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40회

 

   나는 해양대학교에 지원했다가 떨어졌어. 막막했다. 시험에 떨어지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3사관학교에 응시할 기회를 나중에 찾아내긴 했다만…… 처음엔 나는 무조건 자전거로 무전여행을 떠날 채비를 했다. 내가 여행을 떠나겠다고 하니 아버지는 당황해서 자전거가 낡아서 위험하다며 말리셨어. 시험에 떨어진 자식이 혼자 여행을 간다니 난감하셨을 거야. 여행이란 말은 우리들로부터 수학여행밖에 들어본 적이 없는 아버지한테 자전거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했으니. 그때는 형한테 물어봤냐?도 못했지. 형이 서울에 있었으니까. 나는 굽히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은 중학생만 되면 아버지보다 키가 더 컸잖아. 자전거 바퀴를 점검하고 지도를 구하고 망원경도 구하느라 왔다 갔다 바쁜 내 옆에 어쩌지를 못하고 잠깐씩 서 있는 아버지가 유난히 작아 보였어. 집을 나서는데 아버지가 따라 나오며 뒷주머니에 봉투를 넣어주더라. 자전거를 타고 J읍을 빠져나와 순창으로 가는 산길로 접어드는 둔덕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봉투를 꺼내보니 앞장에 밥 굼지 마라,고 쓰여 있더라. 봉투 안엔 구겨진 지폐가 들어 있었다. 순창에서 짜장면을 먹고 그 지폐로 계산을 했던 게 생각난다. 지금이야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길이 정비되어 있지만 그때는 비포장도로와 국도를 탈탈거리며 달려야 했어. 밭에서 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허리를 펴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나를 바라볼 때는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 허리 펼 새 없이 일하는데 혼자만 노는 것 같고. 산마루로 올라가려면 자전거를 탔다기보다 거의 끌고 갔지만 산마루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저 아래 굽이진 길들을 내려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빼곡히 들어찬 나무들, 골짜기들, 새소리들, 솨솨솨 휘돌고 가는 바람 소리들…… 대자연 속에 있으면 많은 것들이 씻겨나가지. 적어도 남 탓은 하게 되지 않아. 내 뜻대로 되지 않은 일도 무슨 뜻이 있겠지, 싶어지면서 품이 커지는 게 느껴져.

   불행히도 그때 내 자전거 무전여행은 사흘 만에 싱겁게 끝났다. 어이없게도 세상 구경하러 나간 까까머리 소년인 내가 간첩으로 몰렸거든. 지금 생각하면 웃고 말 일인데 그때는 심각했지. 하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가 76년인데 그해 여름의 일을 아마 너도 기억할 거야. 내 생일 근처의 일인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 가지를 치는 작업을 하던 미군 장교 두명을 북한군이 도끼로 살해했던 사건이 났었어. 미군 항공모함과 폭격기 편대가 집결되고 미루나무가 베어지고 난리도 아니었지. 다시 전쟁이 나는 줄 알고 바짝 긴장한 아버지는 평소에 뭐 저런 것을 돈을 주고 사 먹느냐고 하던 라면을 상자채로 몇 박스나 사서 장항아리 속에 가득 채워놓기도 했다. 다행히 북쪽에서 유감 표시를 해서 더 큰 일은 피해 갔으나 그때 세상 분위기가 삼엄했다. 학교 다닐 때 간첩 잡는 연습했던 거 생각나냐? 반공 방첩을 주제로 한 표어들이 어디에나 붙어 있었지. 반공의식을 높인다면서 마을마다 실제로 간첩이 나타났다고 가정하고 간첩을 신고하는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어. 이런 사람을 보면 간첩일 수 있으니 신고하라는 안내문이 어디에나 붙어 있었다. 아침 일찍 산에서 내려온 듯이 신발에 흙이 묻어있는 사람, 모자를 눌러쓰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사람, 가게에서 물건 값을 잘 모르는 사람…… 간첩을 발견하고 신고하면 포상이 주어져서 친구들이랑 열심히 모의간첩 잡기에 합세했던 기억이 나네. 단체로 관람했던 영화들도 대개가 반공영화였어. 독고성 신영균 장동휘 허장강 이런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랬지. 남파된 간첩이 남쪽의 친척을 유인해 북을 찬양하게 해서 함께 북으로 가려고 하지만 거꾸로 남쪽 친척의 설득으로 북에서 온 간첩이 자수하는 식의 상투적인 내용들.

   무전여행 중인 내 행색이 꼭 간첩의 형상이었나보더라. 낡은 자전거를 끌고 모자를 눌러쓰고 가끔 망원경을 꺼내 앞산 뒷산을 내다보는 내가 수상하다며 누군가 파출소에 신고한 거야. 잡고 보니 내 자전거 뒤에서 지도가 나오고 지도에 여기저기에 붉은 표시가 되어 있으니 어떤 사람들에겐 내가 영락없는 간첩이었던 거지. J읍에서 멀리 가지도 못했다. 담양을 지나서 광주 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는 길을 체크해보느라고 지도를 보고 있다가 경찰에게 잡혀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나중에 들으니 내가 연행되어 간 다음 바로 J읍의 경찰서에도 동시에 연락이 가서 우리 집으로 사복경찰들이 들이닥쳤다고 하더라. 갑자기 사복경찰이 대문으로 들어오더니 신발을 신은 채 마루로 올라서고 방방을 다 뒤졌다고 하더라.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어이없고 우습기도 하고 참담하기도 한 일인데 그땐 그랬어.

   나중에 아버지가 담양경찰서로 나를 데리러 왔다. 내가 간첩이 아니라 이제 갓 고등학교 졸업한 당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느라고 아버지 손에는 가족사진과 서류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내 학생증과 노트들, 책가방까지 가지고 오셨더라. 아버지는 내가 간첩이 아니라 당신의 둘째아들이며, 이름이 홍이고…… 아버지가 했던 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마음이 어질고 착해서 지 어머니가 힘들어 보이니까 여동생을 등에 업어 기른 아이이며 형과 동생 틈에서 지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늘 양보하며 눌려 지내는 놈인데 무슨 간첩이냐, 등록금 걱정에 학비가 덜 드는 해양대학교에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마음에 구멍이 나서 자전거 여행에 나섰을 뿐인디 무슨 간첩이냐,고 조목조목 말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을 빠른 속도로 많이 하는 것은 그때 처음 보았다. 나는 깜짝 놀랐어. 아버지는 다 알고 있었거든. 내가 해양대학교에 지원한 이유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둘째의 마음까지도.

   그날 담양의 경찰서를 나와서 아버지는 시무룩하게 고개 숙이고 있는 나와 내 자전거를 보더니 이제 무전여행은 계속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당신이나 태우고 집에 가자,고 하더라. 내가 경찰서에 잡혀 있다고 하니까 마음이 급해서 담양까지는 택시를 불러 타고 오셨더라고. 담양에서 J시의 집까지는 자전거로 꼬박 하루가 걸렸는데 담양경찰서에서 나온 게 이미 밤이라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려면 거기서 하룻밤 자야 했어. 뜰에 대나무가 무성하던 여관에 방을 잡고 아버지가 목욕이나 하자, 해서 여관에 딸린 목욕탕에 갔다. 목욕탕 입구에서 옷 보관함 열쇠랑 수건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니 또 어이없게 목욕탕 대기실에 입을 꽉 다물고 있는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어야. 목욕탕 주인의 취향이었을까? 발가벗고 있는 사람들을 대통령이 근엄하게 내려다보고 있는데 웃음이 터져나왔어. 그제야 간첩으로 몰린 게 코미디 같아서 소리 내 웃었다. 아버지가 목욕을 하자고 한 이유가 있더라고. 뜨거운 물이 출렁거리는 목욕탕의 큰 욕조에 들어가 몸을 담그니까 긴장이 풀렸어. 수증기가 뿌옇게 올라오는 탕 안에서 아버지가 내 등도 밀어주고 나도 아버지 등을 밀어드리고 그랬지. 아버지는 나보다 키만 작은 게 아니더라. 등도 좁더라. 오른쪽 손의 손가락 한마디 잘린 거야 늘 보면서 살아왔지만 목욕탕에서 보니 팔꿈치 뒤도 패어 있고 목 아래는 꿰맨 자국이 있고 무릎 뼈 앞쪽은 화상 자국이 있고…… 상처에 비누칠을 해서 문지르는데 마음이 이상했어. 그때 나는 앞으로 아버지 속 썩이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던 거 같구나. 생각해보니 그것이 지금까지 아버지와 단둘이 했던 유일한 여행이었다. 밤에 아버지랑 여관의 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아서 맥주도 마셨다. 별을 쳐다보며 적막하게 앉아 있다가 문득 내가 아버지에게 맥주를 사드리겠다고 했어. 아버지가 맥주 비싸다고 소주 마시자고 했을 때 나는 고집을 부리며 맥주 사드리겠다고 했지. 아버지가 가게를 할 때 여름이면 통에 물을 받아놓고 맥주병을 담가놨던 거 생각나냐? 냉장고가 없을 때였으니까. 무척 더운 여름날에 아버지 보러 가게에 가게 되었는데 읍내에서 온 아버지 아는 분이 다른 사람이랑 가게에 와서 맥주를 시키는 걸 봤다. 아버지가 물통에 담가놓은 맥주병을 따서 잔 두개를 그들 앞에 내놓더라. 아버지가 입고 있는 셔츠가 땀에 젖어서 등에 들러붙어 있었다. 아버지 이마랑 목에도 땀방울이 맺혀 있었지. 그들이 잔에 맥주를 따라 서로 부딪치며 마시는데 어린 마음에 아버지도 저 맥주를 한잔 마시면 시원할 텐데, 싶었어. 그거 생각하느라고 내가 왜 가게에 왔는지를 까먹었던 거 같다. 두 사람은 맥주를 마시고 아버지는 그냥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게 무척 속상하더라. 냉장고도 아닌 물에 담가놓은 그 맥주가 시원하면 얼마나 시원했겠냐만 아버지만 뙤약볕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꼭 시원한 맥주를 사드려야지, 생각했는데 그날 순창에서 그 생각이 난 거야. 그날은 한여름도 아니고 늦봄이었는데 말이다. 맥주에 대한 내 마음을 아버지가 알 리도 없지. 내가 맥주를 고집하자 아버지는 할 수 없이 맥주를 시켰어. 아버지 잔에 맥주를 따르는데 그 콸콸 소리에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는 같이 마시자며 잔을 한개 더 청해서 내 잔에도 맥주를 따라주었다. 여관 마당 담 옆에 배나무가 있었는데 바람이 불 적마다 배꽃이 떨어져서 평상으로 날아들었다.

   아버지가 맥주를 들이켜더니 홍아, 하고 나를 불렀다.

   ―너는 어째 그리 생각이 많냐?

   ―제가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라, 눈치 보지 말고.

   ―……

   ―나는 너가 뭣이든 하고 싶은 일을 함서 살먼 좋겠다.

   ―아버지는 뭐 하고 싶으셨는데요?

   ―……

   ―하고 싶은 일이 뭐였어요, 아버지?

   ―너처럼 자전거 타고 무전여행도 하고 싶고 그랬제.

   내가 다시 묻자 아버지는 너처럼…… 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아버지도 자전거로 무전여행을 하고 싶었다,고?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멀리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했다. 그날밤 아버지가 해준 얘기는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하고는 어울리지 않아서 뒤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주 집을 비울 때도 아버지가 여행 간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어. 어딘가로 돈을 벌러 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사실이 그랬겠지. 좀 이상하긴 해. 우리들은 마음이 조금만 답답해도 어디 잠깐 여행이나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아버지도 그럴 수 있다는 건 상상이 안 되니. 아버지는 맥주를 마시다가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었다.

   ―곧 5월이어요. 오늘은 4월 29일.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낮의 일들이 무척 피곤했는지 맥주를 한잔 마셨을 뿐인데 아버지는 취했다. 사람같이 제대로 살려면 우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하시더라. 대학에 꼭 가야 한다고. 아버지처럼 살아서야 되겄냐? 하셨는데 그때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여관 담을 따라 쭉 늘어선 대숲이나 바라보고 있었다니. 평생 후회가 된다. 왜 그때, 아버지가 어때서요? 하지 못하고 가만있었는지.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한가지밖에 없다고 그것이 대학에 가는 것이라고 하시더라. 이 척박한 시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다고. 목욕을 하고 맥주를 마신 탓인가. 아버지는 서울에서 지내던 때의 이야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가 서울에서 지낸 적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 서울에 남대문이 있는데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시장통이 나오고 시장통에 갈치조림집이 있는데 거기서 일했다고 하더라. 주인이 입암에 살았던 사람이라 아버지에게 잘해줬다고. 그런데 나중에 공비로 몰려서 갈치조림집이 풍비박산이 났다고. 공비요? 내가 묻자 아버지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 그 집 딸이 친구들하고 가끔 갈치조림집에서 모임을 갖곤 했었는데 그 일이 뭔 오해를 산 것 같다고 하더라. 너도 자전거 타고 여행 좀 했다고 간첩으로 몰리지 않았느냐면서. 그 집에 대학생 딸이 있었는데 착해서 학교 끝나면 식당에 와서 팔을 걷어붙이고 식당일을 거들곤 했다고. 아버지는 그 딸을 두고 공부를 많이 헌 사람,이라고 하더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식당일이 끝나면 아버지에게 서울을 구경시켜주었다고. 세종로가 얼마나 넓은지, 남산길이 얼마나 가파른지…… 아버지는 서울의 남대문 근처를 지도처럼 다 꿰고 있었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랑 밤에 명동도 걸었다고.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신 적도 있다고. 아버지가 커피를? 아버지는 그때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나에게 털어놓고 있었는데 나는 아버지가 여대생이랑 커피를 마셨다고? 그딴 생각이나 했으니. 장충동인가에서 하야한 대통령 동상이 끌어내려지는 것도 같이 봤다고. 한번은 극장이 있는 언덕에서 그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친구 몇하고 무슨 얘기들을 하며 웃고 떠들면서 걸어오는데 마주치게 되었다고 하더라. 그 사람이 아버지 앞을 그냥 지나갔다고. 분명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거 같았는데 친구들하고만 얘기하며 지나갔다고. 지난밤에도 가게가 끝난 후 남대문 시장통을 함께 걸었던 사람이었는데 친구들 앞에서 눈길을 피하더라고, 바보 같은 나는 그때도 아니 왜요? 그랬지 뭐냐. 아버지는 친구들 앞에 나를 내놓기가 부끄러웠겄제, 했다. 그 공부를 많이 한 사람한테 아버지가 가르쳐줄 수 있는 건 자전거 타기뿐이었다고 하더라. 밤에 남산으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서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었는데 그 사람이 자전거를 쌩쌩 탈 수 있게 되자 그 자전거 타고 멀리 떠나자,고 했었다고.

   ―왜 안 떠나셨어요?

   ―못 떠났제.

   ―왜요?

   ―나는 집에 왔어야 했으니까.

   아버지는 거품이 남아 있는 맥주 컵을 바라보며 또 공허하게 웃었다. 가끔 그때 생각이 난다. 왜요?라고 내가 물었을 때 나는 집에 왔어야 했으니까, 하며 웃던 아버지 모습이 말이다. 나를 뒤에 태우고도 페달을 굴리는 데 거침이 없던 그때의 아버지의 모습이 그리울 때가 있어. 나는 아버지보다 덩치만 컸을 뿐이다. 그때 아버지를 뒤에 태우고 30분도 못 가 지쳐서 아버지, 우리 지나가는 트럭이라도 잡아봐요, 했을 때 아버지는 나와 자리를 바꿨다.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J시의 집까지 앞자리를 지키던 아버지가 지금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 것도 힘겨워 보일 만큼 약해진 노인이 되었다는 게 실감이 안 날 때도 있어.

 

   아버지가 다시 자전거를 탈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시다면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 여행을 하고 싶다. 단 하루만이라도. 그때처럼 지도 같은 건 이제 필요 없겠지, 휴대전화 내비게이션이 훌륭하니까. 망원경은 있어도 좋겠구나. 설마 지금도 낯선 사람이 동네 뒷산에서 망원경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간첩으로 몰리기야 할라고. 나는 아버지가 북을 앞에 놓고 북채를 드시고 이 산 저 산…… 소리를 뽑는 모습이 좋았다. 아버지의 유일한 낙처럼 보였거든. 가끔 아버지가 텅 빈 거실에 앉아서 사철가를 끝까지 다 뽑으실 때가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플 때도 있어. 저런 끼를 다 접어놓고 사셨구나, 싶어서 말이다. 어머니 말을 들으면 아버지가 가장 오래 집을 비웠던 때가 서울에 갔었을 때인데 그때 집에 돌아오면서 북을 가지고 왔다고 하더라. 집을 비웠다가 돌아올 때는 꼭 시골에서 못 보는 새로운 것을 가지고 왔는데 그때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이 그 북만 들고 오셨다고. 아버지의 북을 자전거 뒤에 싣고 담양에 가볼 수는 있을까? 그 여관이 아직 있는지 알아볼까? 거기 대숲이 아직 있다면 그 앞에 평상을 놓고 아버지가 북을 치면서 사철가를 부르시고 나는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둘 수 있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북을 치면서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옛날처럼 목청을 뽑는 거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