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45회

형민은 택시를 타고 학교로 갔다. 경비실에 들러 출입증을 받은 다음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아내가 운동장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쪽으로 가보니 벤치에 아내가 앉아 있었다. 옆에는 딸의 책가방이 놓여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만났어?” 형민은 아내의 옆으로 가 앉으며 물었다. “응.” 아내가 대답했다. 그러면서 책가방 옆에 있는 운동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신발도 안 갈아 신고 나갔대. 실내화를 신고 어딜 갔을까?” 운동장에는 체육수업이 한창이었다. 야구를 하는가 싶어 자세히 보니 소프트볼 경기 중이었다. 수비를 하는 팀은 빨간색 조끼를, 공격을 하는 팀은 노란색 조끼를 입었다. 투수가 잘 던지는 것인지 아이가 못 치는 것인지 암튼 싱겁게 삼진이 되었다. 형민은 딸의 체육대회를 딱 한번 보러 온 적이 있었다. 딸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는데, 형민은 그날 감기 몸살에 걸려 회사에 출근하지 못했다. 오전에 아내가 끓여준 쌍화탕을 먹고 한숨 잤더니 생각보다 몸이 괜찮아져 오후에 체육대회를 구경하러 딸의 학교로 갔다. 마침 딸이 백 미터 달리기를 앞두고 있었다. 형민은 휴대폰으로 딸이 달리는 것을 녹화했다. 딸은 그날 6명 중 6등을 했다. 처음에는 4등으로 달리다가 5등으로 밀리자 딸은 뛰는 것을 포기했다. 거의 걷다시피 결승선을 통과했는데, 그 모습에 형민은 실망을 했다. 저녁에 탕수육에 짜장면을 시켜먹으면서 형민은 딸에게 달리기를 하던 영상을 보여주었다. 딸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웃었다. 형민이 왜 뛰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딸이 대답했다. 5등이나 6등이나. 어차피 꼴등인데 뛰어서 뭐해. 그 말에 형민이 화를 냈다. 밥 먹지 말라고. 어차피 똥 될 거니까 밥 먹지 말라고. 밥 먹는 아이한테 화를 냈다며 아내가 형민에게 뭐라고 했다. 그리고 딸이 달리기를 못하는 것은 아빠를 닮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러니 본인 탓을 하라고. 아내는 달리기를 잘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내는 늘 계주의 마지막 주자를 담당했다. 형민의 어머니는 달리기를 잘하는 것까지 자신을 닮았다며 며느리를 예뻐했다. 그날 이후로 형민은 딸의 체육대회를 보러 간 적이 한번도 없었다. 세명의 아이들이 방망이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삼진으로 물러났고 공수가 교대되었다. 휴대폰이 꺼져 있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형민은 딸에게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보았다. 곧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딸이 없는데도 위원회에 참석해야 하는지 형민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가서 사과를 하고, 또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고, 아내는 말했다. 형민의 아내는 딸의 운동화를 책가방에 넣었다. 책가방이 불룩해졌다. 형민이 그 가방을 어깨에 멨다. 그리고 학교 건물로 걸어갔다. 회의실로 가보니 학부모들끼리 언쟁을 하고 있었다. 들어보니 누군가 변호사를 대동하고 온 모양이었다. 은주의 부모님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담당선생님이 들어와 십분 후에 회의가 시작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형민의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형민의 딸은 왼쪽 발과 왼쪽 팔에 깁스를 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던 딸은 파란불로 바뀌어도 건너지 않았다. 그리고 빨간불로 바뀌자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었다고 딸을 친 택시기사가 말했다. 처음에는 보험사기꾼에 걸려든 줄 알았다고. 그랬는데 교복을 입고 있어서 가슴이 덜컥했다고. “내 딸도 고등학생이거든요.” 형민과 형민의 아내는 택시기사에게 사과를 했다. 의사가 다른 검사도 해봐야 하니 하루 이틀 정도 병원에 입원할 것을 권했다. 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병실로 옮겨진 다음에는 계속 잠만 잤다. 형민이 아내보고 구내식당에 가서 뭐 좀 먹고 오라고 했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삼킬 수 없을 것 같다며. 형민은 매점으로 가서 여러가지 음료수를 샀다. 아내가 그중 무엇을 좋아할지 알 수 없어서. 봉지를 열어 보이며 하나 고르라고 했더니 아내가 배로 만든 음료를 골랐다. 형민은 갈아만든 수박이라는 음료를 마셨다. 처음 마셔보는 음료였다. 형민과 아내는 딸의 침실 아래에 있던 보조침대를 꺼내 거기에 나란히 앉았다. 옆 침대에 누워 있던 할머니가 병문안을 온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커서 엿듣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엿듣게 되었다. 들어보니 노인정 친구인 영순이 할머니에게 돈을 삼백만원 빌려주었는데 그만 그 할머니가 치매에 걸린 모양이었다. “치매는 치매고. 돈은 돈 아니겠어.” 할머니는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가 그럼, 그럼, 하고 대꾸했다. 며칠을 고민한 할머니는 영순이 할머니의 아들을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차용증이 있느냐고 영순 할머니 아들이 되물었다. “싸가지 없는 놈. 영순네가 그 아들 때문에 엄청 속 썩었지.” 친구가 말했다. 그 말에 할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집도 그 놈이 팔아먹은 거잖아.” 할머니는 노인정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아들을 찾아갔다. 돈을 빌려줄 때 옆에 있던 할머니들이었다. “사람은 못 믿어요. 차용증 가지고 와요.” 아들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내가 며칠을 잠을 못 잤어. 분해서.” 그렇게 며칠 속앓이를 하던 할머니는 아들네 집 현관에 오줌이라도 뿌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만 돈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종이컵에 오줌을 담아 영순이 할머니 아들네를 찾아간 할머니는 현관에 오줌을 뿌렸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오다 그만 미끄러져 엉치뼈에 실금이 갔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끝나자 입구 쪽에서 누군가 흐흐흐 하고 웃었다. 형민은 딸의 얼굴을 보았다. 잠을 자는 척하며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형민의 아내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엿들었는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병실 안으로 깊게 햇빛이 들어왔다. 형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내렸다. 아내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잠깐 내려갔다 오겠다고 했다. 눈치를 보니 처제가 온 듯했다. 형민은 내려간 김에 저녁도 먹고 오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이 먹어야 그 다음에 내가 먹으러 가지.” 그 말에 아내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형민은 자고 있는 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입술 옆에 작은 흉터가 보였다. 처음 보는 흉터였다. 형민은 그 흉터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사실에 당황을 했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왼쪽 팔꿈치에 다섯바늘을 꿰맨 적은 있었다. 그때 딸의 자전거를 뒤에서 잡고 있던 사람은 형민이었다. 놓지 마. 아빠, 놓지 마. 어린 딸은 말했다. 그때 장난기가 발동한 형민이 딸의 앞으로 뛰어가면서 말했다. 이미 놓았지. 아빠 잡아봐라. 딸이 넘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딸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면서 형민은 이런 생각을 했다. 나중에 딸이 속을 썩이면 이 순간을 기억해야지. 나 때문에 다친 이 순간을. 하지만 그때 생각한 속 섞는 일은 이런 게 아니었다. 제 엄마에게 소리를 지른다거나, 공부하기 싫다며 게임에 빠진다거나, 도서관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친구들하고 놀러가는 것. 형민은 그런 것만 상상했다. 형민은 딸의 입술 옆 흉터를 만져보았다. 그때, 딸이 눈을 떴다. “괜찮아.” 형민이 말했다. 딸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형민이 다시 한번 말했다. “괜찮아. 배는 안 고파?” 그러자 딸이 겨우 입을 열었다. “미안해, 아빠.” 형민은 고개를 끄떡였다. “무서워서 그랬어. 무서워서.” 딸이 다시 한번 말했다. 형민은 딸의 오른손을 잡아보았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물티슈로 닦아줘야겠다, 형민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