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회
첫 태풍이 왔던 밤이었을 것이다. 빗소리가 지붕을 날려버릴 것처럼 투닥거렸다. 나는 아버지 침대 아래 방바닥에 자리를 깔고 잠들었다가 비바람 소리에 깨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비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바람에 쓸려 휘익 몰려왔다가 휘익 몰려갈 때면 대문이 흔들리고 앞마당의 동백가지가 부러지고 뒷마당의 토란대들이 쓰러지는 기척들이 귀에 잠겼다. 나는 혹여라도 아버지가 잠에서 깰까봐 뒤척이지도 않고 누워 있었다. 어느 틈에 아버지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얼마 후에 아버지가 내 쪽을 바라보더니 가만히 침대 아래로 내려오려고 했다. 내가 잠에서 깰까봐 아버지가 조심스러워하는 게 역력했다. 그때야 나는 일어나 앉으며 아버지 깨셨어요? 왜 더 안 자고…… 했을 때 아버지는 텔레비전 아래에 놓여 있는 다탁 아래 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방 불을 켰다. 아버지는 갑자기 밝아진 빛에 눈에 자극이 오는지 깜박거리면서 서랍 안에서 뭔가를 한참 찾았다. 찾는 게 안 보이는지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을 죄다 방바닥에 꺼내놓기 시작했다. 아침저녁 먹는 약상자며, 배터리가 들어 있는 통이며 여동생이 가져다놓은 퍼즐 상자들이 수북하게 방바닥에 내놓였다. 퍼즐 조각 두개를 빼면 아버지가 맞추는 걸 어려워하니 처음에는 한개만 빼고 맞춰보게 하다가 나중에 두개를 빼보라고 일러주던 여동생. 아버지가 안으로 안으로 손을 밀어넣어 네모난 하얀 면 보자기를 꺼냈다. 네 귀퉁이를 잡아당겨 매듭을 지어놓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매듭을 풀자 누런 바탕에 책등 쪽이 누런 실로 제본이 된 오래된 책이 나왔다. 소학집주. 천정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불빛 아래에 드러난 책의 겉장에 한문으로 책 제목이 쓰여 있었다. 손때가 얼룩져 겉장이 거무튀튀하면서도 윤이 반질반질 났다.
―소학이네요.
―어려서 아버지한테 배운 책이다.
―이 책을 여태 가지고 계셨어요?
아버지가 두터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봄이 되면 만물이 소생하고, 여름이 되면 자라고, 가을이 되면 무르익고, 겨울이 되면 거둬들이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며…… 소학의 제사를 아버지는 또렷하게 외웠다. 물건을 어디다 뒀는지 잊어버려 허둥거릴 때 내가 잘 기억해보세요, 하면 아버지는 이런 일을 행하고도 남는 힘이 있으면 시를 외우고 책을 읽으며 노래와 춤을 통해 음악을 배워 생각이 바른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건을 어디다 뒀는지 계속 찾으면서도 아버지는 내게 들릴 만하게 소리를 내서 소학제사를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겠으나 아버지는 찾으려고 했던 물건은 끝내 찾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토록 닳아지도록 펼쳐보고 외운 책이 저 책이었던가?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책 사이에서 누런 봉투를 꺼내더니 다시 그 안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서류와 접어놓은 종이 한장을 꺼내 펼쳤다. 펼친 종이는 오래전에 쓰던 편찰지였다. 백색이었을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바닥에 내려놓은 종이엔 큰오빠부터 막내까지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각이 나란나란 적혀 있었다. 한문과 한글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마지막에 적혀 있는 막내의 이름을 눈여겨보았다. 막내의 이름자 중의 ‘익’ 자가 더할 익 자였구나. 어느날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편찰지를 펴놓고 형제들의 이름과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적어두었나보았다.
―이걸 여기에 넣어둔 게 생각나서.
아버지가 꺼내 보인 다른 하나는 뜻밖에 주소지가 대흥리의 입암면으로 되어 있는 땅의 등기권리증이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아버지?
―차천자가 새 세상 터라고 지정하고 중앙본소를 지은 자리가 내려다보이는 산이다.
―……?
―그 산이 헐값에 나왔을 때 내가 사두었는디…… 차천자는 무너졌지만 거기 땅기운이야 어디 가겄나 싶어서…… 이상향이 되어주었으믄 하는 마음이었는디.
아버지는 형제들의 이름자와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가 적혀 있는 편찰지와 땅문서를 다시 접어 봉투에 넣고 처음처럼 소학 사이에 끼워두었다.
―쓸모없는 것일지라도…… 나 가고 난 뒤에 이게 뭣인가 하지 말고……
아버지는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밀어 넣었다. 웃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이상향이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이야. 내가 아는 아버지는 스스로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대가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게 없다고 여기는 분이었다. 호미 하나 낫 하나, 제자리에 두도록 세심하게 챙기던 아버지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그 밤 이후로 아버지는 무엇을 하다가 나를 부르곤 했다. 이것은 여기 있다, 해서 보면 사진틀 뒤에서 꺼낸 농협 통장 네개이기도 했고, 어느날 우물 쪽에서 불러서 가보면 아버지가 우물을 덮고 있는 덮개를 걷어내고 우물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다가간 내게 아직도 물이 솟아난다,며 우물물을 쓰지 않아도 우물은 메우지 말라고 했다. 집은 새로 지었지만 이 우물은 항상 이 자리에 있었다고. 어느날 아버지는 엄마가 없는 안방의 장롱 문을 연 채로 옷걸이에 걸린 겨울 외투를 들고 서 있었다. 순모로 된 가볍고 오래된 외투였다. 따뜻하게 잘 입었는디…… 아버지는 곰팡이가 슬어 있는 외투를 들고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아버지 손에서 외투를 받아들며 괜찮아요, 지금 얼른 세탁소에 맡기고 올게요, 했더니 그제야 얼굴이 펴졌다. 내가 세탁소에 다녀오겠다고 나서자 세탁소? 하더니 아버지가 잠깐만 기다려보라고 했다. 아버지는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종이백을 가지고 나왔다. 시내 입구로 들어가는 초입에 세탁소가 있고 세탁소 옆이 웅이 액자집이니 전해주라고 했다. 먼젓번에 보니 웅이가 벌써 머리가 벗어졌더라며 갖다주면 잘 쓰고 다닐 거라고 했다. 웅이? 그 이름을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지. 웅이를 떠올리려 하자 모습이 아니라 오래전 우사의 송아지 목에 걸려 있던 웅이의 송아지라고 써넣은 나무 팻말이 먼저 떠올랐다. 웅에게 나무를 자르게 하고 대패질을 하게 하고 손에 끌을 쥐여주며 웅이의 송아지라는 글씨를 파게 하던 젊은 아버지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신작로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아버지가 들려준 종이백 안을 들여다보니 모자 네개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쓰고 다니던 봄, 여름, 가을, 겨울용 모자들이었다. 세탁소에 아버지의 외투를 맡기고 나와서 살펴보니 아버지 설명대로 바로 옆집이 웅이 액자집이었다. 유리문에 파란 글씨로 맞춤액자,라고 쓰여 있는 가게 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닫힌 유리문 안을 기웃거려봤다. 빈티지로 보이는 빈 나무액자들이 가게 안 벽에 나란나란 걸려 있기도 하고 드로잉이나, 강아지 사진, 자수가 들어 있는 아크릴 액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탁자에 물푸레나무액자,라고 쓰여 있는 종이 팻말도 보였다. 액자 밑에 5✕7, 6✕8, 8✕10 사진 치수를 적어놓은 것도. 웅이 여기에서 이런 가게를 운영하며 살고 있었네, 반가움이 일렁였다. 내게 구운 새를 불쑥 내밀어 기겁하게 하던 웅이, 아버지 이외에는 누구 말도 듣지 않았던 웅이. 그 웅이의 머리가 벗어지고 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제 웅이 아버지 모자를 쓰고 다니겠네, 생각하며 닫힌 문에 종이백을 걸어두었다. 누가 걸어놓은 건지 모를 수 있으니 메모라도 남길까 하다가 아버지 모자라는 것을 웅이 단박에 알아볼 것이라 여겨져 그만두었다.
세탁소에 가기 전에 아버지가 장롱에서 옷들을 꺼내는 걸 봤을 때는 여름을 나며 곰팡이가 슬고 있는 옷들에게 거풍을 시켜주려는 뜻인 줄로만 알았는데 집에 돌아왔을 때 마당 한편의 통속에서 한 무더기의 아버지 옷들이 불타고 있었다. 나는 놀란 마음에 아버지, 하고 불렀다. 무연한 표정으로 통 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는 이제 다 입은 것들이라고 했다. 옷을 태우는데 머리카락이나 플라스틱이 탈 때 나는 냄새가 온 마당에 떠돌아다녔다. 잔불이 타닥거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헌아, 낙천이 기억허냐?고 물었다. 낙천이 아저씨요? 되물으니 아버지는 낙천이가 우사를 떠난 후에 영세민 카드를 만들어주려고 찾아봤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누군가 어디에서 봤다고 하면 다음 날 그곳에 가보곤 했는데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고. 혹여 낙천이가 어디에선가 죽었다는 얘기가 들리면 거두어서 꼭 장례를 치러주라고 했다. 집을 나갈 때 소도 두고 간 사람 아니냐면서. 어느 볕이 좋은 날 아버지는 가재타월에 알코올을 묻혀서 오래된 북의 가죽에 들러붙은 묵은 때와 북 위쪽에 빙 둘러진 둥근 모양의 스테인리스 장식을 하나하나 윤이 나게 닦았다. 갈라진 나무 북채 끝을 단정하게 쳐내고 나무에 바르는 오일을 여러번 덧발라두었다. 어느날은 또 나와 함께 J시에 나갔던 아버지가 오거리 시계방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손목시계를 풀어 시계방 남자에게 아끼는 오래된 시계인데 내부를 깨끗하게 청소를 해달라고 했다. 시계 건전지도 새로 바꿔달라고. 시계방 남자는 시계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오래되었으나 좋은 시계네요, 값이 꽤 나가겠는데요, 했다. 아버지는 그런지는 몰랐소, 아들이 준 것이라 잃어버리지 않을라고만 했네, 하면서 웃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시계를 다시 차지 않고 지퍼백에 넣더니 선반 어디선가 시계 상자를 찾아냈다. 어제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어디다 뒀는지 찾지 못하면서 오래전에 시계가 담겨 있던 상자를 다 찾아내네, 아버지? 내 말에 아버지는 소중헌 것잉게, 했다. 아버지는 묵은 먼지가 눌어붙은 오래된 시계상자 안에 시계를 넣어두었다. 여름 내내 아버지는 자주 그런 일을 했다. 선글라스의 글라스를 빼서 틀 안까지 먼지를 닦아내고는 상자에 넣어두었고, 신발장 안의 신발들을 꺼내서 계절별로 한켤레씩만 남기고 우사 앞 텃밭으로 가져가 불태웠다. 지난번 우사 안의 빈방에서 내가 나무궤짝을 발견한 날 밤에 아버지가 홀로 몰래 태우던 편지들은 누구의 편지였을까. 아버지가 신발을 태우는 일을 도우면서 내가 그때 태운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알 것 없다, 했다. 의사는 아버지로 하여금 어떤 이야기든지 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심리치료라는 것도 마음속에 맺혀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게 하는 치료의 일종이라면서 아버지 스스로 묵은 이야기들을 하게 하는 게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었다. 내가 아버지의 닫힌 입을 열게 해보려고 누구 편지인데 몰래 태웠어요? 아버지? 여러번 되묻자 아버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김순옥이 편지다, 했다. 김순옥이 누구예요? 아버지는 내 말엔 대답을 하지 않고 물조리개를 들어 일렁이는 잔불들 위로 뿌렸다. 김순옥이 누구인데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아버지는 물조리개를 내려놓고 내가 저버린 사람이다, 하며 나를 이윽히 바라봤다. 큰오빠의 편지 틈 어디에 김순옥의 편지가 들어 있었을까? 그 편지가 나무궤짝 안에 들어 있는 줄 알았다면 먼저 읽어봤을 것이다. 나는 김순옥이 누군지 얘기 좀 해보셔요, 아버지, 내가 다 들어줄게, 했으나 아버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었는데 나 모르게 태웠어 아버지? 좋은 시상 만났시믄 잘 살았을 사람을…… 아버지의 얼굴에 슬픔이 깃들어 나는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신발 태운 냄새만 이틀이 지나도록 공기 속에 둥둥 떠다녔다.
두번째 태풍이 몰아치던 날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바람이 불면 지붕도 날아가겠다고 걱정하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서랍을 뒤져서 새 둥지 두개가 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겨울나무가 그려진 연하장을 찾아냈다. 아버지는 연하장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한참을 바라보더니 사인펜을 손에 쥐고는 연하장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연하장 다음 장을 펼치고 무릉이 형이라고 적고도 한참을 바라보았다. 허리를 굽혀 글씨를 쓰는 게 불편했는지 아버지는 책상 없이 숙제하는 소년처럼 방바닥에 엎드렸다. 나는 아버지가 한여름에 연하장에 대고 무슨 말을 쓰는지 궁금해서 엎드려서 글씨를 쓰는 아버지를 선 채로 내려다보았다. 창을 닫아뒀는데도 비바람에 창틀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렸다. 아버지는 무릉이 형,이라고 쓴 아래 칸에 펜을 댄 채로 엎드려만 있더니 이게 마지막 연하장입니다,라고 썼다. 아버지는 여전히 어떤 글자들은 맞춤법에 맞추지 못하고 소리 나는 대로 쓰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랄 일이 업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아버지 등 뒤에서 아버지가 방금 적은 받침이 틀린 “업” 자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다시 만낫을 때 갈재의 골짜기에서 뭔 일이 잇었는지 캐묻지 않아 감사햇습니다,라고 쓴 아버지는 연하장의 빈칸을 뚫어져라고 바라봤다. 아버지는 마지막 문장을 꾹꾹 눌러 적었다. 내가 형에게 한 짓을 다 알고도 일생 동무를 해줘서 고마웠습니다.
스트레스 받는 일을 줄이라는데 어떤 것들이 아버지에게 스트레스를 주는지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간간이 낮잠에 드는 아버지가 낮잠을 자지 못하도록 낮에 침대에 누우려고 하면 함께 동네 산책을 나가는 정도였다. 여동생이 보낸 약을 시간 놓치지 않고 챙겨 먹게 체크하고 인터넷으로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음식을 검색한 뒤 감태를 사러 시장에 가보는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감태를 구하지 못해 나는 J시의 시장 안을 빙빙 돌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잠을 자다가 슬며시 일어나서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혼자 있거나 부엌 뒤의 다용도실의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을 때마다 나는 그 날짜와 시간을 내 수첩에 표시해두었다. 주기를 살펴보기 위해서. 처음에 자꾸 어딘가로 숨거나 울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할 때마다 등에 땀이 솟곤 했으나 어느새 익숙해지고 있었다. 혼자 웅크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불안과 공포에 방치된 아이 같았다.
―왜 거기 계세요 아버지, 이리 나오셔요.
내가 손을 내밀면 아버지는 또 순하게 따라나와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갔다. 더위와 습기에 끈적이는 어느 여름밤의 아버지는 손을 휘저으며 잠꼬대를 했다. 아버지는 애타게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의 이름인지 알고 싶어서 귀를 기울여보았으나 발음이 뭉개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허공을 휘젓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아 바닥 위에 내려놓고 아직도 어딘가를 헤매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름이 아니라 비명소리였을지도. 갑자기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연결되는 미닫이문을 밀고 뛰쳐나가려고 했으니까.
처음엔 현실이 아니고 꿈이라고 정신 차리라고 아버지를 흔들었지만 몇번 그런 일을 겪은 다음엔 아버지를 다시 눕게 하고 가슴을 쓸어드리며 아무 일도 아니에요,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괜찮아져요, 아버지,라고 속삭였다. 아무 생각도 마시고 주무셔요, 아버지…… 중얼거리다가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노래를 불렀다. 나는 왜 섬집 아기 노래를 자장가 로 알고 있는지. 면역력이 강했을 때의 아버지가 그리웠다. 간신히 땅에 발을 딛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상처들을 숨길 수 있었던 때의 아버지가. 초등학교 때의 나는 키가 컸다. 키만으로 보자면 4학년이었을 때 중학생 키만 했다. 큰 키 때문에 가을운동회의 행진 프로그램에서 매번 맨 앞줄에 서곤 했다. 맨 앞줄에 선 학생들은 행진의 진로를 외워야 해서 운동회를 준비하는 때마다 밤이 될 때까지 연습을 해서 나는 어두워진 다음에야 혼자 밤길을 걸어 집에 가야했다. 키는 6학년 아이들보다 컸을지라도 나는 4학년에 불과했다. 연습을 마치고 어두운 고갯길을 혼자 걸어 집으로 갈 때면 늘 두려웠다. 달이 뜨면 달이 무서웠고, 수풀 속에서 바스락 소리라도 들리면 숲이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아 나는 눈물을 매달고 집을 향해 숨차게 뛰다가 내 발짝 소리가 나를 잡으러 오는 소리같이 들려 그만 주저앉았다. 행진 연습을 마치고 집에 혼자 돌아오는 밤길이 무섭다고 행진에서 내가 빠질 수 있게 선생님께 말해달라고 조르자 아버지가 연습이 끝날 시간에 맞추어 자전거를 타고 학교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들일을 하다가 부리나케 학교로 달려온 아버지의 등에선 벼 냄새, 땀 냄새가 뒤섞여 맡아졌다. 한번은 교문 앞에 서 있을 줄 알았던 아버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가 오지 않아 혼자 고갯길을 걸어 집으로 가다가 갑자기 저 너머에 공동묘지가 있다는 생각이 났다. 그 생각이 나자마자 눈물이 핑 돌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행진 연습을 하느라 지친 다리에 힘을 주고 정신없이 집을 향해 뛰었다. 아이들에게 들었던 공동묘지에서 생긴 일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오르고 비 오는 날이면 공동묘지에 나타난다는 아기귀신이 바로 내 옆에서 함께 뛰고 있는 것도 같았다. 아무리 달려도 집으로 가는 밤길은 줄어들지 않고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길을 재촉하다가 가파른 고갯마루를 가쁜 숨소리를 내며 뛰어오고 있는 아버지를 만났다. 어둠 속에서 다급하게 뛰어오는 사람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자갈이 깔린 신작로에 주저앉아 다리를 쭉 뻗고 목청을 높여 울어댔다. 들판에 세워둔 자전거를 누가 말도 하지 않고 타고 가버려서 자전거를 찾다가 못 찾고 뛰어오느라 늦었다며 울지 마라, 하던 아버지의 숨찬 목소리. 아버지가 옆에 있을 뿐인데 내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던 두려움이 사라졌던 그때. 밤하늘의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 밤길이 더 캄캄해져도 무섭지 않았다. 숲속의 검은 그림자들이 너울거리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들판을 어슬렁거리던 짐승이 우리의 기척에 놀라 달아날 때 아버지 뒤로 슬쩍 몸을 숨겼던 그때. 아버지의 존재만으로도 두려움이 달아나던 그때가 그립게 떠오르곤 했다. 나는 곁에 있을 뿐 아버지의 두려움을 조금도 막아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 숨을 곳을 찾거나 나한테 이러지 마시오! 잠꼬대를 하거나 누군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급히 뛰쳐나가려고 했다. 문턱에 걸려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한 채 그대로 잠에 들기도 했다. 수면장애의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오면 아버지는 지난밤에 있었던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나지 않으세요? 처음엔 물었으나 차츰 묻지 않게 되었다. 기억나지 않는 지난밤을 상기시켜서 아버지를 다시 고통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 아버지가 잠들지 못한 지난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선산에 가보자고 했던 것도 잊었는지 아버지는 모자를 벗어서 내게 주었다. 옷걸이에 걸어두라는 뜻이었다. 그대로 아버지가 침대에 누우면 낮잠을 자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네 한바퀴 돌고 올까요?
아버지는 묵묵히 내게 내밀었던 모자를 다시 가져가 머리에 눌러썼다.
―선글라스도 쓰실래요?
―사람들이 흉본다.
―누가 흉을 봐요? 김순옥 씨가요?
내 말에 아버지가 웃어서 나도 따라 웃었다. 선글라스는 깨끗하게 닦인 채 상자에 담겨 아버지 침대 옆 서랍에 들어 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김순옥이라는 이름을 내 앞에서 한번 발음한 뒤로 몇번 의식적으로 김순옥이라는 이름을 들먹여봤다. 아버지가 식사를 안 하려고 할 때도 김순옥 씨가 보면 뭐라겠어요? 했다. 처음에는 나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는 이제 들은 척도 안 하고 웃어버렸다. 나는 아버지가 김순옥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장난치는 거였으나 아버지는 김순옥이 아버지에게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을 뿐 아니라 가끔 내가 아무 때나 김순옥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것에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김순옥이 누군지 얘기해주시면 더 말 안 할게요, 했더니 아버지는 내가 간다고 인사도 안 허고 와버렸응게…… 혼잣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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