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44회

회사에 돌아와보니 박대리가 자리에 없었다. 형민은 책상 밑에 슬리퍼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줄넘기를 하러 갔을 거라고 짐작했다. 형민은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왔다. 옥상에서 단 둘이 만나면 더 오해를 받을 것 같았다. 삼십분이 지난 뒤 박대리가 내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사원 한명이 박대리를 보고 물었다. 와이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점심에 뼈해장국을 먹었잖아요. 그게 칼로리가 장난 아니에요.” 박대리가 말했다. “그럼 같이 먹은 우리는 뭐예요?” 사원이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같이 점심을 먹은 몇몇 직원도 따라 웃었다. 형민은 여섯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에서 박대리를 마주쳤는데 형민은 자기도 모르게 박대리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려주었다. 형민은 아내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아내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근처에서 기다릴 생각으로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을 두바퀴 돌았다. 그리고 미끄럼틀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거기 앉으면 아내의 집이 보였다. 앞 동에 가려서 거실은 보이지 않고 딸의 방만 보였다. 딸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형민은 창문을 열면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이는 집을 사는 게 소원이었다. 시끄럽기만 하지 그게 뭐가 좋아. 집을 보러 다녔을 때 아내는 그렇게 투덜댔다. 그때 형민은 아내에게 학교 앞에서 살던 친구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친구는 쉬는 시간에도 연필을 깎으러 집에 가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고. 다른 친구들의 연필까지 들고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던 그 친구의 뒷모습이 그렇게 듬직해 보였다고. 늦어? 형민은 아내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운동장을 다시 한번 걸었다. 한바퀴. 두바퀴. 세바퀴. 그러자 제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형민은 운동을 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수상한 사람이 운동장을 서성인다는 신고가 들어와서요. 운동장 개방 시간이 지났으니 나가주세요.” 남자가 말했다. 운동장을 나오면서 교문 옆에 붙어 있는 안내판을 보니 개방 시간이 일몰까지라고 적혀 있었다. 형민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형민은 예전에 아내와 종종 갔던 막국숫집으로 갔다. 막국수 두그릇과 보쌈 작은 것을 묶어서 이만원에 팔았는데 그걸 딸과 같이 셋이 먹으면 양이 딱 맞았다.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였더라. 거기 가서 막국수에 막걸리 한잔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도착해보니 감자탕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형민은 잠깐 망설이다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뼈해장국 일인분에 소주 한병을 주문했다. 칼로리가 장난 아니에요, 하던 박대리의 말이 들리는 듯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가 츱츱 소리를 내며 뼈를 빨아 먹었다. 또 그 옆 테이블에서 감자탕을 먹던 남녀 커플도 츱츱 소리를 내며 뼈를 빨아 먹었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직 뼈를 빨아 먹는 소리만 들렸다. 츱츱. 츱츱. 형민은 그 소리를 듣다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자기도 일부러 소리를 내어 뼈를 빨아보았다. 양손으로 뼈를 들고서. 아내에게 전화가 온 것은 마지막 잔을 마실 때였다. 아내가 어디냐고 묻기에 형민은 회사라고 거짓말을 했다. 형민의 아내는 조만간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릴 것 같다고 말했다. 몇몇 부모들은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도 하는 것 같은데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애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웃고 있더라고. 그걸 보니 화가 참아지지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어. 내가 알던 아이가 아닌 것 같아. 뭐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형민은 아내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형민은 사회자가 보여주었던 이마의 상처가 떠올랐다. 브레이크 고장 난 자전거. 그 자전거에 자기가 타고 있었더라면. 전봇대를 들이받아 이마가 찢어진 게 자기였다면. “나연아.” 형민은 아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오래간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미안해.” 형민은 아내에게 사과를 했다. 전화를 끊고 나자 형민은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던 부부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자꾸 떠올랐다. 왜 그들이 불쾌하게 느껴졌는지 형민은 알 것만 같았다. 그런 사과는 조용한 곳에서 했어야 한다고, 까페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처음에 형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 개소리였다. 형민은 소주 한병을 더 시켰다. 그리고 술을 한잔 따라 마셨다. 또 한잔을 따라 마셨다. 그들을 불쾌하게 생각해야지만 자신의 죄책감이 줄어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 집 아이와 내 아이는 다르다고. 당신들의 죄책감과 나의 죄책감은 결이 다르다고. 형민은 소주를 마시고, 하나 남은 뼈를 들고 소리 내어 빨아 먹었다.

다음 날 부장은 박대리를 회의실로 불렀다. 한참 후에 회의실에서 나온 박대리의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눈치 없는 직원 한명이 점심에는 뭐 먹을래요? 하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다음 날, 박대리는 출근하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에 토스트를 사 먹는데 청년이 형민에게 박형민 차장이냐고 물었다. 형민이 그렇다고 했더니 누군가 오늘 아침 토스트 값을 미리 내고 갔다고 말해주었다. “혹시 검은색 뿔테 안경을 썼나요?” 형민이 묻자 청년이 그렇다고 했다. 박대리가 왔다 갔구나. 형민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출근을 해보니 부장이 형민을 불렀다. 그러고는 사직서를 보여주었다. “출근을 해보니 책상에 이게 있었어.” 박대리는 조과장에게 백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박대리가 서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조과장이 세달 후에 원상복귀를 해놓겠다고 그때까지만 눈감아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백만원을 주었다고 박대리는 부장에게 고백했다. 형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겨우 백만원이라니. 매일매일 줄넘기를 하는 놈이. “겨우 백만원이지?” 부장이 형민의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언제 왔다 갔는지 박대리의 책상은 정리가 되어 있었다. 서랍을 열어보니 줄넘기가 없어졌다. 형민은 복도로 나가 계단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쓰레기통에서 줄넘기를 못 보았냐고 물었다. 아주머니가 계단 끝에 있는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안에 줄넘기 같은 게 버려져 있긴 했다고. 형민은 쓰레기통에서 줄넘기를 꺼냈다. 그리고 옥상에 올라가 줄넘기를 해보았다. 바보 같은 놈. 겨우 백만원이라니. 다음 날,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리는 날이라 형민은 월차를 냈다. 드라이클리닝을 맡긴 양복을 찾아왔다. 학교로 가는 길에 구둣방에 들려 구두도 닦았다. 구둣방에 앉아서 건너편을 보니 경찰지구대 간판 위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당신과 함께한 36년이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 옆에 경찰복을 입은 남자의 사진이 보였다. 36년이라니. 형민은 24살에 경찰이 된 젊은 남자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놀라지 마.” 아내가 말했다. 그런 말을 먼저 하면 누구나 놀라지 안 놀라겠어. 평소 같으면 형민은 그렇게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형민도 알았다. 그래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괜찮아. 이야기해.” 학교에서 연락이 왔는데 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가방도 그대로 둔 채. “일교시 영어 수업이 끝난 뒤 화장실을 간다며 나갔는데 그뒤로 돌아오지 않았대.” 아내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