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이름이 바뀌었다고 사람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오진숙은 한소영이 댓글을 일부러 지웠을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한소영이 자신에게 그렇게 대할 리가 없었다. 오진숙은 ‘시’라고 부르기에는 왠지 민망한, 작은 도시에서 자랐다. 멀리 바다가 보였지만 어업이 중심을 이루는 지역은 아니었다. 평범한 논과 밭, 그 사이에 드문드문 잡화점이나 ‘xx가든’이라는 상호를 붙인 음식점과 모텔 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동이나 두동짜리 아파트들이 서 있었다. 이런 데 엉뚱하게 아파트가 다 있다고, 차를 타고 지나가던 이들은 신기해했을지 모른다. 오진숙의 집도 그중 하나였다. 아파트 주민들은 대개는 근처에서 잡화점이나 음식점 혹은 모텔 등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였다. 일부는 근처 관공서에 근무하는 공무원 가족이었고, 오진숙처럼 꽤 멀리 떨어진 공장지역으로 출퇴근하는 아버지를 둔 가족도 살았다. 간혹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리고 왜 이곳까지 들어왔는지 모를 입주민들도 있었다. 한소영의 경우처럼.
한소영이 그곳에 나타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근방에 하나뿐인 인문계고교였지만 학력수준은 낮았다. 학생들은 세 그룹으로 극명히 나뉘었다.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살아남아 더 넓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가진 극소수와, 하루를 대충 때우는 것만이 목표인 대다수,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없이 거세게 현실을 불태우려는 소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곳을 떠나고 싶다는 의지가 충만하다는 것만은 세 그룹의 공통점이었다. 오진숙은 두번째 그룹과 세번째 그룹 사이의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었다.
짧은 봄이 지나고 여름방학이 가까워져갈 무렵, 한소영이 전학을 왔다. 가는 아이들은 많아도 오는 아이들은 거의 없는 동네였으므로 한소영의 등장은 큰 관심을 끌었다. 연회색 여름교복 치마 주머니에 양 손을 반쯤 찔러 넣은 채 천천히 교정을 걷는 그녀를 슬쩍슬쩍 훔쳐보는 것이 오진숙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세 그룹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리라는 것, 그곳의 아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재수 없어.”
오진숙의 단짝이던 민현주는 한소영을 싫어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우리를 무시하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본인은 알지도 못할 이유로 누군가를 미워하다니, 너무나 불공정한 일이라고 오진숙은 생각했다.
“이상하지 않아? 서울에서 왜 여기까지 온 거지?”
민현주는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고 떠들었다.
“사정이 있겠지.”
오진숙은 괜히 한소영을 감싸주고 싶었다.
“사정? 당연히 있겠지. 저거 봐라.”
민현주는 괜스레 의미심장한 척 중얼거렸다. 한소영은 손수건을 짧은 머플러처럼 목에 동여매고 다녔다. 얄브스름한 천으로 된 흰색의 손수건이었다.
“틀림없이 뭔가 감추고 싶은 게 있어.”
감추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진숙은 말짱해 보이는 공무원 아버지가 술 한방울 마시지 않고 밤마다 어머니를 구타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다. 간혹 말리는 아이들까지 같이 때린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다. 감추고 싶은 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인지, 옷으로 가릴 수 있는 곳만 골라 때린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원래 저런 애들이 속을 알 수가 없어.”
민현주가 중얼거리자 오진숙은 대답했다.
“꼭 서로 속을 다 알아야 되는 거야?”
한소영이 또 한번, 미니홈피에 남긴 그녀의 댓글을 빛의 속도로 지웠을 때, 오진숙은 아주 오랜만에 그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래도 그녀는 옛 친구를 끝까지 믿고 싶었다. 세번째 댓글엔 제 전화번호를 남겼다. 또 삭제할 줄 알아서였다. 예상대로 댓글은 삭제되었고, 하루 만에 문자메시지가 왔다.
-진숙아, 날 찾아줘서 고마워. 너무 보고 싶다.
소영이었다. 미니홈피에 남긴 댓글을 왜 지웠는지에 대해선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진숙이 아이엄마가 되어 살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라는 것 같았고, 언제 한번 보자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
-지금은 내가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정신이 없지만 조만간 꼭 보자. 연락할게.
전화번호를 알았으니 앞으로는 이쪽으로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미니홈피에 글을 남기지 말라는 뜻임을 오진숙은 알아챘다. 그후 몇해에 걸쳐 연락은 뜨문뜨문 이어졌다. 한소영은 응답을 안 하는 일은 없었으나 먼저 연락해오는 일도 없었다.
한소영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재작년이었다. 여러개의 불안정한 직장들을 떠돌던 오진숙이 보험회사의 설계사로 이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한소영은 오진숙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서 회사를 옮겼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내가 크게 도와줄 건 없지만, 혹시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너무 준비 없이 살아와서 이제 슬슬 보험을 비롯한 여러 금융상품에 관심을 가져보려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