 아내는 화장대 서랍에서 실핀 하나를 꺼냈다. 그걸 금고 열쇠 구멍에 넣고 앞뒤로 몇번 흔드니까 금고가 열렸다. 당신이 이렇게 싸구려를 사준 거야. 실핀으로 열리는 금고가 말이 돼?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금고 안에는 형민과 극장에서 같이 본 만화영화의 티켓이 들어 있었다. 그게 있어 형민은 뿌듯했다. 만화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딸이 형민에게 물었다. 아빠는 어떤 만화를 좋아했냐고. 형민은 어릴 적에 꼭지라는 여자 아이가 나오는 만화를 좋아했다고 딸에게 말해주었다. 명랑하고 씩씩한 아이였다고. 그 아이가 나오는 만화를 보면 나도 그런 동생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고 말했다. 꼭지가 여동생이라고 상상을 해보면 뭔가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고. 그 이야기를 듣던 딸이 형민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빠, 외로우면 나를 꼭지라고 불러도 돼. 그때 딸은 일곱살이었다. 금고 안에는 빼빼로 상자도 있었다. 흔들어보니 내용물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이걸 왜 두었지? 형민이 중얼거렸더니 아내가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를 보라고 했다. 뚜껑을 열어 안을 보니 포스트잇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 나랑 사귀자,라고 적혀 있었다. 빨간색 형광펜으로 하트도 그려져 있었다. 누구야, 이놈은. 형민의 목소리가 커졌다. 귀엽지? 누군지 알려 하지 마. 아내가 깔깔 웃었다. 금고를 사준 뒤로 형민은 해마다 생일이면 어떤 선물을 사줄지를 고민했다. 십대 여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건들을 검색해보곤 했다. 딸은 금고 이후로 한번도 형민이 사준 물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면서는 노골적으로 돈으로 달라고 말하곤 했다. 이번 딸의 생일선물은 열일곱켤레의 양말이었다. 딸의 것을 사면서 형민은 자기가 신기 위해 무지개가 그려진 양말도 하나 샀다. 회색이나 검정색 말고 다른 양말을 사보는 건 처음이었다. 형민은 딸을 만날 때 그걸 신어보리라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