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4회

   다리의 이쪽은 읍내의 바깥쪽이고 저쪽은 읍내의 안쪽이어서 내가 다니던 중학교나 소방서, 오거리시장, 읍사무소, 경찰서, 법원 등이 저쪽에 속했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읍내의 이쪽에서도 4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었다. 우리 집이 속한 마을의 아이들은 읍내 바깥쪽 초입에 있던 초등학교를 다녔고 대부분 학교까지 걸어다녔다. 학교 가는 길은 어디로 가든 통했다. 집의 대문에서부터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고샅길을 빠져나오면 얼마간의 신작로를 걷다가 계속 신작로를 따라 걸어가든가, 아니면 수리조합 길로 빠져 걸어가든가 했다. 학교 가는 시간이 급하면 신작로를 따라가고 여유가 있을 때는 수리조합 둑길로 접어들었다. 둑 아래는 논이었다. 논둑길에는 봄날이면 그 많은 잡초들이 우거진 속에 나팔꽃이 피고 그 사이로 들딸기가 수두룩하게 섞여 있었다. 이슬이 잔뜩 묻은 나팔꽃 사이를 헤집고 딸기를 따 먹을 수 있었다. 논둑에 책가방을 내려놓고 잔등이 다 보이도록 엎드려서 손에 닿을락 말락 하는 딸기를 향해 손을 뻗다가 가시에 찔려 딸기를 따기도 전에 피를 볼 때도 있었으나 붉은 딸기를 손안에 넣었을 때의 희열은 학교 가는 길에만 맛볼 수 있는 거였다. 아직 덜 익은, 그러나 내일 아침엔 따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딸기는 잎사귀를 잡아당겨 숨겨놓기도 했다. 다른 아이가 논둑 위에서 볼 때는 보이지 않게끔 잎사귀로 가려놓고 혼자만 알게 표시를 해두느라 나팔꽃 넝쿨로 치밀하게 위장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리조합 길을 빠져나오면 이슬에 젖은 축축한 바지 끝에 신작로의 먼지와 흙이 들러붙어 무겁기까지 했다. 신작로의 오르막길을 오르고 내리막길로 내려가다가 중간의 샛길로 들어가면 논과 논 사이의 길을 걷게 되고 다시 신작로로 이어지는 길로 접어들면 나지막한 언덕과 무덤 몇 기(基)가 만나졌다. 무덤은 학교와 마을의 중간쯤에 있어서 하교하는 아이들이 쉬어가는 자리였다. 쉬면서도 아이들은 몸을 가만두질 못하고 누군가를 쫓고 밀치고 달아나느라 무덤에 올라타고 미끄러져 무덤의 뗏장이 자라질 못하고 문드러져 있었다. 마을의 대부분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어서야 이 길들에서 놓여났다. 중학교는 읍내의 깊숙한 안쪽에 있어서 중학생이 되면 버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고 읍내의 안쪽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읍내의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어김없이 대흥리 다리를 건너야 했다.

   어느 계절이었을까? 아버지의 옷차림이 반팔도 아니고 그렇다고 두껍지도 않았다고 기억되는 걸 보면 봄이 지나 여름이 오려고 할 때나 혹은 여름이 지나 초가을이었을지도. 장날이었을까? 다리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읍내의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과 읍내의 바깥쪽으로 나오려는 사람들이 다리 위에서 교차하며 붐볐다. 무슨 일로인지 나는 읍내의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리의 이쪽에 있었고 아버지는 읍내의 저쪽에서 이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아버지인 줄을 모르다가 어? 아버지인가? 싶어서 걸음을 멈췄다. 맞은편에서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다시 바라봤다. 아버지였다. 집이 아닌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갑자기 가족을 만나게 되었을 때의 당황스러움. 나는 맞은편 저쪽에서 걸어오는 아버지를 걸음을 멈춘 채 바라보기만 했다. 젊은 날의 아버지는 적당한 덩치에 키가 큰 축에 속했고 시골 사람 같지 않은 밝은 피부에 반듯한 콧대가 얼굴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의 다른 아버지들처럼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른 아버지들 속에 섞여 있을 때는 외톨이처럼 보일 정도로 말수가 적었다. 말을 적게 해도 아버지 주변엔 친구들이 많았다. 내 형제들은 아버지 친구들을 ‘아재’라고 호칭하곤 했다. 세월이 이렇게 흐른 다음에도 생각나는 그 호칭들. 북산아재, 대성아재, 내춘아재, 곰소아재 들은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우리 형제들을 만나면 자신들이 우리의 아버지나 되는 듯이 우리를 대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이면 뒤에 우리를 태워주었고, 가게 앞이면 먹을 것을 사서 손에 쥐여주었고,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아버지의 외자 이름을 대며 딸이라고 막내라고 알려주곤 했다. 그렇게 알릴 때의 아버지 친구들의 목소리엔 내 아버지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기쁨과 신뢰가 묻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 그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버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축 늘어뜨린 어깨, 그 어깨 위에 걸쳐진 허름한 잠바, 구겨진 속셔츠를 넣어 입은 헐렁한 바지…… 생각에 잠겨 고개를 숙이고 걸어오던 아버지가 고개를 들자 아버지와 나는 시선이 마주칠 뻔했다. 순식간에 나는 얼른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쪽으로 돌린 내 눈 속으로 다리 아래로 흘러가는 물빛과 그 위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내가 아버지를 외면했다는 것에 놀라 곧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는 건너편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시 무슨 생각엔가에 빠져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혀가며 다리 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인파 속으로 섞이는 아버지의 허름한 뒷모습. 사람들 속에서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이던 아버지. 깊은 실의에 빠져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사람처럼 뒤처져 보이던 아버지.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을 한껏 웅크린 채 다리를 건너갔다. 나는 뭇사람 속에 아버지가 섞이면 깨금발을 디뎌 아버지의 뒷모습을 끝까지 따라갔다. 신발 한쪽 뒤축이 먼저 닳았는지 한쪽으로 쏠려 절룩이는 것 같았던 아버지의 걸음걸이. 햇볕이, 사람들이, 소음이, 그림자들이, 알 수 없는 무슨 얼룩 같은 것들이 눈앞으로 쏟아지면서 다리 위의 아버지는 내 시야에서 한점 점으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점점점 멀어지면서 그 순간 내 안에 아버지의 허름한 모습으로부터 눈길을 돌렸다는 죄책감을 심어놓았다.

 

   다음 역이 J시라는 안내방송을 듣고 나는 펼쳐두었던 책을 덮었다. 읽으려고만 했지 서울역에서 펼쳐놓은 그대로였다. 이 열차는 잠시 후 J시에 도착하겠습니다. 놓고 내리는 물건이 없도록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기차 안에 다시 울려퍼지는 안내방송을 들으며 선반에 올려두었던 캐리어를 내리려다가 뒤로 넘어질 뻔하자 지나가던 역무원이 캐리어를 대신 내려주고 바르게 세워주었다. 기차 안은 나날이 환경이 좋아진다. 기차를 탈 때마다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다. 안내방송도 예전과 같이 소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혹여 잠이 든 사람들에게 방해라도 될까봐 나직하게 안내를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자식들이 있는 서울에 왔다가 기차를 타고 돌아가는 중에 J시 역을 지나쳐버린 적도 있었다. 웃옷을 벗어 선반 위에 올려두려고 하다 보니 차창가에 겉옷을 걸어둘 수 있게 부착되어 있는 옷걸이가 눈에 띄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옷걸이가 단정하게 창틀 옆에. 그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겉옷을 챙겨입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 기차역에 도착하는 게 얼마 만인가……를 헤아려보았으나 정확한 기억이 나질 않고 오래전 J시의 풍경들이 들쭉날쭉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기차가 J시의 역사로 들어서면서는 그 옅은 기억마저도 흩어져버렸다. 이제 J시의 기차역은 개찰구를 나서면 바로 철로와 마주하게 되었던 예전의 소박한 역사가 아니다. 역무원이 펀치기를 들고 있다가 승객이 내미는 기차표에 구멍을 내주는 일도 사라졌다. 구멍이 뚫린 기차표를 들고 앞으로 들어가면 바로 기차를 타게 되어 있었다. 기차가 도착하고 출발할 때까지 배웅하는 이는 개찰구 앞에 서서, 떠나는 이는 철길 앞에 서서 돌아보거나 손을 흔들었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J시의 공간들은 대체적으로 내가 J시를 떠나기 전의 것들이다. 법원과 제일은행과 소방서와 외곽의 초등학교에서 읍내의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매일 건너던 다리 밑의 천변들. 천변에는 봄이 되면 청포와 양란이 푸르게 싹을 틔웠다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부모와 동생들을 두고 떠나온 J시를 향한 나의 귀환은 서른이 지나서도 줄기차게 이어졌다. 원한이 생기기 전에 떠났기 때문에 늘 순수하게 그리운 곳이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막내마저 J시를 떠난 후로도 나는 J시에 수시로 도착했다. 오랫동안 나에게 집이란 J시의 부모집을 뜻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으니 집에 갔다 오려고, 집에 갔더니……라는 말을 단박에 알아들었을 것이다. J시가 읍이었을 때도 J시로 승격이 되었을 때도 집은 읍내의 풍경 속에 있지도 시내의 풍경 속에 있지도 않았다. 초등학교와는 신작로 길을 걸어서 4킬로미터, 제삿날을 앞두고 엄마가 장을 보러 가는 시장과는 4, 5킬로미터, 내가 다니던 중학교와는 5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그 마을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는 걸어서 다니고 중학교는 자전거를 배워 자전거로 등하교를 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을 떠난 후에 다시 집으로 갈 적이면 서울역이나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세시간 혹은 네시간을 달려 J읍의 기차역에서 내렸다. 역 광장을 걸어나와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 서서 입암이나 장성, 혹은 왕림이나 고창행의 버스를 타고 산굽이를 돌고 다리를 지나 집이 있는 마을 앞에서 내리곤 했다.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오래 기다려야 한다거나 도착한 시간이 한밤중이거나 짐이 많을 때는 간혹 기차역 한켠의 택시 승강장에서 택시를 타기도 했다.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한 아버지가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