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50회

 

   둘째 애가 자라서 후포에 같이 가는 날이 지금은 멀게 느껴지지만 곧 다가오겠지요? 뜻대로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이들과 여행을 많이 하고 싶습니다. 군대 제대할 때 아버지와 함께한 여행이 지금도 제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거든요. 그때 아버지와의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여행 하면 그때가 떠오를 만큼요. 엊그제는 둘째 애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은행에 갔었답니다. 둘째 애가 여섯살이나 일곱살 되었을 때 캠핑카를 구하려고 적금을 들었어요. 지금 당장 생활비도 아슬아슬인데 캠핑카를 꿈꾸며 적금이라니…… 좀 우스워서 아내에게 말도 못 했는데 은행에 다녀오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그때 아버지와의 여행은 어떻게 성사된 것인지 처음으로 곰곰 생각도 해보았죠. 제대하면 바로 여행 가자고 아버지가 먼저 말씀하셨던 걸 기억해냈습니다. 제대를 앞두고 여자 친구와 헤어진 제 마음을 헤아리셔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대 직전에 이별 통보를 받아서 혼란스럽고 고통도 뒤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여자 친구가 많이 참아준 것도 같아요. 가끔 제대일을 많이 남겨놓고 이별 통보를 받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는데 아찔하고 심란해지더라고요.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아서 그나마 잘 견뎌낼 수가 있었던 것 같아요. 여자 친구의 이별 통보가 떠오를 때마다 연병장으로 나가 운동을 했던 기억도 났습니다. 온몸이 땀에 젖도록 뛰고 이마의 땀방울이 눈으로 흘러들어올 때 팔을 굽혔다가 펴고 그랬지요. 여자 친구와 좋았던 순간들만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지내더라도 밝고 온화한 나날이기를요. 그런 덕에 제대할 무렵의 제 몸 상태가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그때 아버지의 여행 제안이 여자 친구의 이별 통보로부터 다른 생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노트를 꺼내 아버지와 여행 계획을 적어보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제대하는 날 아버지가 부대 앞으로 차를 가지고 오셨어요. 아버지와 번갈아 운전해 남도로 향하면서 느낀 그 해방감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제가 특별한 사람인 것 같았죠. 여수, 목포, 해남, 강진, 고흥…… 날마다 숙소를 옮겨다니면서 바다에도 가고 절에도 가고 꼬막도 먹고 낙지도 먹고…… 행복했습니다. 일주일이 하루처럼 흘러버린 여행이었어요. 그때 아버지와 처음으로 어른 대 어른으로 대면했던 거 같아요. 아버지는 제가 다니는 디지털미디어학과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그 학교 나오면 어디에 취직하느냐고 물었어요. 저는 철도 없이 학교 졸업하면 취직보다는 영화 연출을 하고 싶다고 했지요. 영화 쪽으로 다시 공부하고 싶다고요. 디지털미디어학과에서 배우는 모든 것이 영화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면서 들떠서 제 말만 했던 거 같아요. 아버지는 제 말의 반은 못 알아들었을 텐데도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그러셨어요. 나중에 생각하니 그때 아버지는 저와 동생 때문에 시름이 깊었던 때 같아요. 저는 무슨 공부를 하는지 아버지로서는 잘 모르는 디지털미디어학과에 다니다 입대를 했고 동생은 미대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입시학원 비용이 아버지 한달 월급에 육박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해변의 감자밭 앞에 내려서 저와 맞담배를 피우고, 밤 바닷가에서 맥주도 함께 마시고…… 그 여행 덕분에 아버지가 내 아버지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 여행이 더 기억나는 건 막바지에 J시의 할아버지 댁에 들렀던 일 때문에 그래요. 남도 여행 마지막 날에 아버지가 J시에 들러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온천에 가자고 하셨어요. 할아버지가 온천에 가서 따뜻한 물에 들어가시는 거 좋아하신다면서. J시 집에 갔을 때 할머니는 사람들하고 내장산에 갔다고 했어요. 마을의 안사람들끼리만 모여서 나물로 만든 점심 먹는 모임이어서 할아버지만 혼자 집에 덩그러니 남아 계셨어요. 우리가 미리 알리고 J시에 들른 게 아니어서 그런 상황을 모르고 있었어요. 아쉽게도 할아버지만 모시고 변산 쪽에 있는 온천에 가게 되었어요. 운전은 제가 했는데 온천 가는 길 어디쯤에서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봉투를 건네셨어요. 이게 뭐냐고 하면서 봉투를 받아서 들여다보던 아버지가 안에 든 것이 돈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손사래를 쳤어요. 할아버지는 자꾸 주려고 하고 아버지는 절대 받지 않으려는 실랑이를 저는 백미러로 지켜봤어요. 할아버지가 물러설 기색을 안 보이자 나중에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아버지 정말 왜 이러세요! 하며 화를 냈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뜻을 거두질 않았습니다.

   ―나락 수매한 것이다.

   ―……

   ―내가 너 고생만 시키고 해준 것이 없어서 그런다.

   ―……

   ―니가 3사관학교 간 것도 내가 등록금을 못 내줘서 그맀잖냐!

   ―……

   ―그때 내가 니 등록금 못 내줬으니까 동이 등록금은 이것으로 내라.

 

   내 등록금?

 

   말수가 적고 늘 다른 사람 말을 듣는 중인 것 같던 할아버지가 동이 등록금은 이것으로 내라,고 하니 어느덧 돈 봉투가 제 문제로 넘어와 있지 뭐여요. 운전을 하면서 뒷자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백미러로 건너다보는 제 마음이 잠깐 혼란스러웠습니다. 봉투를 놓고 밀치고 뒤채고 하던 두분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어요. 온천에 가는 동안 할아버지는 저쪽 창을, 아버지는 이쪽 창을 내다보고 계셨어요. 뭘 저렇게까지 하시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온천에 도착해서 따뜻한 물속에 들어갔을 때까지도 별말이 없더군요. 다만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등을 꼼꼼하게 밀어드렸어요. 아버지, 많이 마르셨네요, 하면서요. 아버지가 할아버지 등을 오래 밀어드려서 저도 그때 아버지 등을 밀어드렸네요.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주신 봉투에 든 돈으로 그때 제 등록금을 챙겨주신 것인지 아닌지는 저는 모르지만 아버지와 여행을 가서 보게 된 그 광경이 제 마음엔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제 결혼 때는 또 어쨌게요. 제가 사실 결혼을 할 처지는 아니었죠. 하긴 그때나 지금이나 제 상황이 크게 달라진 건 없으니 처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저는 혼자 있어야 하죠. 제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고모조차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잖아요. 고모가 그런 표정으로 저를 쳐다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든 고모는 항상 그거 너가 잘할 것 같다,고 응원을 했었는데 결혼 얘기를 하니 말을 안 하고 그저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기만 했어요. 어떻게 살려고? 그 말을 하진 않았지만 고모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요. 그동안 단편 필름을 세개 만들었을 뿐 고정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닌 제가 결혼을 한다고 했으니…… 그런 데 저는 결혼을 했습니다. 그사이 두 아이의 아버지까지 되었네요. 어찌 보면 제가 가장 세상모르는 무서운 놈 같기도 합니다. 그러게요. 뭘 믿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을까요. 아내가 제 말을 들으면 슬퍼하겠네, 고모. 아내는 단편 필름을 찍다가 만난 사람이라 이쪽 사정을 잘 아는 편이지요. 아내가 제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믿어주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아내의 그런 마음을 믿고 결혼한 것 같은데 아내는 저의 무엇을 믿고 나와 결혼을 했을까…… 물어보려다가 참곤 합니다. 고모도 알다시피 첫째 애가 먹성이 좋잖아요. 무엇이든 정말 맛있게 먹어요. 사과도 큰 거 한개를 혼자서 다 먹고, 슬라이스 치즈도 몇장씩 한꺼번에 먹고…… 어떤 집 아이들은 밥을 안 먹어서 부모가 쫓아다니면서 먹인다는데 우리는 그런 적이 없어요. 오히려 아이가 맛있게 먹으니까 밥맛이 없다가도 밥맛이 생길 정도예요. 아내와 둘이 지낼 땐 치킨을 주문하게 될 때면 한마리면 충분했거든요. 어느 땐 남기도 했죠. 그런데 아이가 자라니 한마리로는 모자라더라구요. 그래서 아이가 치킨을 먹고 싶다고 할 때 한마리를 더 주문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게 됩니다. 치킨을 한마리 주문하고 한쪽만 먹고 갑자기 약속이 생긴 척하면서 집을 나와서 걸어다니다가 집에 들어간 적도 있어요. 나는 언제쯤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고 서슴없이 치킨 두마리를 주문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할 텐데 싶기도 하고…… 이런 마음들을 겪는 거 보면 저도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는 중인가봅니다.

 

   제가 결혼할 즈음에 할아버지는 다리 수술로 강남의 정형외과에 입원해 계셨는데 기억나세요? 제가 병문안을 갔을 때예요. 할아버지가 입원실에 아무도 없는 틈에 저한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셨어요.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하고 가까이 갔더니 할아버지가 환자복 주머니에서 수표 한장을 꺼내서 제 손에 꼬옥 쥐여주셨어요. 제가 당황해서 할아버지 저도 돈 벌어요, 했더니 할아버지가 다른 애들은 못 주고 너만 주는 거니 암 말 말고 요긴한 데 써라, 하시더니 병원 침상으로 올라가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눈을 꾹 감으시는 거예요. 제가 뭐라고 할까봐 눈을 뜨질 않으시는 거예요. 병원에서 나와 할아버지가 주신 것을 펴보니 J시 농협에서 발행한 백만원짜리 수표였어요. 제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까 병원에 입원하려고 서울 오시는 길인데도 할아버지는 J시의 농협에 가서 수표를 끊으신 거예요, 저를 주려고요. 지금도 할아버지는 제가 돈 번다고 말씀드려도 저만 보면 조금이라도 돈을 주시려고 해요. 제가 자존심 상할 수도 있다고 여기시는지 아무도 모르게 주시려고 할아버지 나름대로 작전을 펴시는데 그 노력이 제겐 다 보여요. 할아버지는 시골에 사시면서도 제가 일하는 분야의 사정을 직감적으로 아시는 것도 같아요.

 

   고모.

   엊그저께 제가 둘째 애를 안고 있는 사진을 보내드렸더니 고모가 너 표정이 왜 그러냐? 문자로 물으셨잖아요. 뒤늦게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니까 요즘 제 마음이 그 사진 속에 찍혀 있었어요. 어쩌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제 얼굴에 수심이 가득이더군요. 사람들은 그 사진을 보고 모두들 갓난아이를 보며 아이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고모는 저를 봤구나, 싶어서 제 표정이 부끄러워졌어요. 그런데 고모. 첫째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모른 채 수선스럽게 시간이 지나갔어요. 처음에 아내가 아이가 생겼다고 했을 때 솔직히 어리둥절한 기분인데다 이 일을 어쩌지? 싶은 마음에 뭐? 그랬어요.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는데 남편이란 작자가 낙담한 표정으로 뭐? 했으니…… 아내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걸 보고서야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뒷골이 쭈뼛합니다. 저도 모르게 아내에게 상처를 입힌 것 같아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 첫애가 태어났는데 산부인과의 간호사가 아기 확인해드리려고 한다면서 태어난 아기가 있는 방으로 저를 안내했습니다. 붉고 가는 손목에 노란 딱지를 단 아기가 뒤치락거리는데 간호사가 소독한 장갑을 끼고 와서 아기 머리카락과 머리를 만지면서 말했어요. 여기 보시면 머리도 깨끗하고요. 여기 보시면 눈 코 입도 다 있구요, 하는 거예요. 아기가 꼭 쥐고 있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면서 여기, 손가락 하나 둘 셋 넷 다섯…… 보이시죠? 여기, 남자아이인 거 보이시죠? 아기의 작고 붉은 발가락을 하나하나 만지면서 여기, 발가락도 하나 둘 셋 넷 다섯…… 보이시죠? 이 세상에 건강하게 나온 것을 아버지인 제 앞에서 하나하나 확인받던 아기가 손발을 흔들며 맹렬히 울기 시작하니까 여기, 보다시피 애기가 아주 잘 울지요? 저는 간호사의 말에 예, 예, 예, 대답하다가 그만 울컥했습니다. 간호사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속으로 쿵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거예요. 그렇구나, 내 아이가 머리도 깨끗하게 눈 코 입도 무사히 손가락 발가락도 건강하게 내게 왔구나, 싶은 것이. 여태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여기 보세요, 하면서 하나하나 확인시키니까 그때야 아,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 눈 한쪽을 못 뜰 수도 있는 거고, 발가락 한개가 없을 수도 있는 일인데 별 탈 없이 무사히 내게 와주어 감사하고 고맙구나, 싶은 것이, 그 소중함을 아버지인 내가 몰랐네, 싶은 것이…… 급기야는 눈시울이 더워져서 발을 차며 우는 아기 옆에서 같이 눈물을 조금 흘렸습니다.

 

   그런데 고모, 아이가 하나일 때와 둘일 때가 마음이 이렇게 다르네요. 이제 제가 정말 아버지가 된 거 같고 갓난아이가 제 앞에 놓이니 하루하루가 먹먹합니다. 어느 땐 가슴이 미어지듯이 아프기도 합니다. 어제는 첫애가 엄마를 동생에게 뺏기고 제 방에 와서 책 읽다가 자는데 손을 이마에 얹고 왼쪽 발을 접어서 오른쪽에 꼬고 자데요. 할아버지 낮잠 잘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요. 아버지도 낮잠 잘 땐 그런 모습으로 주무시는데 아내가 저도 그렇다고 합니다. 별걸 다 닮네, 생각하며 아이 자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 아이들을 내가 어찌 잘 키우지? 싶은 마음이 들면서 또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애가 타요. 내가 잘해야 되는데……요. 솔직히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고모가 아는 출판사에 미디어 부서가 새로 만들어졌는데 새 책이나 작가에 대해 영상을 만들어 홍보하는 게 그 부서의 주 업무라 제가 하는 일과 아주 동떨어진 일은 아니라면서 그곳에서 직원을 뽑는다니 지원해보겠느냐 물은 적이 있지요? 고모는 제게 그 말을 어렵게 꺼냈을 텐데 저는 곧바로 영화 만드는 일만 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어떻게 하든 이 바닥에서 살아남겠다고요. 그때 제가 말도 멋있게 했지 않아요? 영화 옆에만 있고 싶다고 했던가…… 생각해볼 것도 없이 바로 그리 양양하게 대답하는 저를 고모가 응, 그래…… 하고 물끄러미 바라봤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화에 대한 제 마음은 달라진 게 없는데 그때와 같은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제가 뭐라고 대답할까요? 똑같은 대답을 하게 된다 해도 그때처럼 그렇게 바로 저항하듯이 답하지는 못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첫째가 많이 컸어요. 없던 동생이 생겨서 자기한테 집중된 관심이 나눠질 텐데 그걸 어린애가 어떻게 극복할까 약간 걱정했는데 신기하게 첫째가 바로 형처럼 굴어요. 어디서 배운 적도 없을 텐데 갓난애 머리를 쓰다듬고, 울면 엄마에게 밥 주라면서 우유병을 가져다주고, 갓난애가 잠들면 다독다독 해주고, 책을 읽어주겠다며 책을 펼치기도 하고 이불도 당겨주고 그래요. 그러다가 자꾸 화장실에 갑니다. 어린 게 형 노릇을 하려고 하니 스트레스가 쌓이는 모양입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중심이 자신 같았는데 갓난아기가 들어오고부터 방문객이 와도 자기보다는 아기에게 관심이 쏠릴 때 약간 충격도 받고 상실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이가 표를 안 내고 있어요. 자꾸 화장실만 들락날락거립니다. 아내가 이리 와 안아줄게, 하면 다른 때 같으면 얼른 아내 품에 파고들었을 아이가 먼저 갓난아기를 쳐다보곤 해요. 서운해? 참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 해도 없어, 없어…… 하면서요. 그런 첫째 애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좀 묘해져요. 저도 모르게 나도 잘 견뎌낼게, 중얼거려져요. 제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외려 아이가 아버지인 저를 키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그래요. 오래전 제가 운전하는 자동차 뒤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돈 봉투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던 모습. 그때는 왜 저렇게들 하시나, 싶었는데 이제야 두분의 마음이 짚어져서 뒤늦게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습니다.

 

   고모.

   제가 말이 많았네요. 서울에 올 때 연락하세요. 할아버지도 뵐 겸 첫째 데리고 제가 J시에 갈게요. 할아버지가 첫째 애를 보면 많이 웃으시더라구요. 할아버지 표정이 환하고 밝아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