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회
너그 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나한티 말 안 하고 집을 비운 적이 없다.
어쩌다 내가 너그들 보러 서울 가면 맘 편히 사흘을 못 있었잖여. 집에 전화를 허므는 너그 아버지가 말로는 더 있다 오소, 하는디 목소리가 소가 아파서 여물 못 먹고 다리 괴고 앉아 있을 때처럼 힘이 없어야. 나중에 고모 말 들어보믄 어깨 축 처져서는 재미라고는 한개도 없는 사람 얼굴을 하고 있다가 북을 끌어당기고 북채나 잡곤 했다더만. 너도 그 북 좋아하더만. 너그 아버지 북치는 실력은 고수는 저리가라여. 근방에서 따라갈 자가 없을 거네. 노래는 또 얼마나 잘허시냐. 아조 흠뻑 빠져 듣게 한당게. 모르긴 해도 너그 아버지가 본인을 위해서 처음으로 돈을 쓴 것이 그 북 사는 일이었을 거여. 그 북이 너그 아버지 옆에 나보다 더 오래 있었을 것이다. 돌아가면 북 좀 수선해줘야 쓰겄네. 밑에 쪽 가죽이 닳아서 나달나달하지야? 내가 이리 오래 집에 못 가도 너그 아버지 견디시는 것이 신기하긴 하다. 하긴 너가 있으니까. 나 없을 때 고모가 밥을 챙겨주러 와서 보면 전 끼니도 손을 안 대고 있다고 할 때가 많었다. 그때는 가슴이 덜컹했어야. 너그 아버지 밤에 자다가 잠결에 어디 숨었는디 누가 찾아주지도 않으먼 밤새 그러고 있을 것인디 싶어갖고는 황급히 개밥 주러 갈란다, 허고는 집으로 돌아오곤 했네. 개밥은 핑계였네. 사실 개밥은 너그 아버지가 나보다 잘 챙겨주기도 했고.
집 비우는 일이 없어지고 난 뒤로는 너그 아버지 참말로 농사일을 열심히 했제. 시방은 뭐 여기나 저기나 빈 밭도 많고 빈 논도 많다만 그때는 어디 그맀냐. 너그 아버지가 농사에 전념하고부터는 논두렁 한곳도 빈 곳이 없이 콩이 자라고 호박이 자라고 그맀어. 벼 품종 공부도 많이 했제. 그때는 매년 쌀이 부족히서 외국 쌀을 사 먹을 때니까는 맛보다는 소출이 많은 품종 쪽으로 기울고 그맀지. 진짜로 맛이 좋은 맥조 같은 재래종들은 식민지 거치면서 아조 멸종되었응게. 근디 내가 방금 맥조라고 했냐? 그 품종 이름이 기억이 나다니 아직 죽을 때는 아닌가벼. 농촌진흥청인가에서 벼 품종 개발을 많이 했어야. 너그 아버지는 거그 사람들 말을 귀담아듣고 그거 일구는 선구자였당게. 봄에 모판에 씨 뿌리서 키워서 심어도 병에 약하믄 장마 지고 태풍 부는 여름 지남서 다 쓰러지고 죽어번진게 병에 강한 거를 최고로 쳤제. 통일벼 품종이 나왔을 때 생각이 나네. 사람들이 통일벼를 좋아하질 않었어야. 한번 심어보니 밥맛이 영 아니었거든. 근디 일반벼는 도열병에 걸리먼 끝이라 정부에서는 도열병에 강한 통일벼를 심으라고 대대적인 정책을 폈제. 사람들 먹을 양식이 부족했을 때니까 정부 목표는 맛보다는 양이었다. 남지는 않더라도 어쩌든 자급자족이라도 할 수 있기를 희망했을 때였으니까 그 목표에 소출이 높은 통일벼가 합당했응게. 그때 생각허니 웃음이 나오는구나. 볍씨 담글 무렵에 출장 나온 공무원들이 볍씨 담근 그릇을 확인해보고는 통일벼가 아니므는 담가놓은 볍씨를 건져내고는 통일볍씨로 담가주고 갔당게. 지금 기준으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겄지마는 그때는 그맀구만. 나도 참말 통일벼가 맘에 안 들었다. 밥을 허먼 찰기가 없어서 밥알이 부수수 흩어징게로 꼭 내가 밥물을 못 맞춰 그런 거 같고 밥이 씹으면 단맛이 남아야는데 아무 맛도 안 나고 싱겁더라. 그리서 너그 아버지가 담가놓은 통일볍씨를 내가 일반벼로 바꿔놓았는디 진흥청 사람이 가정방문 와서는 통일볍씨로 바꿔놓아야. 그들이 간 뒤에 내가 얼른 다시 일반볍씨로 바꿔놨더마는 이번엔 너그 아버지가 다시 통일볍씨로 바꿔놓아서 대판 싸우는디 그 말수 적은 너그 아버지가 나를 설득시키는디 내가 졌당게. 내가 통일벼 키가 작아 싫다니까 키가 작아서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다고 하고 내가 너그 아버지 진밥 좋아하는디 밥이 푸슬푸슬하다고 하니까 지금부터는 진밥 안 좋아하겠다고 허고 내가 낫으로 나락 벨 때 낱알이 다 떨어진다고 하니까 그러고도 통일벼 수확량이 일반벼의 세배가 된다고 허고…… 당할 재간이 없더랑게. 너그 아버지 말이 틀린 말이 없었제. 너그 아버지 말 따라 통일벼 심은 사람들이 이게 나락이여 풀여? 할 만큼 통일벼 키가 작았지마는 작으니까는 태풍에도 잘 쓰러지지도 않더랑게. 뭣보다도 이전의 품종보다 소출이 월등허게 많었다. 통일볍씨 나온 뒤로 우리가 쌀이 모자라는 일이 없어졌지 싶어. 그타고 내 말이 틀렸다는 건 아녀. 특히나 밥맛이 영 아니었다니까. 어찌거나 간에 다수확 품종의 시초가 통일벼여. 밥맛 없기로 소문이 나니까는 통일볍씨도 새로 연구되야서 새 품종이 나오면 동네에서는 너그 아버지가 맨 먼저 배워 와서는 판에 씨 뿌려서 길러보고 사람들한테 알켜주고 그맀네. 품종 이름들도 어찌나 많은지 만석벼, 태백벼, 용주벼, 남영벼, 화성벼…… 안 심어본 품종이 없당게. 나중에 살 만했졌을 때는 수확 양보다는 밥맛이 좋은 특수미를 선호히서 일품벼 품종을 심고 그맀다. 그 뭐라더냐 고시히카리인가 하는 거보다 더 맛이 좋은 쌀을 만들어본담서 아주 푹 빠져 농사를 지었제. 너그 아버지가 그러든디 우리 재래종들이 계속 연구되었어야 하는디 그맀으믄 우리 땅에 맞는 품종이 제대로 개발되얐을 텐디 우리 땅이 식민지가 되는 통에 맥이 끊긴 세월이 길다보니 재래종 싹이 잘려버렸다더만.
내 생각은 농사는 사람이 짓는 것이 아닌 것 같어. 나락 하나가 열매 맺는 디 사람 손길이 여든여덟번 간다고 허질 않냐. 그렇게 해도 하늘이 도와야 제대로 수확을 허제 안 도와주먼 다 쓸려가버리서 헛것이 돼버린당게. 게다가 수매할 때 등급을 먹이잖여. 특등급부터 등외급까지 있는디 이등급으로만 넘어가도 속이 상해 잠이 안 와야. 그래도 수매에 응해야 돈이 들어오니까 수매 날짜가 정해지먼 거기에 맞춰서 아침에 나락을 널어서 말리고 해지믄 그거 다시 다 담고 하니라 등뼈 세울 여유가 없었네. 너그 아버지는 특등급을 받곤 했어야. 태풍 불고 가뭄 들어 동네 사람들 벼가 대개가 다 등외급으로 밀려날 때도 너그 아버지는 최소한 2등급은 받고 그맀어. 농사지음서 상도 많이 받었다. 너그 아버지가 받은 다수확 상을 쭉 걸어놓으면 방 벽이 가득 찰 것여. 농사짓는 집이 한두집이냐? 그중에서 뽑혀서 상 받는 것인디 얼마나 소중허냐. 그냥 뽑히간? 심사도 아주 까다롭당게. 같은 논이라도 이쪽은 잘 되고 저쪽은 좀 딸리고 헌다. 심사받는 농군은 잘된 쪽을 내보이고 싶고 딸리는 쪽은 안 보이고 싶고 그러지. 밀당이 아주 심했다. 추천받은 논으로 심사위원은 특별히 잘된 곳은 제외시키고 또 너무나 못나 보이는 곳도 빼고 평균작이다, 싶은 곳에 줄을 치고 벼의 포기를 세고 이삭도 세고 참말로 낱알 수까지 세당게로. 그르케 다 합히서 논 전체의 소출량을 셈히서 상을 정하는 것이니 그게 어디 보통 일이냐. 내가 다수확 상 받을 때마다 벽에다 걸어놓으면 너그 아버지가 바로 떼버려서 그 일로 싸울 때도 있었네. 내 이름은 없었지마는 나도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농사지었응게 나한티 주는 상이기도 허지 않냐, 나는 걸어놓고 싶다, 해도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 같더라. 너그 아버지는 다수확 상의 상금을 좋아했던 거 같고 속으로는 이게 뭔 상여? 생각했던 거여. 상은 학교에서 받는 것이 상이람서 너그 큰오빠가 받은 우등상에 개근상 같은 것을 쭉 걸어놓고…… 그러고 보니 너는 공부를 못해서 걸어둘 상도 없고 지각이 잦어서 개근상도 못 받었지야? 지각 세번이면 결석으로 쳤지 않냐? 너그 형제들 사이에 학교 댕김서 우등상 못 받아 온 아는 너뿐이었던 같은디? 그때도 벽에 걸어둘 상이 없어 못 걸고 지금은 니가 학사모인가 쓰고 찍은 사진을 안 주니까 못 걸고……
니 여동상 이삐 땜에 아버지한테 혼난 적이 있는디 이삐가 초등학교 2학년 때던가. 언제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쯤이었을 것이다. 가물가물하다. 이제 이런 일들 다 잊어버릴랑가? 잊어버릴 일만 남은 거 같기도 해서 허전해야. 이르케 다 잊어버리고 나믄 뭣이 남으까? 빈손으로 간다더니만 진짜 그런가벼. 가을이었제. 추수철이라 어두워질 때까지 논에서 일할 때가 많었다. 일허고 집에 와서 저녁밥 짓고 그러다보면 늦은 밤에 밥 먹기가 일쑤였어. 한번은 들에서 돌아와봉게 이삐가 밥을 지어놨어. 밥 부드럽게 한다고 돌확에다 보리쌀까지 갈어서 말이다. 이삐가 기억할라나 모르겠네. 처음으로 해본 것일 텐디 밥이 잘 지어져 있었다. 양재기에다가 고추 썰어놓고 간장으로 간 맞춘 멸치조림까지 밥물 위에 얹어서 잘 익혀두었더라고. 내가 깜짝 놀라서는 어린 이삐한테 이것을 어떻게 했냐? 물으니까는 이삐가 엄마가 하는 거 보고 따라 했다고 했제. 너는 이삐보다 세살이나 많은디도 그때껏 밥을 할 줄 몰랐는디 너 아래의 이삐가 밥을 한 것이다. 지 생각에 들에서 일허고 엄마가 늦게 들어와서 저녁밥까지 하는 게 고돼 보이는데다 저녁밥이 너무 늦은게로 한번 해본 것 같은데 밥이 잘 지어진 거여. 나는 이제 얼른 밥을 해야것다 하고 대문에 들어섰는디 집에서 밥 냄새가 나니 얼마나 반가웠겄냐. 쌀 조금 섞은 보리밥이 한솥단지 아주 잘되어 있응게 허리가 펴지고 뭔 선물 한보따리 받은 거같이 마음이 환해짐서 기뻐가지고 아이고 니가 밥을 다 했냐…… 험서 이삐를 보듬어줬더만 그걸 보고 있던 니 아버지가 화를 내야. 어린것한테 밥을 시켰다고. 내가 시켰간? 지가 한 것이제. 하여튼 이삐는 밥 잘 지어놓고 너그 아버지한테 칭찬은커녕 밥허지 마라! 소리를 들었제. 이삐가 울먹울먹할 정도로 너그 아버지가 화를 내야. 너는 그때껏 학교에서 오지도 않고 있었을 때다. 아니 왜 그려요? 어린 게 엄마 생각한다고 밥 좀 해놓은 거 갖고…… 내가 따지니깐 어린것한테 벌써 밥하는 거 시키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때 참 말문이 막히더라. 딸내미는 아조 오야오야…… 밥 짓는 거 보는 게 안쓰럽고 그때껏 들에서 일허고 들어온 내가 밥 짓느라 종종거리는 것은 당연한 것여? 내가 따질 때는 암 말도 않더니 나중에 그리야. 미안하담서 고모가 어려서부터 자기 때문에 밥 짓느라 종종거리는 게 떠올라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말이라고. 어린 이삐가 밥 지어놓은 거 보니 너그 고모 생각이 나고 저 애가 누나 같아지면 어떡하나, 싶었던 모양이여. 하여간에 나는 너그 아버지 눈치 보여서 너나 이삐한테 밥 좀 해라,는 말을 못 했네. 그렇게나 딸내미가 밥하는 게 싫으믄 본인이라도 하등가. 나 없어도 밥 지어 먹을 수 있도록 내가 너그 아버지한티 가르쳐야 했는디 난 그것을 못 했네. 너도 알다시피 너그 아버지는 음식도 웬만한 것은 만들어야. 너그들 어려서는 봄이 올 무렵에는 겨우내 기름것을 못 먹어 어지럽다고 읍내 고깃간에서 돼지갈비뼈를 푸짐하게 사다가 양념을 해서 재두었다가 감나무 밑에 화덕에 장작불을 피고 그 위에 넓은 석쇠에 걸어놓고 그거 구워서 너그들 먹이기도 하고 그랬제. 돼지뼈 넣고 김장김치 숭덩숭덩 썰어 넣은 국밥도 그 화덕에 끓이고. 오래 고으면 뼛국물이 뽀얗게 우러나와서 맛도 고소하제. 근디도 너 아버진 밥은 못헌다. 밥물을 못 맞춰야. 옛날처럼 아궁이에 불질해서 밥허는 것도 아닌데 그걸 못햐. 이상헌 일여. 압력솥 나왔을 때 그거 동네에서 첨으로 써본 사람이 나였다. 나는 압력솥이 뭣인지 알도 못하는데 너그 아버지가 사왔더라고. 그 솥 참말로 용하더라. 어쩌면 그르케 밥이 찰지게 되는지. 압력솥이야 뚜껑 맞추기도 힘들고 물 맞추기도 솥하고는 좀 달라서 못할 수 있다고 치자. 요새 전기밥솥은 쌀 안치고 버튼만 눌러두면 지가 스스로 다 허고 심지어 밥 다 되면 다 되었다고 말도 허잖여. 그런디도 너그 아버지는 밥을 안쳐볼 생각을 못혀. 지금 말허다보니 못허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판가름이 안 되는구나. 그렇지 않냐? 경운기도 한나절 만에 척척 맞춰서 운전해서 대문 밖으로 몰고 나가던 사람인데 말이다. 남자들은 참말로 뭐슬 모린다. 의식주 중에서 식을 혼자 해결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자유로워지는지를 몰라야. 그걸 알면 때마다 밥은 언제 차리나 눈치 볼 것도 없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안 먹고 싶으면 안 먹고…… 혼자 지내는 것이 뭣시 아쉽것냐. 내가 너그 아버지한테 밥하는 걸 못 갈쳐줘서 지금 니가 거기 있는 것도 같네. 여태도 못한 일을 앞으로 어찌하겄니. 얘기허다보니 너그 아버지가 밥을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 아닌가 싶기는 하다마는…… 하긴 너그 아버지한티 밥 짓는 거 가르치려고 들었다먼 너그 고모한테 진작에 내가 쫓겨났제 싶긴 허다.
밥은 안 했어도 너그 아버진 뒤늦게 농사일에 열심히 매달리고 익혔제. 줄모 심을 때는 못줄을 잡고 사람들 흥이 나라고 노래도 부르고 남보다 먼저 논에 물 댈라고 동도 안 텄는데 삽 들고 논에 나가 물꼬를 트고 그 온화한 성품인 양반이 딴 논 사람들하고 물싸움을 허고 추수 다 끝난 논에 나가서 떨어진 벼이삭까지 다 주어오고 농한기 때는 농기구들을 참말로 윤나게 씻고 닦아 걸어놓고 봄이 오지도 않었는디 논에 두엄도 남들보다 며칠은 더 일찍 내가고 여름이믄 풀 베어다가 퇴비 만들고 그맀네. 객토 헌다고 고창까지 가서 좋은 황토 실어다가 논에 쏟아붓고 너그 아버지가 갈아놓은 논은 참말 보기 좋아서 사람들이 지나가다가도 저 논은 넝뫼 양반이 갈았구먼…… 하구 알아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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