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5회

한소이의 차는 포르쉐의 SUV 모델인 카이엔이었다. 첫 달엔 건물 뒤편 주차장의 3층 전용 구역에 종종 서 있던 남색 카이엔이 어느 때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좁은 건물인데도 한소이와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녀는 사무실에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월세 연체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기영이 처음 3층으로 내려갔을 때도 한소이는 없었다. 쇼핑몰 사무실의 출입문에는 흔한 간판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실내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큰 종이상자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고, 샘플로 보이는 옷들이 이동식 행어에 체계 없이 걸려 있었다. 이사를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나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무실 안에는 여자직원들 몇뿐이었다. 그중 책임자급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이기영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잡지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은색 메탈 몸체의 검정색 가죽소파는 어수선한 사무실 풍경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직원이 은쟁반에 하얀 도기 찻잔을 내왔다. 제대로 잎을 우려낸 고급 홍차였다.

“내가 이러려고 온 게 아니고!”

이기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사장님하고 얘기하고 싶은데…….”

“대표님은 지금 출장 중이십니다.”

직원은 준비라도 한 듯 막힘없이 대답했다. 출장이라는 표현에 건물주로서의 불안감이 조금 누그러졌다. 출장 중이라면 정신이 없어 월세납기일을 깜빡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애꿎은 홍차만 한모금 마시고 4층으로 퇴각했다. 정말 출장인지 아닌지는 한소이의 SNS를 보면 1초 만에 확인할 수 있다고, 이기영의 딸이 말했다.

“진짜 출장 맞네. 발리 가 있어요.”

넘겨다본 컴퓨터 화면 속에서 한소이는 발리의 꾸따 해변에 있었다. 그녀는 밑단이 찢어진 흰색 반바지를 입고, 하와이안 셔츠 풍의 긴 가운을 걸쳤다. 길게 풀어 헤친 머리칼엔 밀짚모자를 썼다. 양팔을 날개처럼 펼치고 바람의 소리라도 듣는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진 아래 직접 써놓은 글귀, “#서퍼스 파라다이스”와 잘 어울렸다.

“이게 출장이라고?”

이기영이 중얼거리자 딸이 대답했다.

“여행가서 옷 갈아입고 이렇게 사진 올리는 게 이런 사람들 일이에요.”

이시영이 두번째로 3층 사무실에 찾아간 것은, 한소이가 발리에서 진즉 돌아와 한남동의 펍(pub)에서 수제맥주를 마신 사진을 올린 다음날의 일이었다. 사무실은 지난번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어수선했다. 몇시에 가겠다고 통보를 해놓았지만 이번에도 한소이는 없었다. 지난번의 그 여자 말고 또다른 여자가, 대표님이 몸이 편찮으셔서 못 나오셨다는 얘기를 전했다. 이기영이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누군가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젊은 남자였다. 주차장에서 두어번 마주친 적 있는 얼굴이었다. 흰색의 벤틀리를 타고 온 것이 그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 건물을 찾는 낯선 이라면 대개 그렇듯 2층 미용실을 찾은 손님인 줄 알았었다.

저희 이사님이라고, 아까의 직원이 이기영에게 남자를 소개했다. 남자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미처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서글서글한 얼굴에 당당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회사의 유학파 신입사원 가운데에서 가끔 보아온 부류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 앞에서 톤 앤 매너와 균형을 지키는 척하는 것이 뼛속 깊이 몸에 밴.

월세 미납에 대한 남자의 입장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재정 관리를 맡은 담당자가 지난달에 사직했는데 인수인계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확인하는 대로 조속히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태도에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거래처와의 파워게임에 나선 부하직원이었다면 인사평가에 고점을 매겨주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죄송하게 되었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하는 남자 앞에서 이기영은 마치 자신이 건물주가 아니라 월세가 밀린 세입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사무실을 나온 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 젊은 남자가 한소이의 남편일지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어쩐지 기분이 더 나빠졌다. 월세는 한달 늦게 입금되었다. 이기영은 중개사를 통해,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사무실을 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기영이 그 남자를 다시 본 것은, 지난달이다. 금요일 밤, 자정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귀가가 늦었다. 1층에서 버튼을 눌렀는데 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고장이 났나보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는 계단을 걸어 4층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3층 계단을 지나는데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낮게 흐느끼는 소리였다. 굳게 닫힌 3층 사무실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기영은 조금 망설이다 조심스레 문을 노크했다. 답이 없었다. 울음소리도 잦아들었다. 그냥 가려다 그는 한번 더 노크했다.

“위층입니다. 무슨 일 있나요?”

문이 벌컥 열리고, 그때의 젊은 남자가 나왔다. 노타이의 셔츠 차림이었다.

“아, 어르신. 아닙니다. 물건 좀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기 때문에 안쪽을 유심히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알겠다고 말하고 위층으로 올라왔으나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아내에게 말하니, 무서운 세상인데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는 충고가 돌아왔다.

“왜 남의 일이야? 내 건물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내 건물은 무슨.”

아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것이 그 남자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경찰이 찾아왔을 때에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경찰은, 그날 밤 울던 여자가 한소이가 맞는 것 같으냐고, 아니면 다른 여자인 것 같으냐고 집요하게 물었다. 엘리베이터의 CCTV를 확인한 결과, 그날 한소이는 건물 안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