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회
4장. 그에 대해서 말하기
둘째아들
아버지에 대해 얘기를 해보라 해서 며칠 아버지 생각을 골똘히 해봤는데 참 어려운 일이네. 평소에 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사실을 불현듯이 깨달았어. 이상한 일이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할 얘기도 많고 하고 싶은 얘기도 많은데 아버지 얘기를 하려니 난감한 기분이 드는구나. 이런 기분은 뭐지? 어째 말문이 막히는 느낌이야. 네가 문자로 보낸 일곱개의 항목을 틈이 날 때마다 들여다봤어. 특히 마지막 일곱번째 항목 말이다. 아버지와 함께하고 싶은 일은?이라고 물었는데, 놀랐다.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무엇이 하고 싶은지 떠올라야 맞는 거 같은데 머릿속이 깡통이 된 것처럼 막막한 거야. 그러고 보니 근년 들어 아버지가 원해서 무엇을 같이해본 게 거의 없구나.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매 주말마다 J시 집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것 같아. 부모님 상태가 좋으면 우리가 그런 룰을 만들었겠니. 골똘히 생각을 해보니 그때부터 아버지는 우리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만 했지 무엇을 하자,고 먼저 말하는 법이 없었다. 아, 한가지 있구나. 선산에 가는 일이 있었네. 아버진 명절이 아닐 때도 자주 선산에 들러서 벌초를 하고 묘비를 살펴보고 했지. 아침 운동 나가듯이 매일 가실 때도 있었어. 아버지와 선산을 어떻게 떼어놓을 수 있겠냐. 우리가 모두 각각 독립을 한 이후부터 아버지는 선산을 정비하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낸 건 우리가 다 아는 일이지. 자전거를 타실 때는 자전거 타고 오토바이를 타실 때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셨지. 우리도 은연중에 아버지와 전화 통화가 잘 안 되면 선산에 가셨나보다, 생각할 정도였잖아. 우리들의 결혼식으로 축의금이 모였을 때 선산 돌보는 일로 쓰려고 그중 얼마간을 떼겠다고 허락을 구했던 거 기억하냐? 돈에 관해서 아버지가 우리에게 통보하듯이 말씀하시는 걸 들어본 적이 없는 우리들은 얼결에 예, 하고 매번 어머니가 옆에서 새 살림 사느라고 모든 게 다 부족할 텐데 보태줘야 맞지 떼고 주느냐고 다 주라고 속 터져 하셨잖어. 아버지는 그걸로 선산 묘의 흙도 다시 단단하게 하고 새 잔디도 심고 묘비도 하나하나 세웠지. 그저 유독 선산에 마음을 많이 쓰는 분이라 그러겠지 했는데 그 일이 막내 결혼 때까지 이어졌던 거 보면 아버지에겐 의식 같은 게 아니었나 싶다. 우리가 모두 집을 떠난 후에 장마가 지거나 태풍이 온 후에는 논보다 먼저 선산에 가보는 게 아버지의 일이었지.
갑자기 마음이 적막해진다.
그러고 보니 이제 아버지는 당신 혼자서 선산에 가는 일도 못하시는구나. 주말에 J시의 집에 머물 때 아버지가 틈이 나면 선산에 가볼 테냐?고 건네는 목소리도 못 듣게 되는 날이 오겠구나. 점점 더 나빠지는 일만 남은 건가. 아버지가 선산에 가보자고 했을 때 항상 그 요청에 따를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사는 일이 그래. 지나고 보면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일들이 발등에 떨어져 있을 때가 적지 않아서 다음에 가지요, 했던 적이 여러번이었어. 예전처럼 걸어서 가기로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지금이야 선산 근처까지 길이 나 있으니 금방인데도 다음에 갈 수밖에 없이 시간을 다투는 일들이 있곤 했다. 그러자, 하면서도 실망감에 아버지의 얼굴에 서리던 그늘이 떠올라 죄송하구나.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어 보이는 아버지가 선산에 갈 때는 옷장을 열고서 이 옷 저 옷 살펴서 그중 가장 좋은 것으로 차려입곤 했어. 여름에는 양말까지 갖춰 신고 모자를 챙겨 쓰고 하셨네. 차에 오를 때는 어디 소풍 가는 것처럼 얼굴에 화색이 돌고 그랬다. 차 안에서 옛날이야기를 하셨어. 예전에 우리들 어렸을 때 추석날에 모두들 앞세우고 성묘 갈 때 이야기들. 그때면 아버지 기억력이 세밀해서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매번 그걸 기억하세요, 아버지?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묘 갈 때면 아버지가 약간 들떠 있는 게 느껴지곤 해. 마당에 먼저 내려서서 우리들 나오기 기다리고 누가 성묘에 빠질 궁리를 못하게 이름들을 다 불러서 나오게 했다. 차례 지낸 뒷설거지로 부엌이고 방이고 어지러우니까 그거 치우고 싶어 집에 남고 싶어했던 어머니도 불려 나오고…… 작은아버지댁 사촌들까지 다 앞세우고 아버지는 무슨 행렬을 지켜보듯이 뒤에서 걸어오셨던 게 기억나네. 사촌들이랑 떠들며 산소를 향해 가다가 돌아보면 약간 뒤처진 채 생각에 잠긴 아버지 모습이 보이곤 했어.
이야기가 자꾸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구나. 하여튼 네가 묻기 전까지는 아버지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어이없는 마음이 들면서 쓸쓸해졌다. 사실 J시에 올 때면 드라이브라도 시켜드릴까 해서 두분 차에 태우고 격포에도 가보고 내소사에도 가보고 했는데 언제부턴가 두분은 아무런 말씀도 없이 가만히 창밖만 보신다. 그래도 어머니는 꽃이 피었구나, 이 길은 그대로네, 하기도 하는데 아버지는 가만히 창밖만 내다볼 뿐이야. 창밖이 어디라도 상관없으신 거 같더라. 처음엔 너가 물은 아버지에 대한 말들을 녹음해서 보내주려고 휴대전화 녹음 기능을 켜놓고 얘기해보렸더니 내가 그 앞에서 흠흠, 할 뿐 말문이 닫히곤 해서 노트에 적어보는데 쉽지가 않구나. 말로 하는 게 더 나으려나?
나는 태어나 한달도 되기 전에 홍역에 걸렸다고 들었다. 감염력이 높아서 나를 격리시켜야 했다고. 지금도 홍역에 걸리는 아이가 있냐? 흔한 일은 아닌 것 같지? 그때는 아이들이 홍역에 걸리는 일이 잦고 목숨을 잃는 일도 빈번했다더라. 특히 돌이 되기 전에 홍역에 걸리면 면역력이 없어서 이틀을 못 넘기는 경우가 흔했다지. 좁쌀 같은 붉은 반점이 온몸에 솟고 고열에 들떠서 울다가 목이 잠긴 나를 안고 어쩔 줄 몰라하는 어머니한테서 뺏어 고모가 나를 작은방에 두었다고 하데. 그것도 윗목에 두었다고. 윗목에 두었다는 것은 죽은 것으로 생각하라는 암묵적 표시였다고.
큰애를 생각해야지! 고모가 나를 강보에 싸서 작은방 윗목에 두고는 다른 이가 출입할까봐 작은방 문밖에서 지키고 있었다고. 혹여 형이 나한테 올까봐 다른 방에 두었겠지. 이틀 후에 어머니가 작은방 윗목에서 강보를 들추니 내가 가만 눈을 뜨고 어머니를 쳐다봤다고 하데. 내 생일이 7월이니 한여름이었을 테지. 여름날 고열에 펄펄 끓는 나를 품고 병원에 갔던 사람은 아버지였다고 들었다. 그때가 제사 근처라 집을 비우고 있다가 돌아온 아버지가 방 안 풍경을 보고는 이게 무슨 짓이냐며 만류하는 고모를 뿌리치고는 고개도 못 가누는 나를 안고 밤길을 걸어 걸어 병원으로 갔다더라.
나로서는 한살도 되기 전의 일이라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지. 기억을 못하니 그 밤을 상상해보곤 한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방 윗목에 놓인 아이가 나였다고 생각하면 뭔지 고독해져. 울 힘도 없이 고열과 발진에 시달리는 나를 안고 그 밤길을 걷고 뛰어가는 큰 그림자가 출렁출렁 흔들리는 모습으로 떠오를 때도 있어. 병원에 도착해 아버지는 닫힌 병원 문을 발로 차고 두들겨서 사람들을 깨웠다고. 그렇게 해서 살아난 게 너라고 고모는 자주 말했지. 니 아비 아니었으면 넌 그때 죽은 목숨이었다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마다 기분이 야릇해지곤 했어. 아픈 아이를 윗목에 이틀이나 방치하다니. 어려서 그 말을 들을 때는 공포감이 들고 화도 나서 내가 죽기를 바란 건 아니고요?라는 고함이 터져나오려고 할 때도 있었어. 나는 기가 센 형과 동생을 사이에 둔 둘째 아니냐. 어지간한 일에는 끼어들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 그나마 그 상황을 크게 키우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저절로 깨달았어. 둘째인 내가 말을 보태는 순간 편이 갈라지는 느낌이더라고. 우리 형제가 무슨 일로 균열이 지고 파열음이 나면 어머니만 힘들게 되는 것도 싫고 그랬다. 그러다보니 웬만한 일은 그냥 삭이고 나도 모르게 형의 심기를, 셋째의 기분을 살피고 있더라. 그럼에도 언젠가 한번은 고모가 또 홍역에 걸린 나를 품고 아버지가 그 밤길을 걷고 뛰어 병원에 간 이야기를 하길래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나를 병원에 데려갈 생각을 왜 안 했냐고 물었다. 고모의 대답이 싱겁더라. 나로서는 벼르고 있다가 겨우 용기를 내서 대들 듯이 한 질문이었는데 고모는 그때 홍역에 걸린 아이들을 병원에 입원시키는 일이 없었다, 하시더만. 치료할 생각은 아예 못하고 다른 아이에게 옮길까봐 홍역에 걸린 아이를 혼자 두는 건 흔한 일이었다고, 집에 악령이 들었다 여겨서 대문에 사람 출입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임줄까지 쳤다고. 오죽하면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홍역이라고 했겠냐고. 그때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홍역이라는 고모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찾아보기도 했구나. ‘호환’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을 뜻하고 ‘마마’는 왕이나 왕비한테 쓰이는 극존칭. 호랑이한테 화를 당하는 것보다 왕이 분노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게 홍역이었다는 뜻이라는데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더라.
아픈 아이를 그리 두면 어떤 아이가 이틀을 넘기겠냐. 홍역이든 뭐든 어린애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야지, 강보에 싸서 윗목에 두다니.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라는 게 나았을까? 내가 유독 추위를 타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고 이 나이에도 어느 때 나는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니 말이다. 그때 아버지가 안 오셨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를 생각할 때 맨 처음 드는 생각이야. 태어나 두달 되던 때의 일이라 나는 그때의 일이 전혀 기억에 없지만 고모와 어머니의 말에 의해 나에게 전해진 그 일이 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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