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회
아들의 아들의 말
고모.
J시에서 지내기 어떠세요? 고모가 J시에 갔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까지 고모가 거기 머물고 있다는 것을 어제야 알았어요. 아버지가 얘기해주시더라구요. 그동안 고모에게 너무 무심했구나, 싶어서 미안해졌습니다. J시에 갈 때 기차 타고 갔는지요? 저한테 전화했으면 제가 모셔다드릴 수 있었는데요. 몇년 전에 고모가 저에게 전화해서 J시에 가려고 하는데 운전 좀 해달라고 했던 거 기억하세요? 처음에는 고모가 부탁하니까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수락한 동행이었는데 J시로 가는 고속도로의 차 안에서 고모랑 얘기 나누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저는 기억도 안 나는 저 어렸을 때 얘기들……을 고모를 통해서 듣는 일은 항상 즐겁습니다. 특히 똥 얘기요. 제가 꼬마였을 때 제일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게 똥이었다는 얘기는 들을 때마다 왜 그렇게 웃긴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옵니다. 어린이용 변기에 앉아 똥을 싸놓고는 제가 꼭 아버지를 불렀다면서요. 아빠, 나 똥 쌌어, 하면서요. 나중에 들으니 아기였을 때부터 제 똥 누이는 일은 아버지가 맡아 하셨다고 해요. 아버지가 오셔서 변기를 들여다보며 아이구, 똥을 아주 이쁘게 쌌네, 하면 어린 제가 볼이 미어지게 웃곤 했다는 얘기. 그러게요. 어린 제가 왜 그렇게 똥에 관심이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똥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 아버지가 늘 제 똥에 깊은 관심을 보였어요. 묽게 싸면 배가 아픈가 걱정하고 양이 적으면 속이 답답하냐고 물어보고…… 아버지는 제가 싸놓은 똥으로 제 건강을 체크하셨겠지요. 제가 똥을 잘 싸면 함빡 웃는 아버지가 신기하면서도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웃게 하려면 똥을 잘 싸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칭찬받을 것 같은 똥을 싸면 꼭 아버지를 불러서 확인시키고 아버지가 활짝 웃는 모습을 확인하곤 했던 거 같아요.
고모는 잘 모르는 것 같던데 사실은 제가 할아버지를 많이 좋아합니다. 저 어렸을 때 아버지 근무처가 C시였잖아요. C시와 J읍은 가까워서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 댁에 자주 갈 수 있었어요. 생각해보니 그때 할아버지는 젊으셨네요. 가죽 잠바를 입으시고 포마드로 머리를 뒤로 넘기시고 자전거를 타던 할아버지가 생각나기도 해요. 할아버지 댁에 가는 게 신났던 것은 할아버지가 제 말을 잘 들어주셔서일 거예요. 자전거 뒤에 저를 태우고 읍내에 나가서 미니 게임기 같은 것도 사주시고 축구공도 사주시고 그러셨어요. 부모님은 게임기라고 하면 손도 못 대게 하는데 할아버지는 제 또래들이 다 그거 가지고 노는데 아예 하지도 못하게 하면 친구도 못 사귀고 반항심만 생긴다고 하셨어요. 어린 마음에 아, 할아버지는 내 편이구나 생각한 적도 있어요. 언젠가 할아버지가 제 책 겉에 무슨 물이 들어 있으니까 가방에 들어 있는 교과서를 모두 꺼내더니 달력 두꺼운 장을 뜯어서 책을 하나하나 싸줬던 기억도 납니다. 책을 사고 나서 겉장에 자연책은 자연이라고 써주고 수학책은 수학이라고 써주셨어요. 그렇게 표지를 싸면 책이 더럽혀지지 않는다고 하셨죠. 나중에 학기가 지나간 뒤에 할아버지가 싸주었던 것을 벗겨내니 정말 책이 새것이어서 동생에게 물려주었던 기억도 납니다. 한번은 어머니한테 혼나고 집을 나와서 저 혼자 버스 타고 할아버지 댁에 간 적도 있어요. 그때는 할아버지 댁에 전화가 없던 때였어요. 할아버지가 혼자 온 저를 가만 보시더니 너 엄마한테 혼났냐? 물으시더라고요. 제가 울음을 터뜨리니까 할아버지가 저를 자전거에 태우시고 그길로 읍내 우체국에 가서 전주 집에 전화를 걸어 동이 여기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어요. 어이없었던 것은 제가 서러워서 말도 안 하고 C시에서 J읍의 할아버지네까지 왔는데도 집에서는 제가 집을 나간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거예요. 소위 가출을 했는데 집에서는 가출을 한지도 모르고 있어서 기막히고 섭섭해서 우체국에서 또 한번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는 저를 자전거에 태우고 J읍의 중국집에 데려갔어요. 그렇게 할아버지를 따라서 중국집에 처음 가봤죠. 군만두와 짜장면도 처음 먹어봤어요. 할아버지는 짜장면이랑 군만두를 제 앞에 밀어주면서 맛있냐? 맛있냐? 물었어요. 네, 할아버지…… 울다가 짜장을 입가에 덕지덕지 묻히며 맛있게 먹던 기억이 나네요. 체한다고 천천히 다 먹으라고 하던 할아버지 목소리도 떠올라요. 처음 먹어본 짜장면이라서인지 지금도 짜장면을 먹을 때면 꼭 할아버지가 떠오릅니다. 고모랑 할아버지네 갔을 때도 읍내로 짜장면 먹으러 갔었지요? 그 중국집이 아직도 문을 열고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고모는 할아버지에게 오향장육이나 팔보채 같은 걸 주문해드리고 싶어하는데 할아버지는 짜장면이면 되었다며 고모를 실망시켜드렸던 기억도 나네요. 그때 생각으로는 고모랑 가끔 이렇게 J시의 할아버지께 다녀야겠다, 다짐했었는데 고모가 다시 가자는 말을 안 해서……
고모.
일주일 전에 둘째 애가 태어났어요. 메신저 가족 대화방에 소식을 전했으니 알고 있겠지요? 둘째 애는 성미가 급할 모양인지 예정일보다 이주일이나 먼저 세상에 왔습니다. 두달 전에도 갑자기 아내에게 자궁수축이 와서 급히 병원에 입원했었거든요. 의사는 수축이 계속되면 조기분만을 해야 될지도 모른다며 아기를 일찍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했는데 다행히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정상으로 돌아와서 퇴원한 적이 있어요. 조기분만을 했으면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던 참이었어요. 그 상황을 피한 거라 퇴원해 집으로 돌아올 때도 그리고 집에 와서도 아내는 배 속의 아이가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참아줘서 고맙다, 고맙다 했어요. 결국 예정일보다 이주일 먼저 태어났습니다.
이주일 먼저 세상에 나와서일까요?
아기가 정말 작아요. 체중이 2.4킬로그램이었습니다. 2.4킬로그램 안에 머리 얼굴 몸통 손과 다리가 다 포함된다는 게 신기합니다. 얼굴도 정말 작은데요. 그 작은 얼굴에 눈 코 입이 오밀조밀 다 담겨 있어요. 아기인데 머리카락 숱도 많고 눈썹도 선명해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발가락이 너무 작아서 제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제 손이 마냥 넓은 운동장 같아요. 갓 태어난 아기가 작지 그럼…… 하겠지만 아마 고모도 제 둘째를 보면 정말 작구나, 할 거예요. 둘째 애가 너무 작아서 첫째 애는 어땠던가? 생각해볼 때가 있습니다.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첫애를 보고 작다고 여긴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둘째 애는 작아요. 어찌나 작은지 움직임이 더욱 고물고물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둘째 애가 작다는 얘기를 계속하고 있네요. 아이가 너무 작으니까 생각이 많아져요. 이 작은 아이의 아빠 노릇을 제가 잘해낼 수 있을까요?
저는 일을 좀더 하고 싶었는데 아내가 아기가 태어날 것 같다고 해서 후포에 있다가 급히 서울에 왔습니다. 만삭의 아내를 두고 후포에 있었다고? 고모가 어이없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되었어요. 후포는 동해안에 있는 항구인데 고모는 잘 모르는 곳이죠? 고모에게서 후포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네요. 후포는 올해 두번째 방문이었습니다. 저는 연초에도 시나리오 작업을 하느라고 거기에 있었거든요. 연초에 했던 작업은 제 손에서는 마무리를 해서 돌리고 있습니다. 이번 일은 그 틈에 기획된 것인데 웹드라마 대본 쓰는 일이었어요. 아이가 태어나면 당분간은 일을 못 할 게 뻔해서 마쳐놓으려던 것이었어요.
후포는 웹드라마 제작을 기획하는 PD 형의 고향이기도 해요. 형의 부모님이 후포에서 펜션을 하고 있어서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일에 진척을 보이지 않는 제가 걱정이 되었는지 아이 태어날 때까지 몰입해서 작업 마치라며 형이 후포에 다시 저를 데려다놓고 형만 서울로 돌아갔어요. 후포에 있는 동안 새 웹드라마 대본을 세편을 썼답니다. 두편을 더 써야 했는데 돌아왔습니다. 세편을 썼다고 해서 놀라셨을 텐데 5분에서 7분 사이의 짧은 것입니다. 거기다 서로 연속성이 있는 작업이라 가능했습니다. 지금 분위기로는 바로 제작에 들어갈 것 같긴 한데, 그랬으면 정말 좋겠는데 이쪽 일이 오늘까지 잘되다가 내일 엎어지는 경우가 허다해서……
후포에서 지내는 동안 고모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매번 고모가 여기 와서 작업을 하면 좋을 텐데 싶었어요. 고모나 저나 내륙에서 성장해서 바다는 늘 낯설잖아요. 언젠가 고모가 먼 곳에 있는 산에 가도 여행 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친숙한데 가까운 곳이라도 바다에 가면 아주 멀리 떠나왔다는 생각이 든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래요. 특히 속초에서부터 소위 7번 국도라 부르는 바닷길을 처음 가봤을 때 이곳이 내가 태어난 나라의 땅인가? 싶을 만큼 낯설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후포가 그 줄기에 있어요. 포항, 영덕, 울진 이런 지명들 들으면 과메기, 같은 게 생각나지요? 후배나 친구들과 통화를 하게 될 때 후포에 있다고 하면 후포가 어디냐고 묻곤 했어요. 후포를 잘 모르더라구요. 후포는 울진의 아래쪽인데 우리나라의 어촌 중에서는 꽤 부자들이 많이 사는 어촌입니다. 어떤 집은 차가 두대 있어요. 트럭형의 낡은 차는 동네나 항구 나갈 때 사용하고 울진이나 영덕에 나갈 때는 지프를 타고 간답니다. 후포항에 여객선 터미널이 있는데 그곳에서 울릉도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어요. 일하러 간 게 아니라면 울릉도에 다녀올 수도 있었는데 가보고 싶다, 생각만 하고 가진 못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둘째 애가 자라면 후포에 데리고 와서 울릉도엘 가봐야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제대했을 때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남도를 여행했던 그때처럼요. 그런데 저 고물고물한 둘째 애가 언제 자라서 후포를 데리고 가나 싶은 게……
동해는 대체로 해변이 잘되어 있는 곳이지만 후포는 마을과 바다가 함께 있어서 아, 이런 게 어촌마을이구나, 싶은 느낌이 바로 들어요. 서울에서 꽤 멀어서인지 한적하고 조용한 편이지요. 어느 곳이나 해변이 이어져서 바다를 보며 산보를 하거나 달리기를 하기도 그만입니다. PD 형 어머니가 운영하는 펜션도 바로 바다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다에 가자고 따로 마음을 먹지 않아도 아침에 일어나서 방을 나오면 바로 바다로 나가게 되어 있어요. 고모가 아침마다 해 저물녘에 후포의 갓바위 쪽으로 산보를 나가는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물이 얼마나 맑은지…… 가슴이 후련해질 거예요. 무엇보다도 후포의 어디나 밥이 맛있어요. 특히 펜션 주인인 형의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은 정말 꿀맛이지요. 매일 먹을 때마다 조금이라도 덜 먹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형의 어머니 음식 솜씨가 특별히 좋다기보다는 재료들이 바다에서 갓 잡아온 가자미 홍게들이라…… 고모가 좋아하는 것들이 후포에 다 있더라고요. 아마 그래서 고모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여행객처럼 금방 떠나지 않고 거기서 오래 지내다보니 거기 사는 사람들하고 친해졌는데 사는 이야기를 듣다가도 고모 생각을 했지요. 고모가 이런 이야기 들으면 많은 영감을 받을 텐데…… 싶거든요. 부자들이 많다고 했어도 후포에도 젊은이들이 많진 않더군요. 우리나라 다른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뱃일이 진행이 안 된다고 해요. 젊은이들은 서울로 떠나고 없고 노인들만 남아 있는 형국이죠. 주민 중에 배 가진 사람들도 여럿이고 바다에 나가서 잡아 오는 어획량도 풍부해서 열심히 일하면 돈을 모을 수 있는 곳인데도 그래요. 일할 게 널려 있어서 내가 여기 와서 살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니까요. 후포의 선원들은 대부분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었어요. 저로서는 그 풍경도 인상적이어서 필름에 담아볼까 해서 연초에 후포에 갔을 때 그들과 같이 밥도 먹고 일도 좀 도와주고 그랬습니다. 가무잡잡하고 소박한 그 친구들 나이는 스물다섯에서 서른다섯까지 분포되어 있어요. 얘기를 하다보면 고국에 아이들이 서넛씩 있었습니다. 월급을 받아서 꼬박꼬박 집으로 보낸다고 하더군요. 가끔씩 인도네시아로 가서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 오는데 그때마다 커가는 아이들과 다시 헤어져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다고 하더군요. 제가 아이들이 보고 싶냐고 물으면…… 대답은 않고 그저 씨익, 웃으면서 바다를 봅니다. 그들 중에 나이가 서른다섯인 친구가 있었는데 후포에 온 지 7년이 되었다고 했어요. 한국말을 아주 잘해서 주민들이 그들과 얘기할 때 뭐가 잘 안 풀리면 그를 통하곤 했습니다. 저랑도 금방 친해졌는데 후포에서 번 돈으로 인도네시아에 집과 땅을 샀다고 자랑도 했습니다. 몇년 더 일해서 땅을 넓힐 거라고 했습니다. 돌아가서 그 땅에 농사를 지을 거라고. 그 땅에 심을 곡식들이며 과일들 이름도 많이 알려줬는데…… 팜유라고 하던가 그것만 기억이 납니다. 과일 이름이 팜유라니? 이름이 참 특이해서 기억에 남아 있나봐요. 그의 아내가 사놓은 땅에 팜유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습니다. 풍년이 들면 제값을 못 받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인가봐요 팜유 농사가 너무 잘되어 값이 형편없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랑 친해지니까 못사는 나라에서 돈 벌러 온 가난한 노동자에서 다른 모습이 보이더군요. 불과 수십년 전의 우리 아버지들 모습이 저런 모습이기도 하겠다, 싶기도 했어요. 큰아버지 리비아로 떠날 때 큰아버지 배웅하러 공항에 갔던 일도 생각나고요. 두번째 후포길에 저를 제일 반겨준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온 그들이었어요. 그들은 나와의 재회를 가족하고 상봉하는 것처럼 반가워했습니다. 서울에 가자마자 그들을 잊고 지낸 게 미안할 지경으로 환영해주었어요. 그들의 삶을 조명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어요. 나중에 후포를 배경으로 필름을 만들어볼 기회가 저에게 올까요? 밥 같이 먹을 때며 휴식시간 틈틈이 그들하고 얘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우리하고는 많은 것이 다르지요. 우리는 여유가 있으면 아이들 교육에 대한 계획을 많이 세우는데 그들은 돈을 벌어서 집을 사고 땅을 사는 이야기들은 많이 해요. 아이들 교육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는 거…… 그게 특이하더군요. 하긴 그들 보기엔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이 유별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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