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그 밤의 일에 대하여 추측할 수 있는 가능성은 크게 세가지였다.
첫번째, 김민규가 남재현을 납치, 살해 후 트렁크에 싣고 도주하는 중이었다.
두번째, 김민규가 남재현을 납치 후 트렁크에 싣고 도주하는 중이었다.
순서와 과정의 문제일 뿐, 결과적으로 두 경우 모두 결론이 같았다. 남재현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 유력한 용의자 김민규도 죽었다. 용의자 또는 피의자가 사망하면 해당 사건은 종결되는 법이었다. 처벌받을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건은 세간의 예상이나 화제성에 비해 쉽고 단순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번째의 경우는 달랐다. 그것은 남재현이 김민규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트렁크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는 남재현을 죽여서 차의 트렁크에 넣었을 수도 있고, 생존상태로 가두었을 수도 있다. 김민규는 이 모든 과정을 알 수도 있었고, 전혀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알았다면, 범죄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을 수도 있었고 단순히 운전만을 담당한 공범일 수도 있었다. 몰랐다면, 김민규 역시 또다른 의미의 피해자가 되는 셈이었다.
경찰의 수사는 세번째 가능성을 입증하는 데에 모아졌다. ‘그’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그것이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이었다.
아반떼 등록원부상의 소유자인 김은미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김은미의 현 주소지는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주택가의 다세대빌라 지하 1층이었다. 사고 다음날 오전, 그곳에 경찰들이 급파되었다. 한참 만에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나이를 정확히 가늠하기 힘든 여성노인이었다. 그녀는 김은미가 자신의 딸이라고 말했다.
“연락 끊긴 지 오년도 넘었어요.”
목소리에 풀기라곤 전혀 없었다. 딸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고 주장하는 노인이 김민규나 남재현에 대해 알 리 없어 보였다. 집 안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났다. 만화영화를 틀어놓은 것 같았다. 우하하하, 내가 악당들을 모조리 없애주마! 성우의 더빙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취학 연령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유아용 애니메이션이었다. 곧이어 네댓살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가 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경찰 제복을 입은 어른들을 발견하곤 아이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아이는 민소매 티셔츠에 팬티 바람이었다. 무얼 먹고 있었는지 입가가 반질거렸다.
“왜 나왔니? 얼른 들어가 있어라.”
할머니가 아이에게 손을 크게 내저으며 소리쳤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웃주민들은 그 집에 아이가 살기 시작한 지 일년 가까이 되었다고 증언했다.
“그 할머니가 장 볼 때 데리고 와서 과자 한두개씩 사주고 아이스바도 사주고. 애가 어린데 붙임성이 좋아요. 인사도 잘하고. 걔 할머니는 안 그래요. 자주 오면서도 당최 인사도 잘 안 하고, 표정도 없고. 첨에 아이 데리고 왔을 때도, 할머니랑 똑 닮았다고 누구냐고 물었더니 대충 얼버무리데요. 먼 친척이 잠깐 맡겨놨다나 뭐라나. 그게 벌써 작년 얘기예요.”
다세대주택 바로 옆 건물 소형마트 여주인의 말이었다.
“우리 손녀랑 비슷한 또래 같아서 걔 오면 내가 유심히 보거든요. 한창 어린이집 다닐 나이인데 아무 데도 안 다니는 거 같고, 또 한동안 아동학대인가 뭔가 끔찍한 얘기가 매일 뉴스에 나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 한 동네 사람으로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요즘에 할머니 혼자 오면 내가 슬쩍 묻지. 손자 뭐 하냐고. 그럼 항상 텔레비전 보고 있다고 그래.”
딸은 한번도 온 적이 없다고 했다.
“모르죠. 혼자 왔다 갔을지도. 내가 얼굴을 모르니까. 아무튼 그 할머니는 손자 말고 다른 사람하고 온 적은 없어요.”
여주인은 대화 중에서 자연스럽게 그 아이를 ‘손자’라고 말했다.
김은미의 전과기록 조회 결과, 한건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2010년, 상표위반 및 사기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것도, 아반떼를 구입한 것도 그 이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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