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38회

토요일 아침에 형민은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아이가 아파서 저녁식사를 다음으로 미루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많이 아파? 어디가?” 형민이 물었다. 아내는 몸살이라고 했다. “걔, 원래 봄에 한번씩 앓곤 하잖아.” 아내의 말처럼 형민의 딸은 봄이 되면 몸살에 걸렸다. 그때마다 형민은 딸에게 농담을 하곤 했다. 너 꽃 피는 거 샘나서 아픈 거야. 꽃이 예쁘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그 농담을 하면 딸은 아니야 아니라고, 하면서 칭얼거렸다. 그러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딸은 농담을 여유 있게 받아쳤다. 어떻게 알았어, 하면서. 형민은 죽이라도 억지로 먹이라고 당부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딸은 몸살을 앓을 때면 편도까지 같이 부었고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면 형민의 아내는 배 속을 숟가락으로 파낸 후 그 안에 꿀과 생강과 대추를 넣고 달였다. 그렇게 배숙을 만들어 딸에게 주면 딸은 숟가락으로 배 안에 고인 국물을 떠먹었다. 그러면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으, 진짜 이거 싫어.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딸이 배숙을 먹었다. 그걸 다 먹으면 나중에 매운닭발을 사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꼭 마을버스 정거장 앞에 있던 네발가락이란 이름의 닭발집에서 파는 최강닭발이어야 했다. 형민의 아내는 아이가 매운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주 특별한 날에만 그걸 사주었다. 이를테면 몸살을 앓고 입맛을 잃었을 때나, 긴 장마로 며칠 동안 놀이터에 나가 놀 수 없게 되었거나, 기말시험이 끝나는 날에. 사나흘 앓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딸은 형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안 아픔. 그 메시지를 받으면 형민은 정시에 퇴근을 했다. 네발가락에 들러 최강닭발 1인분과 그냥닭발 2인분과 주먹밥 2인분을 주문했다. 그리고 음식을 기다리면서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계란탕 끓여놔, 하고. 집에 가려면 마을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을 가야 했지만 그날은 마을버스를 타지 않았다. 마을버스 정거장과 집 사이에 마트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만 뚜껑이 하얀 장수막걸리를 팔기 때문이었다.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는 초록색 뚜껑만 팔았다. 막걸리를 사서 집에 돌아오면 식탁에 막 끓인 계란탕이 놓여 있었다. 딸은 사이다를, 형민과 아내는 막걸리를, 잔에 따랐다. 그리고 건배를 했다. 감기 나은 거 축하. 아내는 딸에게 말했다. 몸살 이긴 거 축하. 형민도 딸에게 말했다. 형민은 아내에게 딸이 다 낫거든 셋이 닭발이나 먹자는 메시지를 보내려다 말았다. 이혼 후 형민은 아내나 딸에게 메시지를 보낼 일이 있으면 신중하게 문장을 고르고 골랐다. 담담하게 보이도록. 형민은 늘 조심했다. 질척대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형민은 딸을 만날 때 신으려고 산 무지개 모양의 양말을 신어보았다. 그걸 신은 자신의 발을 보자 웃음이 났다.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양말을 벗지 않았다. 형민은 버스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17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렸다. 거기에는 형민이 한달에 한번씩 가는 목욕탕이 있었다. 어릴 때 다니던 옛날식 목욕탕이었다. 형민은 찜질방이 싫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아무데다 눕는 것도 싫었고, 건강에 좋다며 욕조마다 이상한 색깔의 물이 있는 것도 싫었다. 형민은 냉탕과 온탕이 하나 있고 작은 습식 사우나가 있는 그런 목욕탕만 찾아다녔다. 형민은 팔천원을 내고 수건 두장을 받았다. 카운터에는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자리에는 늘 주인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작년 추석에 목욕을 하러 갔더니 할머니가 형민에게 수건을 건네주면서 착하다고 말을 했다. 착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할머니가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목욕을 하러 온 게 착하다고 말해주었다. 요즘은 그렇게 목욕재계를 하는 사람들이 줄어든다며. 그날을 계기로 형민은 목욕을 갈 때마다 할머니와 짧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 할머니는 34년째 목욕탕을 운영하고 있는데 아무리 아파도 카운터를 남에게 맡겨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적에도 카운터는 맡기지 않았다고 했다. 아들 둘과 딸 둘이 있는데, 지금은 결혼을 해서 똑같이 일남일녀를 두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모든 자식들에게 손자 손녀의 첫 대학등록금을 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큰손자가 공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대학을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래놓고 그놈이 대학등록금에 해당하는 만큼의 돈을 선물로 달라고 하네. 대학을 가는 자식만 돈을 주는 건 차별이라며. 할머니가 그래서 큰손자에게 돈을 주었는지는 다시 듣지 못했다. 형민은 젊은 남자에게 주인이 바뀌었냐고 물었다. “손자예요.” 남자가 말했다. 대학등록금 대신 돈을 달라던 손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형민은 남자가 귀엽게 보였다. 이렇게 날이 좋은 토요일에 할머니 대신 목욕탕 카운터에 앉아 있다니. 형민은 착하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목욕탕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형민은 온탕과 냉탕을 다섯번 정도 반복한 다음 머리를 감고 나왔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팬티만 입은 채로 음료수를 하나 사 먹었다. 배를 갈아서 만든 음료수였다. 그걸 먹다보니 형민은 딸이 이번에도 배숙을 먹었는지, 먹었다면 먹고 남은 배 껍질은 누가 긁어 먹었는지, 궁금해졌다. 형민은 딸이 남긴 배 껍질을 이로 긁어 먹는 걸 좋아했다. 목욕탕에서 나온 형민은 근처에 있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었다. 옆 테이블에는 중년 여자 둘이 탕수육에 고량주를 마시고 있었다. 형민이 대학에 합격했을 때 어머니가 사준 음식도 탕수육이었다. 이과두주도 그때 처음 마셔보았다. 첫 잔을 따라주면서 어머니는 말했다. 수고했다. 그래서 형민도 어머니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그렇게 말하고 형민은 그 말이 적절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옆 테이블의 사람들이 고량주 한병을 더 주문했다. 그 소리를 듣자 형민은 술을 시키고 싶어졌다. “저도 이과두주 한병이요.” 형민이 종업원에게 말했다. 짜장면 한 젓가락에 이과두주 반잔. 그리고 춘장에 찍은 양파 하나에 이과두주 반잔. 그렇게 먹고 마신 다음 형민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낮잠을 잤다. 낮잠을 자기 전에 아무 꿈이라도 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꿈은 꾸지 않았다. 일어나보니 아내에게 부재중 전화가 세통 와 있었다. 딸의 상태가 괜찮아져서 다시 저녁을 먹자는 전화인가 싶어 다시 걸어보았다. 이번에는 아내가 받지 않았다. 그리고 한시간쯤 지난 후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아내는 울먹이며 말했다. 딸의 친구가 약을 먹었다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고. 거기까지 말하고 난 다음 아내는 갑자기 오열을 했다. 울면서도 아내는 계속 말했다. 중환자실에 있는 아이의 일기장에는 자기를 괴롭힌 친구들은 죽어서도 복수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일기장에는 딸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