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회
자네 아버지가 들고 온 책 속에서 프랑스의 보농이라는 지명을 읽었네. 그런 날이 있었네. 자네 아버지가 어느날 책을 한 박스 들고 나타났던 날 말이네. 내가 이게 다 무슨 책이냐고 물으니 자네가 외국에 나가 이년쯤 살다 올 것이라 살던 집을 정리하는데 책을 둘 데가 없어서 자네가 여기 자네 아버지 집으로 트럭에 실어 보냈다고 하더군. 서울의 자네 책들이 모두 J시로 실려 왔다고. 내가 뭐든 읽어대는 걸 유심히 본 자네 아버지가 J시로 내려온 자네 책들을 무작위로 박스에 담아 하나씩 내게 가져왔소. 내가 다 읽었다고 하면 가져가고 다른 책들을 박스에 담아 가져오곤 했지. 그렇게 나는 자네가 보낸 책들을 읽었네. 아마 자네 책들을 내가 거의 다 읽었을 것이네. 자네 아버지가 이제는 바꿔올 책이 없다고 할 때까지 그 일이 계속되었거든.
자네는 혹시 그 보농이라는 곳에 가본 적 있는가?
없다고?
거기가 어디냐고?
정말 모르는가?
놀라운 일이군. 나는 자네 책장에 있었다는 그 책을 읽고 그 마을이 궁금해서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적이 있었소. 어떤 마을이길래 두 사람이 그렇게 살다 갔는지 알고 싶었지. 그런데 자네는 아예 보농을 모르다니? 자네 책장에 있던 책이라고 해서 자네가 당연히 알 줄 알았네. 고르가 쓴 그 책을 기억하나? 얇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었지. 짐작하기로 보농은 여기 같은 시골 마을인 거 같았지. 고르라는 인간은 83세였고 도린이라던가 하는 그의 아내는 한살 아래인 82세였는데 그 두 사람이 보농에서 나란히 침상에 누운 채 죽어 있었다,고 쓰인 그 책을 기억하나? 각자 따로 죽기를 원하지 않았던 두 사람이 택한 죽음의 방식에 세계인이 놀랐다고 쓰여 있었네. 나는 그때껏 그 사람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소. 그들이 20년 동안 함께 살았던 보농의 그 집 마당에 자신들을 묻어달라고 써놓았던 유서를 먼저 알았지. 그 유서를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지. 죽어서도 함께 묻어달라고 한 두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궁금해서 맹렬히 그 두 사람을 알고 싶어하던 시간이 있었네. 고르가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이라는 것,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생태주의를 심층 분석해온 철학자이며 언론인이라는 것, 도린 또한 그보다 더 높은 지식을 쌓은 지성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정착 시절이 있지 않나. 그들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더군. 프랑스에 정착해 가장 활발하게 글을 쓰고 활동을 할 때 도린이 척추수술로 인한 깊은 병에 걸리네. 자네도 이제 기억이 나는 모양이군. 그렇네. 아내의 병을 알고 난 후 고르가 선택한 삶 말이네. 누구나 쉽게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지. 고르는 그동안의 모든 사회활동을 접더군. 그리고 보농이라는 시골 마을로 아내 도린과 함께 들어가네. 그곳에서 아내와 투병 생활을 함께하지. 23년 동안 말이네. 고르는 보농에서 아픈 아내를 간병하며 새 삶을 살지. 파리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아내에게 이로운 보농으로 와서 아내에게 이로운 음식을 먹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유기농산물들을 재배하면서 환경주의자가 되기도 하지. 그에게 생태주의란 이론이 아니라 삶의 양식이 되지. 아내를 위해 대체요법을 연구하지. 고르는 아픈 도린으로 인해 파리 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오지만 성찰의 공간과 시간을 얻었다고 하더군.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이네. 고르는 쓰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본질적인 단 하나의 일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내가 전쟁을 만나지 않고 내 인생을 살 수 있었다면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이 그런 삶이라는 것을 나는 그 책을 읽으며 깨달았지. 그들이 함께 이 세상을 떠나기 일년 전에 고르가 아내 도린에게 썼다는 편지글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지.
당신은 곧 여든두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외우기에는 턱없이 아름다운 문장인가? 그 책을 읽은 건 나에게 행운이었지.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니까. 그들의 보농에서의 삶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네. 보농에서 그들이 처음 살던 집은 도린의 치료를 위해서 명상하는 집처럼 설계를 한 집이었는데 그곳에서 겨우 3년을 살았다네. 예상치 못하게 근처에 원자력발전소가 생겨서 쫓겨나듯이 이사를 가야 했어. 그들은 낡은 집을 다시 구해 이사를 하고 새 울타리를 만들고 풀밭에 나무를 심지. 오늘은 나무 이백그루를 심었다,고 적어놨더군. 배고프고 병든 길고양이를 집에 들이고 먹이를 주고 치료를 하지. 다행히도 도린의 몸이 조금 회복되면 그들은 갈 수 있는 만큼만 여행을 가기도 하더군. 갈 수 있는 만큼 말일세. 그들은 멀리 갈 수는 없었다네. 도린의 병은 차가 흔들리면 두통만이 아니라 온몸을 통증 속에 빠지게 했으니까. 도린은 고통을 받아들이며 좋아하는 것들을 조금씩 내려놓지. 그런 중에도 고르는 도린의 격려를 받으며 계속해서 글을 쓰지. 그게 그들이 보농이라는 곳에서 보낸 삶이었어. 서로에게 집중하고 충실하게 보낸 시간들. 그들의 유서를 기억하나? 그 책의 마지막 문장이라고 할 수 있는 유서엔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네,라고 쓰여 있었네. 그들의 유서를 읽은 후에 나는 신문 읽는 일보다 자네 아버지가 가져오는 책들을 읽는 일이 더 흥미로웠어. 책 읽는 일이 내 앞에 당도한 막막한 시간들을 밀어내주더군. 자네 집 작은방에 있다는 책장은 본 적이 없지만 거기에 꽂혀 있는 책들은 내가 다 읽었네. 덕분에 이 시골 마을에서 내가 한 시절 잘 지냈네. 그 인사를 이렇게 할 수 있게 되다니. 궁금한 게 있는데 낚시하는 법, 새 기르는 법…… 자네는 그런 책을 왜 읽었는가? 한번은 자네 아버지가 가져온 책 박스에서 그런 책들이 쏟아져나오더군. 자라 키우는 법이란 책도 있었네. 그 책들을 나도 읽어보았지. 유독 그런 책에는 자네가 밑줄을 그어놓은 곳이 많았어. 왜 여기에 줄을 그어놨을까? 한참을 생각하며 읽어봐도 이유를 알 수가 없더군.
응?
소설을 쓸 때 필요해서 읽은 책들이었다고?
그래? 아…… 그렇다면 이제야 알겠군. 자네가 쓴 책도 읽었는데 가끔 여기저기 틀린 곳이 있어서 책을 읽는 데 방해가 될 때가 있었네. 자네가 쓴 초기작으로 기억되는데 백합 씨를 뿌리는 장면이 나왔네. 백합은 구근이네. 구근은 심는 것이지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니야. 지적을 하려는 게 아니라 책을 읽다가 그런 대목에서 마음이 걸리면 더 읽을 맛이 안 나거든. 자네가 백합을 좋아할 뿐 그걸 길러본 적은 없구나 싶었네. 백합에 대해 쓰기 위해 책을 읽었다고? 그럼 자라가 등장하는 소설도 있는 모양이지? 어쨌거나 책을 읽는 시간에 나는 대체로 마음이 안정되곤 했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나를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고 하면 이해하겠나? 책을 통해 인간을 알게 되었지. 얼마나 나약하고 또 얼마나 강한지를 말이야.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고 불행과 대치하며 한 생을 살다 간 사람들은 많은 자취를 남기네. 절망에 빠진 모진 상황들을 어떻게 견뎌내는지도 말이야.
요즘은 눈이 아파서 책을 못 읽네. 최근에 겨우 읽은 것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귀국 인터뷰네. 파리에 거주하는 그는 이번에 슈만을 연주하러 귀국했다고 하더군. 나는 슈만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슈만은 아주 복잡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했어. 인생에 쓰라림이 가득했던 작곡가라고. 젊은 날엔 그런 슈만의 인생이 이해가 되지 않아 그의 곡을 연주하는 걸 꺼렸다고. 그런데 지금은 슈만이 말년에 스스로 짐을 싸서 정신병원으로 들어간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더군. 나는 그 대목을 여러번 읽었네. 스스로 짐을 싸서 정신병원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면서. 뒤늦게 슈만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그는 혼자였네. 곁에 늘 함께 있던 아내 배우 윤정희 씨가 보이지 않았어. 어느 연주여행이든 함께했던 아내가 치매에 걸려 지금은 딸조차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더군. 내가 자유롭다면 말일세. 백건우의 슈만 연주를 들으러 가고 싶은 욕구가 생겼네. 그런데 갈 수가 없군. 그래도 아직은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까…… 하긴 눈이 이리 되었는데 귀라고 멀쩡하겠나. 곧 들을 수도 없게 되겠지. 괜찮네. 잘 살았다고는 못해도 이만하면 잘 견뎌왔다고는 생각해. 이 생각에 이르기까지 고되었네.
여태 얘기를 해줬으니 내 부탁도 하나 들어주겠나?
솔직히 말해보게. 이 집에 도착했을 때부터 무슨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말을 안 하나? 내게서 나는 냄새라고 여긴 건가? 지금 자네가 서 있는 그 복자기 나무 말고 뒤꼍으로 돌기 전에 서 있는 저 나무…… 보이는가? 저게 편백이네. 그 나무 밑에 좀 가보게. 고양이 한마리가 죽어 있을 것이네. 함께 살던 내 동무였는데 저리 된 지 며칠 되었네. 들려준 이야기 값으로 그 고양이를 좀 묻어주게. 그대로 두면 구더기가 꼬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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