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39회

 

   내가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먼저 느끼는 감정이 있다. 이걸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서 망설였다만 나름대로 이것도 인터뷰이니 솔직해지기로 한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서운한 생각이 들곤 했어. 서운하다고? 깜짝 놀랄 너를 생각하니 좀 미안하네. 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이 홍역에 걸린 나를 품고 밤길을 뛴 모습이라면서 서운하다니…… 그러게나 말이다. 내 마음 깊이 스민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서운함이라는 것. 달리 뭐라 표현해야 될지 몰라서 서운함이라고 하긴 했는데 아버지가 내게 무엇을 서운하게 해서는 아니다. 아버지 성품에 그럴 리가 있냐. 어렸을 때부터 집안 분위기가 형 위주로 돌아가는 걸 봐와서 그러겠지. 지금이야 장남 차남이 어디 따로 있냐만 아버지 시대에는 장남에게 많이 기대하고 나중엔 또 많이 의지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봐야지. 너는 기억에 없겠다만 아버지는 형을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 아버지를 보면 아마 한국의 탈것들의 역사가 나올 것이다. 아버지는 달구지에 형을 싣고 다녔고 자전거를 타게 되었을 때는 자전거에, 오토바이를 타게 되었을 때는 오토바이에 형을 태우고 다녔지. 이상하지? 형과 내가 세살 터울인데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형을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던 기억이 이렇게 남아 있으니 말이다. 타라, 하면 자연스럽게 형이 아버지 뒤에 탔어. 누구 타라고 이름을 말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아버지는 어디 나갔다 집에 오면 집 안을 휘휘 둘러보곤 했다. 그게 형을 찾는 거라는 것을 우리 형제들 중 모르는 이가 누가 있었니. 아버지는 늘 형을 찾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나를 보면 하는 말이 대개 형에 대한 말이었지. 형 학교에서 돌아왔냐? 형 어디 있냐? 형 학교 갔냐? 형이 알고 있냐? 같은 말들. 그 말들을 들으면서 자라다보니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보면 형이 일등 했대, 형이 모자가 필요하대, 형 자전거가 빵꾸났어, 형 달리기는 잘 못해…… 같은 말을 하곤 했다. 형은 달리기를 못해도 깜짝 놀랄 만큼 못했다. 같은 라인에서 출발하면 50미터도 가기 전에 뒤처지는 게 형이었지. 운동회 날 형이 달리기에서 꼴찌 할 게 분명해서 내가 미리 말해주곤 했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실망하기 전에 미리 말해주면 실망하지 않을 거 아니냐. 형 때문에 아버지가 실망하는 건 또 싫었거든.

 

   방금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 왔다. 갑자기 목이 말라서. 지금까지 쓴 것을 읽어본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이러는 거지? 싶어서 웃었다.

 

   내 마음의 바닥에 아버지에게 서운한 감정이 깔려 있다고 말한 것은 아마 세상의 둘째들이라면 다들 얼마간은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지금이야 자식을 하나 낳거나 많아야 둘이라서 둘째의 마음이란 게 희박하겠지만 말이다. 장남 마음은 장남만 안다고 하는 것처럼 둘째의 마음은 둘째들이나 알지 그걸 어떻게 하나하나 설명하겠냐. 얘기하면 할수록 구차해질 뿐인 그런 둘째의 마음이 있어. 앞에서 말했듯이 서운함이라고 한 밑바닥을 말해보려면 뭔지 쩨쩨해지는 것 같은 그런 감정이 있다니까. 어쨌거나 아버지는 늘 형을 먼저 생각했던 건 맞아.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지.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중엔 나도 나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형을 생각했던 거 같아. 그러니 형도 힘들었겠어. 형은 어떤 상황에서도 잘못되면 안 된다는 압박을 받았을 거 아니냐. 집안에 맏이가 곧아야 동생들도 곧게 자란다는 말을 형은 내가 태어난 뒤부터 계속 들었을 거 아니냐고. 너가 잘못되면 동생들도 잘못된다는 말을 막내가 태어나고 적어도 스무살이 될 때까지 들었을 걸 생각하니 형이 안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뿐이냐. 나는 육군3사관학교를 가서 서울에서 형과 함께 사는 일은 없었으나 셋째랑 너가 서울에서 형과 함께 지낼 때 아버지가 너희들에게 형을 아버지로 생각하라,고 하는 걸 자주 들었다. 그때는 무심히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무게가 형에게 엄청났었겠다 싶다. 형도 겨우 스물 몇살이었는데 말이다. 형과 겨우 세살 터울일 뿐인데도 나에게도 형이 어른처럼 느껴지곤 했던 건 형을 향한 아버지의 태도 때문이었던 거 같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자 아버지는 형을 불러놓고 홍이한테 글 좀 가르치라고 했어. 숫자도 가르치고 한글도 써보게 하라고. 그걸 시작으로 아버지는 학교에 대한 일은 모두 형에게 물어보라고 하더라. 무엇이든 형이 하라는 대로 하라고 했지. 처음에는 나보다 겨우 세살 많은 형이 뭘 안다고 다 형한테 물어보라고 하나 싶었지만 달리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까 숙제도 형한테 물어보고 검사도 형한테 받고 나중에 성적표도 형한테 보여줬어. 형이 아버지한테 홍이 공부 안 해서 성적표에 미, 양이 수두룩하다고 일러바치기도 했지. 그때는 성적을 ‘수우미양가’순으로 먹였거든. 아버지는 그저 가만 아니면 됐제, 할 뿐이었다. 워낙도 말수가 적은 분이 학교에 관한 일 앞에서는 더욱 말을 안 하셨어. 학교 선생님과 면담이 있을 때도 아버지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와야 될 자리에도 어머니가 오셨어. 아버지에게 학교라는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아버지가 학교에 오는 날은 가을 운동회 때였어. 운동장에 차양을 쳐놓고 부모들이 앉아서 자식들이 뛰고 노는 운동회를 구경하곤 했는데 아버지는 그때에만 학교에 왔어. 그래서 나는 미리 형이 달리기를 못한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던 거야. 유일하게 한번 학교에 오는 아버지가 형 때문에 실망할까봐서. 그러는 동안 내 마음 한구석엔 나도 잘하는 게 있는데 …… 싶은 결핍감이 도사리게 된 거 같아.

 

   그렇다고 내가 아버지나 형에게 불만이 있었던 건 아니야. 특히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형에게 물어보라,고 했던 것들 말이다. 형한테 물어보면 형이 잘 알려줬어. 나중엔 아버지가 그리 말 안 해도 형을 찾곤 했어. 나도 모르게 형을 의지하는 마음이 커졌더라고. 형이 있어서 뭐든 혼자 결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형이 알아서 하겠지, 싶은 마음에 나는 뒤로 물러나 있을 수도 있었지. 그건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이것도 둘째의 마음 중 하나야. 그런데 가끔 소외감을 느낄 때도 있다. 형과 너와 셋째와 이삐가 지난날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네 사람은 뭔가로 결속되어 있는 것 같거든. 셋째가 그때 큰형이……라고 하거나 너와 이삐가 그때 큰오빠가……라고 할 때는 나도 아버지처럼 말이 없어지곤 했다. 나는 모르는 시간을 네 사람은 공유하고 있었거든. 들어보면 아름답고 행복했던 것에 대한 추억들도 아니고 뭐가 모자라서 항상 불안해하고 쩔쩔매는 그런 기억들에 대한 회상이 대부분인데도 부럽더라고. 그때 혼자 멀리 떨어져 있느라 함께할 수 없었던 나는 할 말이 없더라고.

 

   이런 기억들이 내 마음에 잠재되어 있었구나. 사람은 참 이상하지. 너는 잊었겠지만 너가 언젠가…… 그때 우리가 가리봉동에 살 때 홍이 오빠가 다녀갔잖아, 전철역 앞에 있는 호떡집에서 호떡을 사다놓고 가서 맛있게 먹었는데…… 한 적이 있다. 너가 그 말을 하기 전에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기억인데 너의 그 한마디에서 기억들이 솟구쳐 올라왔지. 그때 나는 3사관학교의 생도였어. 학교 쉬는 날에 부모님이 계시는 J읍이 아니라 형과 너가 살고 있는 그 방을 찾아갔었던 것 같아. 서울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서 제복의 단추들을 어찌나 반짝반짝 닦았는지 차창 밖 풍경이 단추에 다 비칠 지경이었어. 서울에 갈 곳이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좋았어. 서울에 친척도 아니고 내 형제들이 살고 있는 게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서울역에서 지하철 1호선 표를 끊어 형제들의 방이 있는 그 역에서 내릴 때 가슴이 뿌듯했어. 지하철역에서 막 구워낸 호떡을 사서 손에 들고 골목 번지수를 찾아 그 방을 찾아냈는데 바깥으로 난 문에 열쇠가 잠겨 있었어. 밤이 깊어가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았어. 오로지 형이든 너든 누구든 한 사람이라도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어두워져서야 주위를 살펴보았지. 대문은 항상 열려 있는 듯했다. 수시로 사람들이 들락날락했어. 복도식으로 된 방들마다 바깥으로 열쇠가 채워져 있는 것도 그때 봤다. 저 열쇠 뒤에 방이 있는 걸까? 나로서는 처음 보는 구조라 잘 상상이 가질 않더라.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방방마다 열쇠가 채워져 있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대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왼편에 연탄을 쌓아놓는 창고가, 오른편엔 공동화장실이 있었는데 화장실과 방이 시작되는 사이로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어서 올라가보았다. 장독 몇개가 놓여 있고 걷지 않은 빨래들이 빨랫줄에서 펄럭거리더라. 빨래들을 피해서 옥상 끝으로 가보니 눈앞으로 공장 굴뚝들이 쏟아져 들어왔어. 높다란 공장 굴뚝을 따라가니 거기 밤하늘이 있더라. 밤인데 한낮처럼 굴뚝에서 흘러나오는 흰 연기가 밤하늘을 덮고 있었어. 여기가 내 형제들이 살고 있는 서울인가. 서울을 향해서 기차를 탈 때 설렜던 마음은 가라앉고 막막해져서 사방을 휘둘러보았어. 그렇게 내가 내린 전철역 쪽에서 사람들이 몇차례 쏟아져나오는 것을 보고 있다가 다시 내려왔을 때도 그 방문은 잠겨 있었다. 호떡 봉지를 만져보니 식어 있더라. 반짝반짝 닦아 입은 제복 주머니에 꽂아놓은 볼펜을 꺼내서 호떡 봉지에 “둘째 왔다 감”이라고 적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긴 골목을 빠져나왔다. 도돌이표처럼 다시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가서 J읍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지.

   J읍에 왔을 땐 첫새벽이었다.

   서울에 다녀왔다 하니 아버지가 형은 잘 있더냐,고 물었다. 한번 가봐야 할 텐데 형이 오지 말라고 해서 못 간다,라고도 했다. 나는 가지 마셔요, 아버지, 했다. 나중에 형이 오라고 하면 그때 가세요,라고.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는데 누구든 그 방에 돌아왔을 때 발견할, 잠긴 문 앞에 내가 놓고 온 호떡이 생각났다. 속의 설탕물은 꾸들해지고 겉껍질은 눅눅해졌을 호떡이. 세월이 흐른 후에 무심하게 흘러나온 대화 속에 그 호떡이 등장했어. 내가 떠나온 시간이 자정 근처라서 차갑게 식었을 텐데 너가 맛있었다고 말하더라고.

   그래, 그 호떡이 맛있었구나.

   가족들이 모였을 때 형과 셋째와 너와 이삐가 그때로 돌아가 이야기꽃을 피우면 나는 입을 다물고 자정이 다 되도록 아무도 돌아오지 않던 방문에 채워져 있던 열쇠와 그 방 앞에 놓고 온 식은 호떡 생각을 하곤 했다. 그때를 함께했기 때문에 어떤 단어 하나만 들어도 아, 그때, 그게…… 하면서 알아듣는 네 사람이 부러웠다면 이해하겠냐? 나도 함께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이것 봐라. 이렇게 설명하기가 힘든 게 둘째의 마음이라니까.

 

   형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셋째가 대학에 입학하고 그 방에 합류하게 되었으니 더 옹색해졌지. 그때껏 아버지는 거기에 가보지 못했어. 형이 한사코 오지 말라고 했거든. 형이 몇년째 그러니까 아버지가 서울에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기차표를 끊고 그 방을 찾아갔던 날 기억하냐?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그 방에 잠깐 앉아 있다가 흑석동 당숙네를 찾아갔어. 10년 전에 빌려준 돈을 돌려달라고 할 작정으로 갔었다고 하더라. 그거 받아서 형한테 건네주고 오려고. 아버지는 낯선 길을 더듬어 당숙네를 찾아갔지만 정작 빌린 돈 갚으라는 말도 못 꺼내고 그냥 J시로 돌아왔어. 당숙네에 가보니 거긴 방 한칸에 일곱 식구가 살고 있는데다 당숙은 없고 당숙모가 장탈로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데 방도 냉골이고 양식도 없어서 아버지는 일생에 처음 가본 동네의 연탄집에 들러 연탄을 당숙네로 배달시키고 쌀집에 들러 쌀을 배달시켜주고 왔어. 그때 내가 어째 J시의 집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허탈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와서는 바로 앓아누웠다. 그때 아버지가 지치고 슬픈 얼굴로 나한테 니가 형을 도울 수 있으면 좀 도우라고 하더라. 늘 아버지로부터 형에게 물어보라, 형이 하라는 대라 하라, 같은 말만 듣다가 형을 도우라,는 말을 듣게 되니 나도 모르게 무릎이 휘청거렸다.

 

   내가 해양대학교에 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놀라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도 형한테 물어봤냐?고 했다. 물어보지 않았다고 하니 아버지가 무척 당황했다. 해양대학교 나오면 뭐가 되느냐고 물었을 때는 내가 당황했다. 사실은 나도 해양대학교를 나오면 뭐가 되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밀리기는 싫어서 얼른 마도로스가 된다고 했지.

   ―마도로스? 배를 탄다고야?

   아버지는 왜?라고 물었다. 왜 배를 타는 사람이 되려고 하느냐고. 아버지가 왜?라고 묻는데 또 할 말이 없었다.

   ―배를 타는 게 아니고요. 해양대학을 나오면 선장이 될 수 있어요, 아버지.

   지금도 모르겠구나. 해양대학교를 나오면 선장이 되기는 하는 건가. 내가 하려는 일을 아버지가 극구 말린 적은 처음이었어. 내가 해양대학교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둘째의 마음이었거든. 학비가 가장 적게 들면서 졸업을 하면 바로 취직이 되는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 학교 선생님이 해양대학교를 추천했다. 해양대학이 국립이라 학비가 거의 들지 않고 학교 내에 기숙사가 있다는 것에 혹했다. 선생님께 추천을 받은 후에야 해양대학교가 어디에 있나 찾아봤더니 부산에 있더라. 처음엔 교통부 관할의 고등상선학교였다가 나중에 국방부 관할이 되면서 학교명도 국립해양대학으로 변경하였다가 더 후에 문교부 관할의 한국해양대학이 되었더라.

 

   언젠가 이삐가 무슨 얘기 끝에 우리 집이 언제 가난했어?라고 해서 내가 놀랐다. 너하고 내가 여섯살 터울이고 너 아래인 이삐보다 내가 아홉살 많으니까 거의 10년 터울이라 그 시절 지나온 느낌이 다른가 싶기도 하다만 이삐는 진심으로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더라. 이삐가 그렇게 느낀 건 부모님 덕분이지. 아버지를 생각해봐. 아버지가 겨울 초입에 맨 먼저 한 일이 뭐였는지 생각나냐? 가족들 발 치수대로 털신을 사고 내복을 사서 자전거 뒤에 싣고 와서 마루에 풀어놓았어. 털신 한켤레와 내복 한벌씩 짝을 맞춰서 마루에 쭉 진열해놓고 우리들이 자기 것을 가져가게 했어. 그게 뭐? 하고 무시할 일이 아니야. 도시락을 못 싸가서 수돗물을 먹는 아이들이 있던 때잖아. 우리들은 겨울 내내 새 털신을 신었어. 새 내복을 입었지. 겨울에 햇볕이 드는 담벼락에 동네 아이들하고 쭉 서 있을 때 보면 매해 새 털신을 신는 건 우리들뿐이었잖아. 하교할 때 신발장을 열어보면 예순 몇켤레의 신발들이 쭉 진열되어 놓여 있는데 내 신발이 눈에 띌 만큼 새 신발이고 그랬어. 그래서인지 언젠가 내 새 신발을 자신의 헌 신발과 바꿔치기해 가기도 하고 그랬지.

   이삐가 어찌 느끼든 실제로 우리 집은 가난했어. 아버지가 농사지어서 자식 여섯을 모두 대학 공부를 시키겠다는 꿈을 꾸는 이상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가 있겠냐. 형이 서울에서 낮에는 구청에 다니고 밤에는 야간대학을 다니며 고군분투 중이었는데 내가 일반대학을 가겠다고 할 수가 없더라고. 이것도 둘째의 마음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살피는 것 말이다.

 

   둘째의 마음이 야릇하게 작동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족 행사가 있어서 부모님이 서울에 오셨을 때다. 부모님은 서울에 오면 형네 집으로 갔지.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게 당연한 일처럼 되었어. 형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부모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거 같아. 특히 아버지가 그랬지. 모두들 제각각 가정을 이루고 독립을 한 뒤에도 이상하게 그 생각은 바뀌지가 않았지. 우리들도 부모님이 서울에 오면 형네 집에서 모이는 걸 당연하게 여겼잖아. 그뿐이냐. 아버지는 형네 집이 아닌 다른 형제들 집에 머무는 걸 어색해하기까지 했어. 형제 중 누가 이사를 했다고 하면 거기 가보기까지는 하는데 잠은 꼭 형네 가서 잤다. 형이 데리러 오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형네 집에 데려다달라고 하셨지. 형이 이사를 하면 아버지가 묻는 첫 질문이 서울역에서 가깝냐?였다. 아버지에겐 서울역이 서울이지. 형 집이 서울역에서 가까운지 먼지가 아버지에겐 매우 중요했어. 내가 화곡동에 살 때 한번은 형네 집에 형수 쪽 부모님이 와 계셔서 화곡동에서 주무시기로 했는데 밤에 아버지가 잠을 안 주무시더라고. 말은 안 하지만 형네 집이 아니니까 아버지는 당신이 있을 데가 아니라고 여기고 마음이 그러니 어색하고 남의 집만 같아 서성서성하신 거지. 약간 마음이 상하면서 우리 집서 주무시는 게 형네와 뭐가 다른가? 싶어 원망도 들고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싶은 야속한 마음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