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회
도시에서 아무것도 되지 않아 책을 싸들고 J시에 왔던 여름날. 가방에 넣어 온 책들은 곧 다 읽어버렸다. 여름 볕은 연일 강하게 내리쬐고 마당에 피어 있던 분꽃 따위들을 보는 일들도 시들해진 한낮이었다. 일 보러 나갔던 아버지가 돌아와서 웃옷을 마루에 던져놓고 다시 나갔다. 웃옷 속주머니에서 담뱃갑이 빠져나와 있었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그 담뱃갑을 바라보다가 한개비를 빼들었다. 성냥을 찾아 손에 쥐고는 앞마당 기척을 살피며 집 뒤로 갔다. 아버지는 시골 사람이었다. 딸인 내가 담배를 피울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집의 구조는 지금이나 그때나 뒷마당과 옆 마당과 앞마당이 다 트여 있어서 한바퀴 빙 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뒷마당 담 쪽으로 손바닥보다 더 넓은 푸른 토란대들이 우산을 펼친 것처럼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비어 있는 툇마루에 앉지도 않고 토란대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 집 안에 아무 기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성냥을 그었다. 여름날 오후의 눅눅한 공기 속으로 유황 냄새가 번졌다. 담배 피우는 일에 흥미를 느낀 건 아니었다. 서울 친구들 몇이 담배를 피울 때 냄새가 옷에 배어 싫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무심코 담배 개비를 들고 토란대 앞에 앉았던 것은 그 여름날의 권태 때문이었을까. 입에 물고 있는 담배에 막 성냥불을 붙이려는데 무슨 일로인지 오른쪽 옆 마당에서 뒤꼍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와 정면으로 시선이 부딪쳤다. 내 손엔 성냥불이,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는 상태로.
아버지가 주춤했다. 아버지가 나를 보는 것 같았는데 몸을 돌리더니 오던 길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담배는 입에, 성냥불은 손에 들고 있는 채였다. 들킨 거라면 변명의 여지 없이 정통으로 들킨 거였다. 토란대들 속에 담배와 성냥불을 내던지고 고개를 수그리는데 진땀이 났다.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보느니 책이고 뭐고 다 두고 그대로 서울로 내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버지에게 혼이 날 각오를 하고 저녁상 앞에 앉았는데 아버지는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지금까지도. 내게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그날밤에 놀란 마음으로 먼 타국의 오빠에게 이런 편지를 쓰고 있었다니. 그날 아버지가 내게 여자애가 담배를 피운다고 혼을 냈으면 나는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우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골초가 되었을지도.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그 이후로 나는 담배에 손도 대지 않았다.
빗소리는 좀체 잦아들지 않았다. 휴대전화로 날씨를 체크해보는 것이 습관이 된 지 오래다. 새벽에 깨서 휴대전화의 날씨 앱을 살펴보았을 때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었다. 그런데 저렇게 세차게 비가 내리다니. 시계를 보니 점심때가 지나고 오후 세시에 이르고 있다. 아버지는 국악원 사람들과 무사히 만나서 점심을 드셨을까? 전화를 걸어보려다가 일단 폐가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읽던 편지들을 다시 나무궤짝 안에 넣고 나니 막막해졌다. 이 나무궤짝을 다시 저기에 둬야 하나? 수북이 쌓여 있는 이 택배 상자들은 어찌해야 하나? 택배 상자들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근래의 아버지가 이 시골집에서 어찌 지냈는지 개봉도 안 된 택배 상자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빗소리 속에서 우사로 들어오는 문이 밀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나는 거미집을 지나 폐가의 방문 쪽을 쳐다보았다. 내가 나무궤짝 안의 편지를 읽는 사이에 거미는 또 집을 짓고 있었는지 좀 전에는 없던 거미집 그물이 방문 쪽에서 저쪽 택배 상자 쌓아놓은 쪽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어느새? 어처구니없는 내 마음과는 달리 날벌레 두마리가 벌써 그 거미줄에 걸려 숨을 죽이고 있다.
세찬 비를 피해서 누군가 급히 우사 문을 밀고 폐가의 열린 방문 앞에 다가와 섰다.
아버지다. 오전에 입고 나갔던 외출복 차림이다. 어…… 할 틈도 없이 나무궤짝을 안은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나와 아버지의 눈길이 바로 부딪쳤다. 오래전 토란대 앞에서 내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막 불을 붙이려고 했던 그 순간처럼. 아버지는 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헛간 평상에 내려놓은 택배 상자를 품에 안고 있다. 상자가 벌써 비어 젖어 축축해 보였다. 내가 나무궤짝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자 아버지의 눈에서 빠르게 체념이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안고 있던 나무궤짝을 놓친 것과 아버지가 안고 있던 택배 상자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일이 동시에 발생했다. 방 안에선 나무궤짝 안에 들어 있던 편지들이 와르르 먼지투성이 바닥에 쏟아지고 어떤 편지들은 거미줄을 툭툭 걷어내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쌓여 있는 택배 상자들 위로도 편지들이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놓친 택배 상자 위로 빗물이 튀었다. 외출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헛간 평상에 있는 택배 상자를 보고는 먼저 여기에 갖다 두려고 급한 걸음을 한 게 역력했다. 미처 우산도 챙겨 쓰지 못한 아버지의 모자가 비에 젖어 가운데가 눌려 있었다.
―여기 있었냐?
아버지가 어눌하게 말했다.
―우연히……
나는 아버지의 비밀을 엿보다가 들킨 사람처럼 놀라서 나도 모르게 우연히……라고 맥락에 닿지도 않은 말을 내뱉었다.
―이거 정리해놓을게, 아빠.
당황하니까 나도 모르게 아빠,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집에 들어가라, 내가 할 테니.
밤에 희미하게 맡아지는 불 냄새 때문에 눈을 떴다.
습관처럼 아버지 침대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없다. 나는 일어나 앉아서 아버지, 부르며 안방을 화장실을 부엌을 부엌 뒤 다용도실을 살펴보고는 다시 거실로 나와서 작은 방문을 열어보았다. 아버지는 없고 불 냄새는 여전했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고 마당을 내다보았다. 나무들이 빗속에서 흔들리고 있고 대문은 닫혀져 있다.
아버지?
나는 비 내리는 마당에 대고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공허한 울림이 되돌아왔다. 불 냄새가 걱정이 되어 바깥으로 통하는 현관문을 밀자마자 빗속인데도 불 냄새가 훅 끼쳤다. 헛간 쪽이다. 나는 현관문을 잡고 선 채로 붉은 불길이 일어나는 헛간을 바라보았다. 불길이 자꾸 비에 꺼지려 하면 아버지는 부채로 바람을 부쳐서 불길을 살려내고 붉게 살아난 불 속에 무언가를 태우고 있었다. 아버지가 태우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빼고 눈을 크게 떴다. 편지다. 오빠의 편지들을? 놀라서 아버지!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불길에 편지를 태우는 아버지의 손길에 서두름이 없다. 한장 한장 펴서 편지가 불에 닿을 때까지 들고 있다. 손가락이 뜨거울 텐데도. 낮에 집에 들어가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말투에서 나는 여태 들어본 적이 없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폐가의 방으로 성큼 들어와서 나는 비키듯이 방을 나와서 비를 맞고 있는 택배 상자를 방 안에 들여놓다가 아버지가 어떤 편지들을 나무궤짝 안에 다시 넣지 않고 따로 챙기는 것을 보았다. 편지들을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아버지가 돌아보며 어서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현관문을 닫고 등을 기대고는 이편에 서서 어둠 속의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빗소리가 후드득거렸다. 아버지는 편지를 태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빗소리 때문만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마 내가 현관문을 쾅 닫았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편지 태우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어떤 편지들이길래 따로 챙겼다가 이 밤중에 나 모르게 태우는 것인가.
아버지를 전혀 모르겠는 기분이 들자 등을 기대고 있는 현관문이 차갑게 느껴지고 생각지도 못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나는 날이 밝자마자 어젯밤 아버지가 편지를 태우던 헛간으로 가보았다. 검은 재가 수북했다. 무슨 편지를 태운 것인지. 나는 발로 잿더미를 헤집어보다가 주저앉았다. 잿더미의 바닥에 불에 거의 다 탄 편지봉투 한쪽이 남겨져 있었다. 손을 뻗어 검게 그을린 봉투 조각을 집어 들고는 앞뒤로 살펴보았다. 보낸 사람의 주소를 쓰는 곳이나 글씨가 번지고 불타서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기어이 읽고자 하니 해독이 된 글씨는 순옥이었다. 순옥? 그 백반집 딸? 그녀가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고?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아 잿더미 앞에서 불탄 봉투 조각을 든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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