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서울시 중구 약수동 금아빌딩의 소유주는 이기영이었다. 그는 30여년간 대기업의 관리부서에서 근무했다. 퇴직한 것은 이사 직함을 단 지 3년 만이었다. 2011년 그해, 강남권의 중소형 빌딩들만 전문적으로 취급한다는 부동산중개사를 소개받았다. 서울지하철 3호선과 7호선 라인을 따라 역세권 매물로 나온 꼬마빌딩들을 수없이 보러 다녔다. 부동산중개사는 고수였다. 처음 며칠간 비싸고 고급스러운 건물과 저렴하고 허름한 건물을 번갈아 보여주었다.
나흘째 되던 날, 중개사는 동호대교 북단으로 차를 몰았다. 한강다리 하나를 건너왔을 뿐인데 이쪽은 지나치게 저평가되었다고 그는 단언했다. 대로변 안쪽 골목에 있는 지하 1층, 지상 4층의 평범한 건물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도보로 10여분 거리에 있었다. 건물 외양은 고급스럽지도, 허름하지도 않았다. 앞서 보아온 빌딩들과 비교하니 전 주인이 제시한 매매가가 제법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건평이 작아 한층에 업장 한개씩이 입점되어 있었고 맨 위층은 건물주의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층은 세탁소, 2층은 미용실, 3층은 사무실로 임대를 주고 있다 했다. 살던 아파트를 팔고 퇴직금과 합치니 매매가의 삼분의 이가 되었다. 나머지는 은행에서 담보대출을 받았다.
이자는 월세로 충당해야 했다. 세탁소와 미용실의 세는 매달 안정적으로 입금되었다. 문제는 3층이었다. 인테리어회사와 디자인회사, 유럽에서 무슨 화장품을 수입해 판다는 무역회사까지 차례로 들어왔다가, 월세가 밀려 보증금에서 까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같은 건물이어도 층에 따라 안 좋은 터가 있는 법이라고, 아내가 점쟁이에게서 듣고 온 말을 전해주었다. 한동안 공실로 있던 3층에 새로운 세입자가 든 건 다섯달 전이었다.
계약을 하던 날, 이기영은 약속 시간보다 5분 늦게 부동산 사무실에 도착했다. 계약자는 의외로 젊고 예쁜 여자였다. 젊고 예쁜 여자에 대해 더 정교하게 설명할 재간이 그에게는 없었다. 소매를 접어 올린 흰색 셔츠블라우스에, 연한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의 눈엔 이십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가 회사의 대표라고 했다. 계약은 ‘㈜소이스타일’이라는 법인명으로 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여자의 손가락에는 반지 여러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패셔너블한 반지들이었고 웨딩 링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자가 말했다. 인테리어회사와 디자인회사, 무역회사의 사장들도 계약 때 비슷한 인사를 했었다. 그런데 그녀의 인사는 조금 달랐다. 생글거리지 않는데도 왠지 다감하고 다정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지내면서 불편한 점이 있으면 지체 없이 이야기하라고 이기영도 화답했다.
“저희가 의류를 취급하는 곳이라 아무래도 짐이 많아요. 깨끗하게 사용하도록 직원들에게 주의를 주겠습니다.”
“직원이 많은가봐요.”
“아주 많지는 않고, 정직원이 열네다섯 됩니다. 외근하는 인원도 많아서 사무실에 모두 매일 출근하지는 않고요.”
“정직원이 그 정도면, 크게 하시네.”
그는 짐짓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젊은 사람들한테는 엄청 유명한 쇼핑몰이에요.”
부동산중개사가 거들었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여자가 손사래를 쳤다. 이기영은 새로운 세입자가 퍽 마음에 들었다.
“이번엔 괜찮을 것 같아.”
저녁 식탁에서 묻는 아내에게 그는 대답했다. 인터넷쇼핑몰이라는 말에, 심드렁히 밥을 먹던 대학생 딸이 이름을 물었다.
“뭐라더라. 무슨 스타일이던데.”
“소이스타일?”
“그래. 그런 것 같은데.”
“진짜요? 진짜 한소이?”
이기영은 딸의 반응에 어리둥절해졌다. 딸이 제 스마트폰을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여러 장의 사진들이 휙휙 지나갔다. 사진 속의 여자는 요가복을 입고 있기도 했고, 샴페인 잔을 들고 있기도 했고, 동남아의 어느 휴양지 리조트로 추정되는 배경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 걷고 있기도 했다. 그가 낮에 보고 온 여자가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한복을 입은 채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의 사진을 봤을 때, 이기영은 씹고 있던 어묵 조각을 삼켰다. 그것은 누가 봐도, 돌잔치에서 엄마 역할을 하는 모습이었다. 여자는 은은한 옥색과 살구색이 조화를 이룬 한복을 입고 머리는 반듯하게 앞가르마를 타 쪽을 졌다. 그녀가 맞았다. 아기 엄마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느낀 이유 모를 아쉬움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딸에게 물었다.
“그런데 네가 왜 이 사진들을 가지고 있지?”
“네?”
딸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가진 게 아니라, 볼 수 있는 거예요. 누구나.”
아는 사람이냐고 그가 묻자 딸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람’이라고 답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그는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아무튼 젊은 사람들에게 유명하다던 중개인의 말이 허풍이 아니었나보다고 생각했다.
“근데 왜 여기로 들어오지? 본사 맞아요? 그동안 강남에 빌딩 몇개 사고도 남았을 텐데.”
딸이 중얼거렸다.
“잘되는 데야? 다행이네. 이제 월세는 안 밀리겠다.”
아내가 반색했다. 그러나 아내의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3층의 월세는 첫 달에만 제날짜에 들어왔을 뿐 두번째 달부터는 아니었다. 돈은 사흘이 지난 날짜에 입금되었고, 세번째 달부터는 아예 입금되지 않았다. 이토록 빨리, 당당히, 연체를 시작하는 세입자는 처음이었다.
- 분단을 넘는 학교 - 2021년 9월 29일
- 병원 노동자 파업의 정치경제 - 2021년 9월 27일
- 아프간 둘러싼 강대국의 책임을 생각한다 - 2021년 9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