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중학생 때 그는 어머니 몰래 영화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사람들이 자신을 진구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막상 아무도 진구라고 부르지 않게 되자 단짝 친구에게 절교를 당한 기분이 들었다. 진구가 되는 것도 싫었지만, 진구가 잊히는 것도 무서웠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그래서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해가 질 때까지 방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사물들이 어둠에 서서히 묻히는 것을 보면서 변덕쟁이가 된 자신을 미워했다. 어둠 속에서 그는 자주 혼잣말을 했다. 형민아, 그건 아무것도 아니란다. 형민아, 그건 금방 잊어진단다. 환한 대낮에 자신을 미워하는 일은 힘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어둠 속에서는 괜찮았다. 어둠 속에서는 미워하는 마음조차도 위로가 되었다. 딸이 어렸을 때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아빠도 사춘기가 있었어? 주말 연속극에서 십대 소녀가 자기 부모에게 대드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걸 본 딸이 놀라는 것 같아 아내가 사춘기라 그렇다고 설명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후로 딸은 아무 때나 사춘기라는 말을 썼다. 엄마, 나 사춘기라 유치원에 가기 싫어요. 저 사춘기라 김치는 안 먹을래요. 그때 딸은 젖니가 빠져서 말을 할 때마다 발음이 샜다. 아이의 이가 영원히 나오지 않기를. 앞니가 빠진 딸을 보는 게 행복해서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딸의 질문을 받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사춘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해보았다. 방 귀퉁이에 앉아 방이 어두워지는 것을 기다렸던 기억만 났다. 방이 어둠에 완전히 잠긴 후에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는 그 순간, 눈이 시리던 그 순간, 눈을 깜빡이던 그 순간. 그 순간마다 왈칵하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게 사춘기의 전부였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놀이동산으로 소풍을 갔다. 같은 장소로 소풍을 온 학교가 열곳도 넘었고, 그래서 놀이기구를 타려면 한시간씩 줄을 서야 했다. 그는 조류관을 돌아다니며 홍학이나 공작을 구경했다. 십대 아이들에게 동물들은 시시한 구경거리일 뿐인지 거기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는 동물들을 구경하다 사격 게임장을 발견했다. 동물들 사이에 사격장이 있다니 웃기지 않아요? 그는 게임장에서 일을 하는 직원에게 물었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있던 직원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말했다. 할 거예요? 그는 돈을 냈다. 그날 그는 만점을 쏘아 인형을 선물로 받았다. 인형을 들고 다니다 반 아이들 몇명을 만났는데 모두들 기지배냐고 한마디씩 했다. 그는 지나가던 여자아이에게 인형을 주었다. 이거 가져. 선물이야. 아이는 인형을 받지 않았다. 전 애가 아니에요. 5학년이란 말이에요. 키가 작아서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처럼 보였다. 그는 다시 아이에게 인형을 건네면서 사과를 했다. 미안해. 그래도 받아줄래? 인형을 들고 다닌다고 사람들이 놀려서. 아이가 인형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인형이 예쁘긴 하네요. 인형을 아이에게 준 뒤 그는 다람쥐라는 놀이기구를 탔다. 거기엔 줄을 선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전벨트를 매자 원통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백원짜리 동전 두개가 떨어졌다. 그저 뱅글뱅글 돌기만 하는 놀이기구였는데 이상하게 재미있었다. 그는 돌아가는 통 안에서는 왜 멀미가 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평소에는 멀미가 심해 먼 곳에 가려면 멀미약을 먹어야 했다. 그는 다시 한번 다람쥐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두번 타도 멀미를 하지 않는지 그게 궁금했다. 그때였다. 앞뒤로 정신없이 돌던 원통이 덜컹거리더니 멈추었다. 얼굴로 피가 몰렸고, 몇몇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람들의 신발이 보였다. 똑같은 신발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는 그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신발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그는 소풍을 간다고 새로 산 신발을 보았다. 공중에 떠 있는 신발을 보면서 그는 안전벨트를 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소풍을 갔다 온 다음부터, 아니 다람쥐 원통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그 다음부터,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누군가 카메라로 자신을 몰래 찍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두운 방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혼잣말을 하다보면 누군가가 공중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도, 학교 복도를 걸을 때도, 텔레비전을 보면서 혼자 저녁밥을 먹을 때도, 그는 뒤통수에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를 몰래 엿보고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생각했다. 혹시, 진구는 아닐까, 하고.
그가 오디션을 보러 다닌 것은 그래서였다. 어린 진구가 아직도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단 한명. 중학교 1학년때 같은 반을 했던 아이만이 알고 있었다. 이름이 김필기였는데, 일년 동안 몇마디 하지 않던 사이였다. 김필기와는 오디션을 보러 다니다 만났다. 액션영화였는데, 그래서인지 오디션 장소에는 쌍절곤 같은 것을 들고 온 십대 소년들이 많았다. 그 아이들이 복도에서 액션 연습을 하는 동안 그와 김필기는 두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대며 다리를 떨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다. 김필기가 말했다. 당연하지. 그가 대답했다. 김필기는 처음으로 보는 오디션이라고 했다. 나도야. 그는 거짓말을 했다. 그는 그 전에 다섯번도 넘게 오디션을 봤다. 물론 모두 떨어졌다. 그날 그는 뒷골목에서 아이들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역을 연기했다. 그는 떨어졌다. 김필기도 떨어졌다. 그후, 그는 김필기를 오디션 현장에서 두어번 더 만났다. 그리고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인연이 끊어졌다. 김필기는 서른살이 넘어서 배우가 되었다. 배우의 꿈을 포기할 수 없다며 다니던 증권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인터뷰 기사를 그는 십년 전쯤에 본 적이 있다. 몇년 전, 어느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은 악역을 맡은 조연배우로 김필기를 선정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를 보다 김필기가 나오면 정지 버튼을 누르고 한참을 그대로 두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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